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74)
그런 어머니의 눈길을 무시하며 부인께서 다시 입을 여셨다. 확실히 칼 오빠는 본 지 오래됐지.
아마 오빠가 연인들과 영지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면, 내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못 볼 가능성이 높았다. 오빠는 워낙 바빠서 병문안을 오지 못하니까.
‘여섯…’
그리고 오빠가 데려올 연인의 숫자를 떠올리자 조금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여섯이라니. 그것도 동시에 여섯이라니. 지금 백작님과 부인은 일부일처로 행복하게 지내고 계신데, 아들인 칼 오빠는 왜.
‘…전대 백작님은 부인이 여럿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대를 이어서 피가 발현된 건가? 그러면, 그러면 혹시 에리히도 칼 오빠처럼 부인을 여럿 들이게 되는 건가?
‘싫어.’
떨리는 손으로 에리히의 손을 잡았다. 싫어. 나만의 기사님을 다른 여자와 공유하는 건 싫어.
에리히는 나만의 기사님이야. 어릴 때부터 나만 지켜준 기사님이고, 나만이 지켜본 기사님이야.
“세라?”
갑자기 손을 잡자 에리히가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조금 추워서… 잠깐만 이러고 있어도 돼?”
그런 에리히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실 거짓말이다. 잠깐이 아니라 평생 이러고 싶다.
지금 잡고 있는 이 손이, 오직 나만 잡을 수 있는 손이면 좋겠다.
언제 도착한다고 언질을 줘서 그런지, 영주성 정문까지 손님맞이를 위한 인파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 인파 중 보여야 할 인물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가주 어디 갔어.’
아무리 살펴도 가주가 보이지 않는다. 아들과 며느리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정작 가문의 주인이 부재 중인 기묘한 상황.
이상하다. 차라리 저번 여름 방학 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면 손님맞이를 어머니에게 완전히 맡겼다고 생각할 텐데, 이 타이밍에 잠적했다고?
심지어 신년하례식 기간 중에 했던 상견례 자리에서도 가주는 그럭저럭 평온한 표정이었다. 내 연인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고, 설령 속으로 불만을 품었더라도 이렇게 노쇼를 할 정도로 티를 낼 인물이 아니다.
“의장님과 만날 일이 있다고 하더구나. 늦어도 오늘 안에는 돌아올 거야.”
내 의문을 눈치 챘는지 어머니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저런.’
사정을 알고 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일 때문에 바빠서 못 온 거구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어쩌겠니. 의원이 새해에 바쁜 게 한두해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휴가 내고 온 공무원이 머쓱해지는데.
하지만 이 제국에서는 새해 한정으로 입법 공무원이 행정 공무원보다 압도적으로 구르는 편이다. 그러니 그냥 입을 다무는 수밖에.
‘내 미래.’
조금 착잡하다. 제국백 작위에는 기본적으로 의원직이 딸려있는지라, 내가 작위를 물려받으면 자동으로 의원이 된다.
물론 과도한 업무 쏠림을 방지하기 위해 행정부 과장이나 군부 상급 지휘관 수준만 돼도 혈육을 의원 대리로 보낼 수 있지만, 내가 대리를 보낸다는 건 그때까지 퇴직에 실패했다는 의미 아닌가.
끔찍하네 그거. 내 팔자는 진짜 일하다가 죽는 팔자인가.
‘블랙 카우 칼 크라시우스…’
아마 블랙 카우와 한 세트인 옐로 카우는 황태자일 거다. 어쩐지 그 새끼 금발이더라.
“어서 오렴. 오는데 불편한 건 없었니?”
아무튼 애써 씁쓸함을 억누르며 적당히 안부 인사를 주고 받은 후, 어머니는 반짝이는 눈으로 마르게타에게 다가갔다.
“네, 텔레포트로 와서 편안했어요.”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마르게타의 모습에 어머니의 시선이 마종공에게 향했다. 마종공을 향한 시선에도 어색함보다는 애정과 따뜻함이 가득했다.
“베아트릭스 덕분에 며느리들을 더 빨리 볼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저도 부인을 빨리 뵙고 싶었으니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닙니다.”
백작부인이 공작을 본명으로 부르는 패기 넘치는 상황. 하지만 대화 자체는 화기애애하게 이루어졌다. 애초에 당사자도 동의한 상황이니까.
마종공을 며느리로 받아야 한다는 현실에 수긍한 어머니는 상견례 중, 한 가지 타협점을 제시했다. 아직 반말은 무리지만 본명을 부르며 편안한 말투로 대하겠다고. 마종공도 한 번에 모든 걸 가질 생각은 없는지 기꺼이 동의했고.
‘저렇게 익숙해지는 거지.’
그리고 본명을 부르는 상황이면 이미 절반은 넘은 거나 마찬가지다. 원래 이름을 부르면 익숙해지고, 점점 친해지고 그런 거니까. 군대에서 선임을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 동기로 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며느리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어머니를 뒤로 하고 에리히에게 다가갔다.
