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70)
물론 국왕의 허락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애초에 허락을 하고 숙청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류티스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능력?’
본능적으로 아카데미에서 본 류티스를 떠올렸다. 파멸적인 주둥아리, 입담과 반비례하는 눈치…
뭐지. 혹시 아카데미에 있는 류티스랑 아르메인에 있는 류티스는 별개의 인물인가? 사실 류티스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있는 거 아닐까?
‘…아무렴 어때.’
홀로 고민해봤자 의미 없는 생각을 치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류티스가 쌍둥이든 이중인격이든 힘숨찐이든 알게 뭐냐. 중요한 건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류티스가 대신 처리해줬다는 거지.
고맙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던데, 트롤러도 1년에 한 번은 도움이 되는구나…
자국에서 공무원 하나가 사교계에 독을 풀든 말든, 타국에서 숙청의 바람이 불든 말든 황제는 황궁 깊숙한 곳에 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양위 조짐을 보여도 다른 군주가 그랬다면 나라가 술렁거렸겠지만, 솔직히 지금 황제는 제발 쉬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인물이니 오히려 다행이다.
현 황제는 즉위 초부터 몇 년 전까지 과로를 자처한 워커 홀릭이었고, 그 손에 박살이 난 귀족 가문도 여럿. 그냥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것이 귀족들과 공무원들의 멘탈을 위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황제가 놀아야 황태자가 구르잖아. 황제 폐하, 부디 만력제의 길을 걸으소서.
“대제께서 천명을 받드신 지 어언 300년. 끝없는 제국 역사에서 그 300년은 그저 일부가 될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부질없는 기원이었다. 아무리 황태자에게 차근차근 짬을 내던지는 황제지만, 폐회사만큼은 직접 나서서 진행했다.
“우리는 선대의 유산을 받아 후대에게 물려주는 가교일지니. 그 점을 잊지 말고 일치단결하여 정진하라.”
폐회사 내용은 평범했다. 매년 황제가 강조하는 단결과 진보를 올해도 언급했을 뿐.
귀족들도 늘 듣던 내용이니 별 부담 없이 폐회사를 경청했다. 황제를 향한 충성으로 단결하여 국익을 위해 진보하라. 딱히 어려운 명은 아니지 않나. 정말 작정하고 매국 행위를 꿈꾸는 것이 아닌 이상 ‘새해 잘 지내라.’ 같은 인사나 다름없는 말이다.
“태자도 한마디 하라.”
그렇게 무난하게 끝날 것 같던 폐회사는 갑자기 드리프트를 했다. 신년하례식의 마지막인 폐회사, 그 폐회사의 마무리를 황태자에게 넘기는 모습.
늙은 태양이 차기 태양을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광경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 파장이 일었다.
‘미치겠네.’
그 파장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렵다. 이거 진짜 장관 말처럼 1년 안에 양위 이벤트 뜨는 거 아니냐. 재수 없으면 아카데미에 있다가 통촉해달라고 대가리 박으러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동요와 달리 황태자는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황제에게 고개를 숙인 뒤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폐하의 하교처럼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다. 물려받은 유산을 당연히 생각하지 말고,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닌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앞선 황제의 폐회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발언. 당연한 일이다. 이 타이밍에 황태자가 황제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애초에 황제도 황태자에게 존재감을 실어주기 위하여 한마디 하라고 한 것이지, 정말 특별한 말을 원한 건 아닐 거다.
“그러나 조급해 할 것은 없다. 급하게 이어진 가교는 무너지는 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천년이 넘도록 이어질 가교이니.”
…기분 탓인가. 저 말이 ‘영원히 굴려주겠다.’ 라는 선전포고로 들리는데.
“그러니 그저 기다리겠다. 황실과 함께 지금을 보낼 그대들을, 훗날 그대들을 이어 황실을 섬길 보물들을.”
그 말을 하는 황태자의 시선이 슬쩍 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노골적인 시선에 손발이 나고 눈물이 덜덜 떨릴 것 같았다.
그딴 말을 하면서 날 보는 건 너무하지 않냐. 지금 살아있는 나도 알차게 굴리고, 내가 낳을 자식들도 기쁘게 굴리겠다는 암시잖아.
‘개새끼.’
어쩐지 오찬 때 잠잠하더라니, 이런 비수를 준비하고 있었구나.
성력 1378년의 신년하례식이 막을 내렸다. 마지막에 황태자가 내던진 암울한 예언을 제외하면 썩 괜찮은 신년하례식이었다.
반/지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아무튼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만간 영지로 찾아가 인사드리겠습니다.”
“하하, 편할 때 오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내 사소한 상처보다는 처부모님들을 배웅하는 게 우선이니까.
먼저 떠난 철혈공과 이오네스 후작, 곧 돌아갈 플란벨 백작과 아티니 남작.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니 느긋하게 갔으면 하지만, 다들 영지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업무를 봐야 하는데 어찌 붙잡을 수 있겠나.
게다가 황제가 작위 귀족들을 불러서 신년하례식을 하는 것처럼 영주도 가신들을 불러서 연회를 즐기는 것이 관례다. 장인 어른들에게 ‘관례를 무시하는 귀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보내드려야 한다.
“사실 하나뿐인 딸이 집에도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야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겠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어색함이 많이 사라진 아티니 남작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웃는 얼굴과 달리 말한 내용은 많이 민망했지만.
