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76)
“죄송해요, 도련님.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 아뇨. 괜찮습니다.”
멍하니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를 보는 사이, 이제 첫 번째 형수님이 될 마르게타 공녀가 입을 열었다.
사실 안 괜찮다. 너무 갑작스럽다. 하지만 마르게타 공녀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예비 형수들이 우르르 몰려와 잡아가는데 어찌 싫다고 말하겠나. 막말로 싫다고 발버둥치다가 둘째 형수님… 의 심기를 거스르면 무슨 꼴을 당할지 두렵다.
그래, 다행히 세라도 유모와 같이 있으니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데, 무슨 일로…?”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용무를 끝내야 하니 직설적으로 물었다. 만약 대화가 길어지면 세라가 나를 찾느라 성을 헤맬지도 모른다.
“도련님의 조언이 필요해서요.”
“제 조언을요?”
의외인 말인지라 눈만 깜빡였다. 조언? 누구한테? 나한테? 대륙 제일의 마법사인 마종공을 두고 굳이 일개 학생인 나한테?
…왜…?
“칼과 가족인 도련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조언이거든요.”
혼란과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읽었는지, 마르게타 공녀가 조심스레 덧붙혔다.
“곧 칼의 생일이잖아요.”
아, 그거구나.
생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짚이는 것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인 형의 생일, 가족인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연인들.
뻔하다. 형이 좋아할 선물을 묻는 거겠지. 며칠 후면 생일인 상황에서 묻는 건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지만, 어차피 선물 사는 것 정도는 금방이니까.
“모릅니다.”
“네?”
“형 취향이요. 저도 잘 모릅니다. 워낙 가리는 거 없는 사람이라.”
그렇기에 미리 대답했다. 뭔가 예전에도 비슷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 적이 있던 것 같은데, 난 정말 모른다.
형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취향이라는 걸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받으면 망가질 때까지 쓴다. 그런 무난하고 동글동글한 사람이 형이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아무거나 줘도 형은 기뻐─ 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종공이 허공에 손짓을 하자, 마종공을 중심으로 상자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한 개, 두 개, 이윽고 십여 개, 수십 개, 거의 백이 넘는 상자들이 나타나 쌓이는 광경은 꽤나 장관이었다.
“선물은 준비했어요. 그런데 그게 좀, 많이 준비해서…”
“아, 예.”
아직도 쌓이고 있는 상자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지 이거. 취향을 모르니까 무작정 산 건가? 하나는 얻어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네. 저 중에 형 취향 하나 정도는 있겠지.
“이왕이면 칼이 정말로 좋아하는 걸 주고 싶어요. 그냥 많이 주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이잖아요.”
아니, 물량이 일정 수치를 넘으면 그것도 성의가 아닐까 싶은데. 원하는 걸 주기 위해 백이 넘는 선물을 준비하는 정성을 어떻게 따라하겠나.
그래도 간절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여섯 쌍이다 보니 차마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시선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셋, 나보다 연상인 분들 둘, 감히 우러러 볼 수도 없는 존재 하나지 않나.
“저기, 아니면 오빠한테 없는 거… 그런 건 없을까?”
상자의 탑을 보며 고민하고 있자 이리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 좋은 접근법이다. 형이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차라리 없는 걸 주는 것도 방법이겠지. 원래 선물은 내 돈 주고 사기는 묘하지만, 남한테 공짜로 받으면 좋은 것들이 최고지 않나.
‘뭐가 없지?’
그런데 그것도 모르겠다. 애초에 형이 뭘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
…아.
“휴가?”
머리를 굴리다 무심코 떠오른 단어를 뱉었다.
아, 아닌가. 휴가가 아니라 은퇴가 없나?
일단 형이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걸 찾는 거면, 휴가하고 은퇴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휴가라는 말을 들은 여섯 형수님─ 말할 때마다 어지러운 호칭을 가진 여섯 명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획기적인 답을 들은 것처럼 눈이 동그랗게 변한 사람, 안타깝고 서글픈 기색이 역력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내 말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처럼 사색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그 와중에 형의 부하라는 분은 입술을 꾹 깨물며 어깨를 들썩이더라. 아마 웃음을 참는 것 같은데.
‘안 되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형과 같이 일하는 사람의 반응이 저러니 대충 알 것 같다. 형이 생일 선물로 휴가를 받는 건 요원하다는 것을.
하긴, 없거나 안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나. 쉽게 가질 수 있었으면 선물 후보에 오르지도 않았을 거다.
“사실 연인들과 생일을 함께 보내는 것 자체로도 선물 같습니다. 애초에 지금도 휴가를 써서 온 거고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솔직히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사색에 빠진 마종공을 보니 꼭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했다.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면 조만간 마종공이 황실에 공개 청원을 올릴 거라고. 심지어 그 청원이 예비 남편에게 휴가 좀 달라는 기상천외한 청원일 거라고. 그런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면 땅에 얼굴을 붙이고 사는 형을 볼 것 같았다.
‘나라면 혀 깨문다.’
아니, 혀만 깨무는 게 아니라 기절할 때까지 숨을 참을 수 있다.
압도적 연상인 예비 아내가 한참이나 연하인 예비 남편의 휴식을 보장하라고 황실에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 상상만 해도 두렵고 아찔하다. 마종공이 형을 아가라고 부르던데, 그런 일을 겪으면 기둥서방을 넘어서 진정한 아가가 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좋아하려나?’