“잘 지냈냐?”
“나야 뭐, 못 지낼 것도 없지.”
심드렁한 에리히의 대답에 고개만 끄덕였다. 확실히 영지에만 박혀있을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겠나.
“세라도 오랜만이다. 거의 3년 만인가?”
그런 에리히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옆에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라 가물가물하지만, 금발에 벽안이면 정황상 세라가 맞겠지.
게다가 마지막으로 봤던 세라의 얼굴이 얼핏 겹쳐 보였으니 맞을 거다. 다행히 도중에 역변하지 않고 곱게 자랐네. 시녀장 딸이면 당연한 결과지만.
“네,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미안하다. 얼굴이라도 좀 비춰야 했는데 너무 무심했네.”
“괜찮아요. 에리히가 오빠 몫만큼 와줬거든요.”
살포시 고개를 저은 세라는 빙긋 웃더니 에리히의 손을 잡았다. 얼핏 보면 자연스럽지만, 자세히 보면 묘한 떨림이 있는 손으로.
‘오.’
그 수줍은 모습에 본능적으로 느꼈다. 세라가 에리히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비록 호감이 like 수준인지 love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여자가 아무 관심도 없는 남자의 손을 잡겠나. 3년 만에 세라를 본 나도 눈치챌 정도면 근처 사람들은 진작 깨달았을 정도로 노골적인 수준이다.
그래,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고도 모르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머리가 없는 거지.
‘…없구나.’
그리고 에리히의 표정을 보자마자 느꼈다. 이 새끼 머리 없다고.
이상하다. 에리히와 세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다. 분명 세라는 수줍음과 풋풋함이 가득한데, 에리히는 무념무상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세라의 손을 잡고 있다.
미친놈아, 당장 웃어. 그 표정 보면 세라 울어.
‘원래 이런 놈이긴 했지.’
답답함과 동시에 미묘한 체념도 함께 몰려왔다. 루이제에게 차인 이후로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잊고 있었는데, 얘 원래 자기 연애 관련으로는 눈치도 지능도 유감스러운 놈이었다.
그게 하필 루이제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도 적용되는구나…
‘그나마 경쟁자는 없네.’
그래도 다행이라면 루이제 때와 달리 경쟁자가 없는 1:1 상황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의 무눈치, 무지능도 큰 타격은 없다.
단지 세라의 속이 뜨겁게 타오를 뿐. 겨우 건강을 되찾아가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화병으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둘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소꿉친구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에리히의 말에 세라가 기쁨과 섭섭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이 세라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친구라고 선을 그은 발언인지라.
“이거 개학하면 세라가 심심할 텐데 어쩌나. 그 전까지 같이 지내야겠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세라를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에리히의 첫사랑을 빼앗은 입장으로서 이 정도는 도와야지.
마침 경쟁자도 없고 소꿉친구라는 추억 공유도 있으니 급할 건 없다. 그냥 만날 수 있을 때 최대한 만나고, 에리히가 세라의 호감을 눈치 챌 정도로 부딪히다─
“아, 세라도 아카데미에 입학해.”
보면…?
“입학?”
“이번에 2학년으로 입학하기로 했어요.”
뒤이은 세라의 발언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나은 건가?”
이건 조금 놀라웠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침대에 누워서 생활한 아이인데, 아카데미 활동을 할 정도로 회복됐다고? 난 기껏해야 외출 잠깐 할 정도로 호전된 걸로 알았는데.
“아카데미에서는 자주 보겠네요. 잘 부탁해요, 오빠.”
“어, 그래.”
“오빠가 제과 동아리 고문이라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동아리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래도 지인이 건강해진 게 나쁜 소식은 아니지.
오랜만에 동아리 명부를 갱신하겠구나…
***
제도 인근 호수.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 동료 의원들과 함께 방문하여 숨을 고르는 한적한 쉼터.
“오늘은 날이 아니군.”
“물고기도 겨울잠을 자던가.”
동시에 의원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낚시 명소. 오늘도 이 쉼터 겸 명소에 셋이 모여 겨울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사실 칼이 며느리들과 함께 영지에 온다고 한 날이니 이럴 때가 아니지만, 하필 이 낚시 약속을 한참 전부터 잡았다는 게 문제다.
물론 사정을 설명하면 다음으로 미룰 수 있겠지만, 약속 상대 중 하나인 바르돈 백작은 옛날부터 약속이 밀리면 은근히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덜해지기는 했지만, 친구라는 죄로 나에게는 그 성격이 여전한 것이 문제.
덕분에 부인에게는 일 때문에 조금 늦는다 하고 호수로 왔다.
‘이것도 일이기는 하지.’
의원으로서 의장인 바르돈 백작과 어울려주는 사회 생활. 누가 봐도 업무의 일부지 않나. 부인도 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영 소식이 없는 낚싯대를 노려보던 바르돈 백작, 발터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