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80)
다시 내렸다.
“빠르게 진행하지. 강사가 되고 싶으면 손을 들어라. 투표 자체는 철저히 비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작은 한숨과 함께 후보 선발을 시작하자 회의 참석자들이 눈치를 보며 손을 들기 시작했다. 대충 훑어보니 참석자의 3분의 1 수준. 많기도 하지, 평소에도 이런 열의를 보였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후보를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확인하는 사이─
“포기하겠습니다.”
이변이 생겼다.
갑자기 포기 선언을 한 후보 하나. 그냥 다른 업무가 뒤늦게 떠올랐구나, 싶어서 넘어갔지만.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예, 저도.”
“아무래도 제가 맡기에는 과분한 임무로군요.”
단순히 몇 명 정도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후보 전체가 포기했다. 아니 이것들이 장난하나. 아까까지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놓고는.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포기 선언을 한 전 후보들, 게다가 후보 신청도 하지 않았던 회의 참석자들의 시선이 내 뒤로 향했다.
“…….”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모든 후보들을 자진 사퇴시키고 유일 후보 등록에 성공한 인물, 올해 아카데미 파견 강사로서 학생들을 이끌어가야 할 스승.
“…후보가 한 명이기에 올해 아카데미 파견 강사는 탑주, 님께서 맡는 걸로 정하겠습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탑주님을 보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 탑주님께서 제자 사랑이 지극하시군요.”
“이거 학생들이 부럽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군요.”
이 상상도 못한 전개에 어색한 침묵이 돌자, 애써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옳다. 아카데미에는 탑주님의 유일한 제자가 있다. 그 제자를 귀엽게 여겨 직접 행차하시는 걸 수도 있지. 실로 지당한 추론이다.
……
‘감찰부장.’
아니,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은 못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찰부장 때문이다.
몇 날 며칠 동안이나 장관과 오붓하게 머리를 맞대야 했던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
끔찍했다. 트집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눈이 따가울 정도로 빼곡히 서류를 작성한 부서들이나,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문제되는 점을 찾아 반려하는 장관이나 제정신이 아니다. 그 와중에 반려당한 부서는 3시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서류를 제출하더라. 진짜 미친 것 같아.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 탈주 선언에도 장관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저 목을 뒤로 젖힌 채 힘 없이 손짓만 할 뿐. 저 손짓이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당장 나가라는 수화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죽기 직전의 상사라는 웃음벨 광경이지만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나도 남이 보면 장관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일 것이기에.
‘마지막에 최종 보스가.’
치가 떨린다. 마지막에 가장 강한 적이 나오는 건 클리셰를 넘어서 상식이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나.
불과 1시간 전까지 장관실에서 무쌍을 찍던 주인공, 나와 장관의 고막과 멘탈을 실시간으로 갈아버린 마왕을 생각하니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재무성 장관.”
“구휼성 장관? 무슨 일입니까? 구휼성 추가 예산은 가장 먼저 승인했는데요.”
“죄송하지만 더 필요한 것 같아 직접 왔습니다.”
갑작스레 친히 강림한 구휼성 장관, 더 뜯어가겠다는 패기 넘치는 선언. 이 화려한 연타에 장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추가 예산을 두 번이나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추가 예산은 어디까지나 편성 기간에 신청하여 얻는 것이지, 횟수 제한이 있지는 않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한 번 타기도 힘든 추가 예산을 짧은 기간 내에 두 번이나 탄 용자가 없었을 뿐.
그리고 난 용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말았다.
“대토벌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한 지원은 별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 지원금을 더 늘리지 않았습니까!”
“고아와 사회 진출을 시도하는 아이들은 별개입니다. 단순히 고아원에 머무르지 않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흩어지니까요.”