루이제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단 한 번도 자기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학기 중에는 아카데미, 방학 중에는 내 저택에서 지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불꽃 효녀가 따로 없네. 핑크 카피바라가 아니라 염속성 카피바라였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군요. 이런 걸로 동질감을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옆에 있던 플란벨 백작도 아티니 남작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애석하게도 이리나 역시 루이제에 버금가는 불꽃 효녀였으니.
“…죄송합니다, 진작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그러나 루이제와 이리나가 불꽃 효녀가 된 것에는 내 지분이 크다. 그렇기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자, 두 장인 어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연락은 꼬박꼬박합니다. 게다가 감찰부장의 옆만큼 안전한 곳도 없겠지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행이다. 소중한 딸을 납치감금하는 약탈자가 아니라 든든한 사위로 봐줘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아티니 남작과 플란벨 백작에게 몇 번이나 사과와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야 모든 처가를 배웅할 수 있었다. 다음에 전부 모이는 건 결혼식 때겠지.
“처가가 넷이다 보니 배웅하는 것도 일이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배웅을 끝내자 장모님들과 대화를 나누던 어머니가 살며시 다가왔다. 가주는 제국의회 일 때문에 진즉에 돌아갔고.
아무튼 어머니께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얼굴에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어째 이번 신년하례식 기간 동안은 볼 때마다 웃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분이었나.’
조금은 신기하다. 평소 정숙하지만 밝은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분인데, 장남의 결혼은 부모 입장에서 치트키기는 하구나.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겁니까?”
“영주가 없으니 부인이라도 자리를 지켜야지.”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의회에 끌려갔다면 부인이라도 복귀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집사장이 버티고 있다지만, 영주 일가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업무가 원활한 법이다.
…그런데 영주 일가 하나, 영지에 남아 있잖아.
“에리히도 있으니 서두르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 아이는 업무에 미숙하잖니.”
에리히를 언급하자 어머니는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부터 업무에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르고 구르다가 이 자리에 오른 건데.
하지만 어머니가 선을 긋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러려니 넘어갔다. 후계자가 굳건한 상황에서 갑자기 다른 아들이 영지 업무에 관여하면, 가신들에게 괜한 혼란을 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에리히는 세라와 지내느라 바쁘단다.”
아닌가? 후계 구도 혼란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걱정하는 건가?
입꼬리가 더욱 올라간 어머니의 모습에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유가 뭐든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결과는 같은데.
“어머니 돌아가신다. 다들 인사 드려.”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마자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며느리들에게 손짓을 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 며느리들의 배웅을 받고 가시면 더 기뻐하겠지.
실제로 어머니는 다섯에게 둘러싸여 인사를 받자 어쩔 줄 몰라하셨다.
이게 효도구나… 난생 처음 하는 일이다.
***
벌써 신년하례식이 끝났다. 이제 사흘 후면 결혼식이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르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물론 결혼식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평소보다도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 같다.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왜.
“에넨께 매일 기도를 드렸어요. 하루라도 빨리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고요.”
“귀여운 기도군요. 에넨께서도 크리스티나 양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으실 겁니다.”
싱글벙글 웃는 크리스티나 양의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도를 했다고 정말 시간이 빨리 흐르지는 않겠지만, 기분이 묘한 건 어쩔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크리스티나 양은 사제의 길이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도 효과가 확실한 거지.
대단하다, 신이 기도를 직접 들어주는 존재라니… 그런 사람이 보조 교사를 하는 건 인력 낭비가 아닐까…
“라파예트 씨도, 보고 싶으신가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는 크리스티나 양의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입니다. 가능하다면 오늘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 어차피 임박한 결혼이면 즐기자. 게다가 크리스티나 양이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나.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로 발전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만나면 만날수록 대화도 잘 통하고 편안해지는 사람이다. 어디 이상한 영애와 정략혼으로 엮일 바에는 이게 낫지.
그런 마음을 담아 단호히 대답하자 크리스티나 양은 더욱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역시 마음이 편해진다. 사교계에 능통한 살벌한 영애들을 보다 이런 순박한 반응을 보니 치유가 되는 기분이야.
“곧 부부가 될 것들이 아직도 존칭이더냐.”
그렇게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는 사이, 저택을 빌려준 장관님이 자연스레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모부!”
“그래, 이모부 왔다. 잘 있었느냐?”
그리고 반갑게 맞이하는 크리스티나 양의 모습에 꿈에 나올까 두려운 따뜻한 미소를 지으셨다.
‘미치겠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내가 아는 장관님의 미소는 사람을 찢어 죽이기 직전에 짓는 살인 미소밖에 없는데.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 양 마음 속의 장관님은 다정하고 듬직한 이모부니까.
…다정…
‘다정한 사람 다 죽었나.’
머리가 아프다.
자식이 결혼하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설령 그 자식이 친자식이 아닌 마음 속에 담은 자식이라도 말이다.
부인을 닮은 남색 머리의 조카. 친자식은 아니기에 그 아이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고 같이 지낸 적도 많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예의 바르고 다소곳한 모습만을 봐서 더욱 귀엽게 느껴지는 조카.
애석하게도 부인이 아닌 나를 닮아서 애교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식들과 달리, 부인의 소싯적 성격을 쏙 빼닮은 여아. 눈에 밟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고, 챙겨주고 싶지 않다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모부! 저기 잠자리!”
“그래. 꽤 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