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79)
‘기간을 늘려야 하나.’
순간 황태자의 권한으로 추가 예산 편성 기간을 늘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편성 기간이 늘어날수록 내 휴식기도 늘어나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혼란만 커질 테니 조용히 마음 속에만 간직했다. 그래, 그냥 현재에 만족하자. 괜히 욕심을 부렸다가 손에 쥔 것마저 놓치는 것만큼 머저리 같은 짓은 없다.
‘이미 놓친 것 같지만.’
이윽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직시했다.
모든 부서들이 재무성을 노리는 상황 속에서 홀로 나에게 날아온 청원서. 그 청원서를 보자마자 현재의 휴식마저 날아갈 위기라는 걸 직감했다. 손에 쥔 것을 놓치는 게 머저리 같다고? 그럼 난 이미 머저리다. 심지어 내 죄가 아닌 외부 변수 때문에 머저리가 되어버렸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청원서를 확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탑주가 보낸 청원서를 어찌 가볍게 대하겠나.
그래, 마탑주가 보낸 청원서. 즉 마종공이 직접 작성해서 올린 청원서.
‘대체 무슨 내용이지.’
탑주로 지내며 단 한 번도 청원서를 올린 적이 없던 마종공이다. 애초에 마종공의 능력이면 황실에 부탁하기 전에 스스로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두렵다. 그 마종공이 황실에 직접 부탁할 정도의 일. 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 천명을 받드신 에이만카 대제로부터 카토반의 이름을 하사받은 로베르토의 후예, 세르베트 공작령의 지배를 허락받은 베아트릭스가 대제의 후예이신 작은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확인하고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적당히 형식은 맞췄으니 내용이나 확인하면 된다.
[ ─파견 업무를 마친 인원을 즉시 기존 업무에 투입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이로울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업무자의 사기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파견 기간을 고려하여 그에 합당한 휴가를 파견자에게 주는 것은 어떠한지 전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본론을 확인하자마자 머리가 굳고 말았다.
생각 그 이하로 별거 아닌 청원이다. 이거 마종공이 올린 청원 맞나? 혹시 내가 다른 청원서를 본 건가?
‘맞군.’
다시 확인해 봐도 마종공의 청원서가 맞다. 이게 왜 맞지?
아니, 사실 청원 내용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제국 각지로 파견을 떠나는 것이 일상이다. 즉 제국에서 가장 많은 파견원을 관리하는 것이 마종공이기에 내가 모르는 문제점을 알 수도 있고, 그 해결법으로 휴가를 제시하는 걸 수도 있다.
‘그걸 왜 나한테.’
문제는 그걸 굳이 청원으로 올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휴가를 주는 건 마종공의 재량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황실이 청원을 접수하면 그 청원은 단순히 하나의 부서나 기관이 아닌, 제국 관료 전체에게 통용되는 정책이 되어야─
‘제국 전체?’
굳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청원의 목적이 제국 전체에 통용되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이 기묘한 청원도 이해할 수 있다.
마종공이 가장 애타게 주시할 파견원, 휴가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났을 파견원. 그게 누구인지는 너무 명확하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감찰부장, 미래의 부인에게 벌써부터 하소연을 하는 건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감찰부장이 그 정도로 자존심을 내려놓을 리 없다.
‘…아닌가?’
내려놓으려나?
확신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쌓은 감찰부장이 너무 밉고 두렵다.
날이 지날수록 장관실을 덮치는 약탈자들이 늘어났다. 평소라면 최소한의 품위와 정중함을 갖췄을 공무원들이 지금만큼은 야만과 폭행의 시대로 역행한 것 같았다. 서류가 아니라 칼을 들었으면 막 상륙한 바이킹으로 보일 정도로.
조금 무서웠다. 저게 예산에 눈이 먼 가련한 공무원들의 말로인가. 저 정도면 암흑 진화가 아니라 암흑 혁명 수준인데.
“얼마나 남았냐?”
국토성에서 온 약탈, 아니 공무원이 나가자마자 장관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이 미친 웨이브를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하냐는 절망 섞인 질문.
“외무성, 내무성, 특무성, 교육성 남았습니다.”
“큰 것들만 남았군.”
아찔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장관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장관의 말처럼 난이도 높은 부서들만 남았으니까.
