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77)
보편적인 상식과 궤를 달리하는 양이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나를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 아닌가.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할 일이지, 싫어할 이유는 없다. 선물이 많다고 싫어할 정도의 사람이면 인성이 얼마나 꼬인 걸까.
“오늘 하루는 선물을 확인하느라 즐거울 것 같습니다.”
과장이 아닌 진심이다. 단순히 포장지를 까서 상자를 여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꼬박 소비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솔직히 하루도 부족할 것 같기는 한데.
물론 이 역시 좋아하면 좋아할 일이지, 싫어할 일은 아니다. 원래 가챠는 결과를 확인하는 것보다 누르는 그 순간이 더 두근거리는 법이고, 선물의 양을 보니 가챠가 복사되어 있는 수준이다. 너무 기쁘다…
‘포장지 색도 다 다르네.’
자세히 보니 포장지 색깔도 여섯 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철저하네, 이러면 누가 준 선물인지도 알 수 있겠어.
“고맙습니다. 평생 받을 선물을 오늘 다 받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마음만 받겠습니다.”
감사한 말은 마음으로만 받았다. 매년 이렇게 받으면 창고를 10층 건물로 지어야 할 테니. 화려한 이벤트는 일생의 한 번으로 족하다.
내 단호한 차단에 어색하게 미소 지은 마르게타는 슬쩍 자리를 비켰다. 놀랍게도 아직 선물을 줄 사람들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가 준비한 것도 저 중에 있을 것 같구나.”
마르게타에 이어 다가온 어머니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 와중에 웃기 힘든 말씀을 하셔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짜 가주와 어머니가 무슨 선물을 준비했든, 저 선물더미 중에 같은 게 있을 것 같아.
“같은 게 있어도 이걸 사용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단다. 늙은 우리가 고른 것보다는 젊은 아이들이 고른 게 더 좋겠지.”
그건 조금 경솔한 발언이다. 그랬다가 마종공 선물과 겹치면 그 어색함을 어떻게 견디려고.
그 뒤로도 에리히, 세라, 집사장, 시녀장, 시종장 등등.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무수히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들을 다 합해도 마르게타 혼자 준비한 것보다 적다는 게 놀랍지만.
아무튼 연회가 끝난 뒤, 홀로 방에 박혀서 하나하나 선물을 확인했고─
“이 시발.”
에리히의 선물을 보자마자 육성으로 욕이 나오고 말았다.
“형한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어. 최대한 좋은 걸로 샀으니까 잘 쓰고.”
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상자를 건네던 에리히. 꼭 필요할 것 같다고 하길래 만년필 정도를 생각했었는데.
‘라꾸라꾸…’
상자를 열자 보인 건 판타지 버전 라꾸라꾸였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야구공 크기에서 사람 하나가 눕기에 충분한 크기로 변하는 마법의 정수. 이미 부장실 구석과 당직실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공무원 필수 용품.
라꾸라꾸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새끼, 하필 준비해도 이런 걸 준비했어.
‘…동아리실에 둘까.’
그래도 에리히 말처럼 필요하고 유용한 물건인 건 사실이다. 그러니 이미 온갖 곳에 던져뒀지.
그래… 이건 동아리실에 두자. 동아리실 구석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망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도로 복귀하기 직전, 배웅 목적으로 나온 에리히를 바라봤다. 이번 생일은 어느 때보다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정작 에리히가 준 라꾸라꾸만 기억에 남은 서글픈 생일이었다.
그렇기에 다짐했다. 에리히의 진로는 내가 책임지고 공무원으로 정할 거라고. 다른 꿈이 있어? 오늘부터 버려라, 넌 그냥 공무원이야. 행정이든, 입법이든, 사법이든, 하다못해 군부나 기사단이든 무조건 공무원이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이면 당연히 황실과 제국을 위해 봉사해야지.
그러나 행정이나 입법 쪽은 이미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이 버티고 있는 상황. 가족이 나란히 행정 요직, 입법 요직을 차지하는 건 눈치가 보인다.
‘군부가 적당하겠네.’
그러니 군부가 최선의 방안이다. 전승공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에리히도 무인 성향이 강하니까.
꼭 에리히를 군부로 보내서 입대 선물로 라꾸라꾸를 주리라. 아니, 군부면 라꾸라꾸보다는 1인용 텐트가 어울릴 수도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펼쳐지는 텐트, 군인의 이상향 아닌가.
“형?”
여차하면 두 개 전부 주겠다는 마음으로 에리히의 어깨를 토닥이자 에리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선물 고맙다.”
그런 에리히에게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정말 고맙다.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었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잊지 않을 선물.
그리고 형제의 우애로운 모습에 어머니도 감격했는지, 조금 초췌한 안색의 가주를 뒤로 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에리히가 준 게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예, 정말 유용한 물건을 받았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솔직히 유용한 물건은 맞다. 내 아지트나 다름없는 동아리실에 배치하면 딱인 물건이니까.
그래서 잊지 못할 선물인 거다. 그 라꾸라꾸를 볼 때마다, 내 몸을 누일 때마다 에리히의 호의를 되새길 예정이니. 이게 대충 와신상담인가 하는 그런 건가.
‘…괜히 말했나.’
그 와중에 열렬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많고 많은 선물 중 에리히의 선물만 언급해서 그런지, 은근한 질투와 아쉬움이 섞인 여섯 쌍의 시선이 등에 꽂혔다.
이 오해는 저택에 돌아가서 풀자. 방금 한 건 감사 인사가 아니라 동생의 미래를 강탈하겠다는 낙인이었다고. 그러면 질투는 금방 사라지겠지.
실제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에리히가 준 선물에 대해 말하니, 1과장은 그 자리에서 빵 터지며 끅끅거렸다.