하지만 잠깐 확신을 잃고 말았다. 나라면 두렵고 아찔하지만, 어쩌면 형은 간절히 바라지 않을까? 오명과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휴가를 가지고 싶지 않을까?
물론 그 슬픈 추측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간직했다. 만약 형이 괜찮더라도 내가 그 광경을 볼 자신이 없으니까. 휴식을 위해 마종공의 아기로 전락하는 형이라니,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괴담이다.
‘어차피 결혼하면 많이 쉴 텐데.’
그렇기에 애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뻗었다. 그래, 제국에는 결혼 휴가와 출산 휴가라는 것이 있다. 부인도 여섯이니 결혼 휴가도 여섯 배, 출산 휴가도 여섯 배다. 자식을 많이 낳으면 여섯 배보다 많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 산 물건을 주는 건 어떻습니까? 형을 생각하며 제일 먼저 떠올린 선물이라는 거니, 제법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 이상한 방향으로 대화가 흐르기 전에 황급히 선물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전부 주는 것도 꺼려지고, 휴가를 주는 것도 불가능하면 이게 무난하지.
원래 직감적으로 고른 첫 번째가 가장 좋은 법이다. 괜히 생각이 길어지면 이상한 결과만 나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형수 포위망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민에 빠진 것 같은 마종공을 보니 불안감이 몰려왔지만, 내가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믿는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형이 알아서 하겠지. 힘없는 학생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난 몰라.
‘이런.’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며 복도를 헤매는 세라를 보자마자 형에 대한 생각을 밀어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방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세라가 먼저 나를 찾게 만들었다.
민망하다.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서 세라 곁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심지어 나만 의지하겠다던 세라에게 당당히 그러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이리 방치해버리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세라.”
“아, 에리히.”
내 목소리에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세라가 미소를 지으며 반겨줬다.
“여기 있었구나. 방에 없길래 어디 갔나 했어.”
“미안해. 찾는 사람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어.”
“후후, 괜찮아. 나도 방금 어머니하고 헤어졌는걸?”
그렇게 말하는 세라의 손은 누가 봐도 떠는 중이었고, 호흡마저 묘하게 가팔랐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동요했다는 의미.
당연하다. 아무리 괜찮은 척을 해도 세라 입장에서는 일생 첫 외출, 첫 모험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낯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겠지. 세상과의 접촉이 극단적으로 적었던 세라 입장에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고 성에 온 것일 텐데 정작 의지 대상이 사라졌다. 세라가 받은 충격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 내가 방에 없으면 그냥 기다려도 충분한 것을 이렇게 찾아다닐 정도가 아닌가.
“그래도 레이디를 바람맞히다니, 나쁜 기사님이네.”
장난스런 세라의 말에 쓴웃음이 나왔다. 분명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걸 보니 더욱 미안했다.
“그러면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렇기에 슬쩍 손을 내밀었고, 세라가 내 손에 오른손을 얹자마자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예전부터 세라는 기사와 레이디처럼 행동하는 걸 좋아했다. 화가 났을 때도, 우울할 때도 이러면 기분이 풀렸었지.
“이번만 특별히 기회를 드린 거예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어느새 손의 떨림이 가라 앉았으니까.
“감사합니다, 레이디.”
솔직히 성인이 되고도 이러는 게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세라가 좋아하는데 어쩌겠나. 이 정도는 당연히 맞춰줘야지.
게다가 이제 와서 싫다고 하기에는 벌써 10년 가까이 이러고 있었고.
***
회개합니다. 가주를 보고 감히 보물 고블린이라고 생각한 불효를, 어머니를 보고 무지개를 멘 것 같다고 생각한 불효를 회개합니다.
그러니 에넨 이 새끼야, 보고 있다면 좀 용서해줘. 사람을 세상에 둘도 없을 유니크 등급 몬스터로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무지개 보물 고블린.’
설마 내가 둘을 합한 완전체가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식이 부모를 닮는 건 맞기는 한데, 이런 것도 닮을 필요는 없지 않나.
“카, 칼.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어느새 다가온 생일, 아침부터 시작된 생일 축하 연회, 연회 시작과 동시에 쏟아진 선물─ 이라는 이름의 폭격. 멍하니 알록달록 포장된 폭격의 부산물을 보니, 옆에서 마르게타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 사실 가장 좋은 걸로 하나만 고르려고 했는데, 다 칼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마치 변명을 하는 것처럼 덧붙인 마르게타의 모습에 작게 헛웃음이 나왔다. 근처에서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니 마르게타뿐만이 아니라 여섯 명 전원이 폭주한 것 같다.
“분명 하나만 고르라고 했었는데.”
에리히가 상자 더미를 보고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대표로 나에게 설명 중인 마르게타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단하네. 이게 그나마 조언을 구한 결과야? 조언조차 구하지 않았다면 대체 어떤 걸 주려고 했을까.
‘가게를 안 준 게 다행인가.’
그래, 공작가의 재력을 생각하면 가게로 폭격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일 수도 있다. 여차하면 땅문서로 싸대기를 맞을 뻔했는데 선물 상자 정도야 아기자기한 애교나 마찬가지지.
고맙다, 에리히. 네가 내 멘탈을 구한 거야.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로요.”
아무튼 고개를 숙인 마르게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