유일 제국으로서 대륙 외교계를 장악해야 하는 외무성, 제국의 내정을 담당하는 내무성, 존재 자체가 반칙인 특무성, 미래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성. 하나하나가 돈 빨아먹는 기계고, 돈을 뜯어내는 것에 이골이 난 스페셜-리스트다. 재무성 장관이 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장관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벅찬 존재들.
“망할, 돈을 맡겨둔 것도 아니고.”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는 장관을 보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행복감이 차올랐다. 직속 상관의 고통은 부하의 즐거움.
“맡겨둔 게 아니니 더 이러는 거죠.”
그렇기에 장관의 푸념에도 자연스러운 태클을 걸었다.
사실 맡겨둔 돈이면 이렇게 난리를 쳤겠나.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와서 쓱 가져가고 끝났겠지. 원래 남의 돈 가져가는 과정이 시끄러운 법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거나 확인해.”
“옙.”
그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에 장관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일감으로 입을 막으려 했다.
권력으로 탄압하는 것 같은 모습이지만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행복감이 두 배로 변했다. 이렇게 말을 돌리는 것 자체가 장관이 극한 상황에 몰렸다는 것이기에.
“그러고 보니 마도성이 온 건 처음 아닙니까?”
아무튼 장관이 건넨 서류 더미를 보자마자 슬쩍 입을 열었다. 방금 받은 서류가 마도성이 제출한 것이었으니까.
신기한 일이다. 모든 부서들의 눈이 돌아가는 추가 예산 편성 기간에도 마도성은 홀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편이었다. 작년과 재작년은 물론, 현 장관이 집권하기 전에도. 아무래도 마도성에게는 마탑이라는 황금 동아줄이 있다 보니 재무성에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었지.
마법의 길을 걷는 사람이 가난하고 배고프면 안 된다, 라는 마종공의 굳건-한 철학으로 인해 마도성은 정말 배부르게 지내는 부서였다. 역시 어머니 마종공이야.
…그리고 그런 마종공을 후원자로 삼은 마도성이 올해, 처음으로 추가 예산을 신청했다.
“혹시 마탑 파산했답니까?”
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의외인 상황이다. 과장 좀 보태면 빌 게이츠를 무료 급식소에서 발견한 기분.
“마탑 연초 회의가 길어지면서 아직 돈을 못 받았다더라. 줄 사람도 회의장에 처박혀있으니 방법이 있나.”
“아.”
“아, 는 이 새끼야. 너도 아까 같이 들었잖아.”
확실히 마도성에서 사람이 왔을 때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하기는 했었다. 정작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게 문제지만.
다른 부서에서 보낸 서류 확인하느라 도저히 귀를 열 시간이 있어야지. 솔직히 마도성에서 사람이 왔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는데 설명이라고 잘 들었겠나.
“그것도 의외네요. 마탑에서 회의가 길어지기도 하고.”
“드문 일이기는 하지.”
장관도 내 말에 동감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는 압도적 권위 1등인 마종공이 버티고 있는지라 도저히 회의가 길어지지 않는다.
나이, 경력, 직책, 작위, 마법사로서의 능력 등등 모든 것이 압도적 우위인 마종공이 있는데 이의를 제기한다? 그 정도면 용기가 아니라 만용 아니겠나. 그렇기에 그냥 마종공이 원하는 대로, 아니면 관습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니 길어질 이유가 없다.
게다가 최근에 마종공을 봤을 때도 딱히 바쁘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도 않았는데.
‘…별일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히 결론을 내렸다. 그래, 안색이 어둡지도 않았고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부정적인 사건이 터진 건 아닐 터.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냥 탐구열 넘치는 마법사들이 모여서 새로운 마도구 제작 논의에 불이 붙었다고. 정말 무슨 일이 터졌다면 지금쯤 마탑 한가운데에 온갖 마법이 난무했을 테니.
***
마탑의 부탑주. 영구 마탑주나 다름없는 마종공 각하를 제외하면 제국 마법사들의 정점이자 존경의 대상, 제국이 아닌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알아주는 마법계의 원로.
심지어 마도성 장관이나 황실 마법사단장도 부탑주 입장에서는 거쳐 가는 직책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무슨 말로 치장하든 부족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보기에만 좋은 허울.’