‘시발.’
솔직하게 웃는 건 좋은데, 다른 사람들처럼 참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될까. 마음이 좀 아프다.
휴가는 생일 당일까지만 신청해서 오늘은 칼같이 출근해야 했다. 뭔가 불타는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 출근을 하는 것 같지만 어쩌겠나. 어서 퇴직을 해야 월월월월월토일이 아닌 토토토토토토토의 생활을 보낼 텐데.
“부장님.”
“어, 별일 없었어?”
“장관 각하께서 찾으신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1과장과 함께 감찰부에 복귀하자마자 차장이 섬뜩한 소식을 전달했지만, 이번만큼은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장관의 호출을 받는 건 당연하니까.
내 생일은 대충 1월 말. 즉 신년하례식이 끝난 뒤 몇 주 근무하면 내 생일이 되고, 생일이 끝나면 2월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는 뜻. 당연한 말을 거창하게 하는 것 같지만 이 미묘한 시간 간격이 중요하다.
“다들 서둘러서 움직이나 보네.”
“늦으면 예산이 날아가지 않습니까. 급할 수밖에 없죠.”
지극히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느긋하게 움직였다가 다른 부서에 밀리면 빈 깡통만 차야 하니까.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온 2월. 그 2월은 제국 공무원들이 단체로 광전사가 되는 기간이다.
‘돈이 걸리니 다들 미치지.’
연말이 되면 재무성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그걸 일방적으로 각 부서에 보낸다. 그렇게 보내진 정규 예산은 정말 어지간한 사유가 없는 이상 변동되지 않는다. 그 어지간한 사유를 위해 장관을 귀찮게 하는 부서도 많지만 보편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예산을 받은 부서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떡상 기회. 정규 예산이 아닌 추가적인 예산을 쟁취할 수 있는 꿈과 기회의 시간, 바로 추가 예산 편성 기간이다.
거창한 건 아니다. 그냥 ‘우리 이거 가지고 못 산다!’ 라는 부서들이 나름의 근거 자료를 들고 재무성에 방문하면 장관이 수락하거나 기각하는 것뿐.
‘존나 거창하지.’
그냥 거창한 수준이 아니다. 한 부서의 1년 명줄이 걸린 존나 거창한 기간이다.
신년하례식을 마친 공무원들은 즉각 부서로 돌아가 정규 예산 목록을 확인하고, 최대한 더 받을 수 있는 근거를 긁어모으며 1월을 태운다. 그렇게 영혼을 불사르며 돈 더 달라는 보고서 작성이 끝나는 시점이 대충 1월 말.
하지만 돈에 눈이 돌아간 공무원들이 2월까지 잠잠히 기다릴 리가 없고, 1월 말부터 미리 재무성에 방문해 장관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그것이 대충 내 생일이 끝난 직후.
‘1주만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내 생일은 이 기간에 대비하기 위한 휴식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생일이라고 휴가까지 즐겼으니 어서 일이나 하라는, 마치 하늘이 정해준 것 같은 절묘한 시간 간격.
물론 1주 늦게 태어났으면 휴가마저 기각당했을 확률이 높지만.
‘내 손까지 빌릴 정도면 오죽할까.’
사실상 제국의 모든 부서들이 찾아오는 기간이기에 손 하나가 절실한 상황. 그런 장관 입장에서 ‘감찰’부장은 매력적인 노동력이겠지.
다시 생각하니 빡치네. 군부에 있어야 할 팔자가 재무성에 있으니 별 고생을 다하잖아.
‘개새끼.’
역시 내 인생 절반의 고통은 황태자 때문이다.
***
귀찮다. 추가 예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돈이 필요하다면 백금화 몇 개 정도 쥐여주고 돌려보내고 싶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예산 관련 문제를 대충 처리하면 그 여파는 수십, 수백 배로 불어나서 돌아온다. 지금 편하자고 미래를 버릴 수는 없다.
“각하,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네.”
그렇기에 기계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형무성에서 온 관료를 돌려보냈다.
‘망할.’
그리고 관료가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짚었다. 다른 곳도 아닌 형무성에서도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형무성은 정규 예산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부서였는데.
“사형수들을 대대적으로 처리하고 교도소를 단장할 예정입니다.”
설마 그런 이유를 들이밀 줄 누가 알았겠나. 사형수 처리와 교도소 단장이라니, 그걸 외부인인 내가 어떻게 알아.
‘사형수 처리.’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즉각 처형된 반역자들과 달리 교도소 구석에 처박힌 사형수들. 그 사형수들을 일거에 처리하겠다는 건 보통 의미가 아니다.
보통 재위기간이 피로 얼룩졌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사형은 최대한 미루거나 분산하는 편인데, 폐하께서는 그 꺼림직한 소리를 감수하며 사형을 진행하시려고 한다. 이유는 뻔하다.
‘이것도 양위 준비겠지.’
곧 양위 받을 전하의 앞길을 위해서. 전하께 즉위 초부터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제발 아니길, 적어도 내가 현직에 있을 때만은 아니길 바라던 양위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재수도 없지. 이 나이 먹고 사흘 동안 대가리 박기는 싫었거늘.
– 똑똑
그 와중에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형무성 다음에는 군부, 그것도 그 녀석이 직접─
“각하, 접니다.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들어와라.”
안도와 짜증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새끼가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있어.
그래도 형무성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직후, 연달아 그 녀석을 상대할 필요는 없어 다행이다. 그 녀석보다는 저 놈이 낫지.
“꽤 시달리셨나 봅니다. 그새 10년은 늙으신 것 같은데.”
아니, 둘 다 거기서 거기인가.
들어오자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