그러나 그 부탑주로 지내고 있는 입장에서는 딱히 원로 같지도 않고 만인지상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구 탑주 아래에서 몇 번이나 바뀌는 2인자라는 것이니.
1인자를 대신하여 잡무를 담당하는 2인자, 감히 대항할 수 없는 탑주에 비하면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은 부탑주. 그 기괴한 인식으로 인해 부탑주 자리는 고통과 수난의 자리였다. 말이 2인자지 중간 관리자의 단점을 극한으로 부각한 것이 부탑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당장 마탑 외부인들은 공작이자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탑주님께 말을 걸지 못하여 나에게 온갖 부탁과 거래를 시도한다. 부탑주 업무로도 바쁜데 귀찮기 짝이 없지.
그렇다고 마탑 내부가 평온한가? 그건 또 아니다. 마탑을 구성하는 백, 적, 청, 녹, 황, 흑탑을 조율하고 관리해야 한다. 오히려 외부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마법사란 자신만의 정신 세계를 구축한 존재. 그런 마법사들이 자존심이 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나이 좀 먹은 마법사들은 세상을 깨닫고, 탑주님이라는 벽을 가까이서 본 덕에 정신을 차리지만 젊은 것들은 아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마탑의 대부분은 그 젊은 것들이다.
본인 잘난 맛에 사는 젊은 것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입장. 부탑주로 지낸 10여 년 동안 다 때려치우고 잠적할까, 하는 욕망이 몇 번이나 치솟았는지 모르겠다.
‘잠적할까.’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 욕망은 지금도 치솟는 중이다.
연초에 열리는 마탑 회의. 마탑의 1년 계획을 수립하고 새로운 마도구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등 마탑의 주요 마법사들이 모여 모든 활동을 논의하는 자리.
“그동안 아카데미 강사는 녹탑이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녹탑이 맡아야지요!”
“그건 담당이 아니라 독점이라고 해야지. 슬슬 양보할 때도 되지 않았소?”
그렇기에 이 회의에서는 필연적으로 아카데미에 파견되어 마법을 가르칠 강사도 선정하게 된다.
“허, 마법을 학생들에게 알리는 중책에 양보가 웬 말입니까. 이건 배려가 아닌 능력 위주로 맡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녹탑이 맡으면 안 되는 거요!”
“뭐요? 지금 그 발언, 적탑의 공식 입장이라 생각해도 되는 거요?”
그리고 단언컨대, 아카데미 강사 문제를 가지고 이토록 치열하게 대립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부탑주인 시기는 물론, 그 전대와 전전대에도 말이다.
‘망할 것들.’
머리가 지끈거린다. 평소에는 아카데미 강사를 귀찮고 억지로 떠맡은 일감으로 취급하던 것들이 상황이 변하니 아주 광전사로 돌변했다.
그래도 마법사로서 이 광기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아카데미 강사로 가게 되면 탑주님의 유일한 제자를 가르치게 되는 것 아닌가. 사실상 가르치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제자를 통해 탑주님의 마법을 조금이라도 배우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마법사가 아닌 부탑주의 마음으로는 이 추태를 용납할 수 없다. 빠르게 회의를 끝내고 기존 업무에 복귀해야 하는 판국에 이 무슨.
“그만.”
결국 참다못해 논쟁에 개입했다. 이 난리를 방치하면 결투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수습해야지.
“이번 아카데미 파견 강사는 소속을 막론하고 선정하겠다. 개인 자격으로 후보 신청을 하고, 후보 중에서 투표로 결정한다.”
반대하면 썬더볼트로 설득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바라보니, 시끄러웠던 젊은 것들이 겨우 잠잠해졌다.
그래, 이게 최선이다. 녹탑에 여전히 맡겨도 문제, 녹탑이 아닌 다른 탑에 맡겨도 문제. 심지어 특정 탑을 선정해도 다시 그 내부에서 누가 가느냐로 다투겠지. 그럴 바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투표가 낫다. 적어도 공정했다는 인식은 주니까.
“후보는 회의 참석자에 국한한다.”
“부탑주님, 그건 회의에 참여하지 못한 마법사들의 기회를 제한하는─”
조용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회의에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