고아라는 치트키의 등장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고아나 복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장관은 마땅히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지식이 있었어도 반박할 수 없었을 거다. 복지 분야 끝판왕인 구휼성 장관 앞에서 무슨 논리를 펼칠 수 있겠나. 심지어 현 구휼성 장관은 고아 출신으로 작위를 받으며 장관직까지 오른 신화적인 인물이다. 본인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정책을 펼치는 사람 앞에서 ‘그거 꼭 필요한 거임?’ 이라고 하기?
‘난 못 해.’
사람 새끼면 불가능하고, 장관도 사람 언저리에 속하는 인성이다. 그렇기에 장관은 구휼성 장관에게 일방적으로 털리며 2차 추가 예산을 승인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지. 그 뒤로 다른 부서가 찾아오지는 않아서.
…다행 맞나?
구르고 구르는 공무원이지만 늘 고통만 받으라는 법은 없다.
“부장님. 차장입니다.”
“어, 들어와.”
문 밖에서 들리는 차장의 목소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다. 장관과 함께 행정부 고인물들을 상대한 보상인지, 이번에는 풋풋한 뉴비들을 상대할 시간이니까.
‘뉴비.’
애써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뉴비, 더러움이 없는 순수한 아이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말하는 걸로도 즐겁고, 직접 볼 생각을 하니 더더욱 즐겁다.
오늘은 새롭게 공무원이 된 인원들이 필수 교육을 받고 각 부서에 첫 출근을 하는 날. 부장으로서 감찰부 막내가 된 아이들을 반겨주고 응원할 필요가 있지 않나. 솔직히 내 생일보다 더 생일 같이 느껴진다.
그러한 심정을 눈치챘는지,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문이 열리고 10여 명의 인파가 우르르 들어왔다.
‘많다.’
흡족스럽다. 재무성은 행정부 내에서도 엘리트 부서로 통하기에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그런 재무성의 일개 부서인 감찰부에만 10여 명이 들어오다니, 올해는 역대급 수확이다.
‘제대로 왔구나.’
그리고 그 10여 명 중 굉장히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서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내가 작년부터 눈독 들이던 학생회 간부들도 감찰부에 왔으니까.
물론 무인 성향인 선도부장은 군부로 빠졌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딱 선도부장만 보이지 않았으니 사실상 전원이 온 거다. 믿고 와줘서 정말 고맙다, 내가 평생 직장 보장할게. 아니, 원한다면 자식에게 세습도 가능하다.
“올해는 많군. 과장들도 기뻐하겠어.”
아무튼 새로운 막내들을 환영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한 것처럼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게다가 감찰부에는 나보다 어린 녀석이 드물었는데, 이번에 대거 유입된 상황 아닌가. 이걸로 감찰부 평균 나이도 낮아졌으리라 믿는다.
“각 과에 고르게 배정되었습니다.”
“차장실에도?”
“예.”
만족스럽다는 듯 시원하게 대답하는 차장을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그래, 차장은 기뻐할 자격이 있다. 감찰부 서류의 9할은 차장실에서 처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장실의 업무 강도는 상상 이상이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신입이 여럿 유입됐으니 공중제비를 돌며 기뻐할 일이지.
“감찰부에 온 걸 환영한다. 볼 기회는 적겠지만, 언젠가는 자주 볼 수 있기를 기원하지.”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뻐하는 차장을 뒤로 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입에게 손을 내미니, 빠르게 두 손으로 잡으며 허리까지 숙였다. 우렁찬 인사는 덤이었다.
역시 뉴비는 이게 좋다. 부장을 업신여기지 않고 존경이 가득한 모습을 보이지 않나. 이게 참된 상사와 부하의 모습이지. 과장 새끼들이 얘네들의 반이라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
드디어 이곳에 왔다.
꿈에만 그리던 이상향에 도착했다.
‘여기가 감찰부.’
신입 관료들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 기간을 마치고 재무성 청사에 발을 들일 때, 그리고 그중에서도 감찰부 구역에 진입했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인맥도 뭣도 없는 일개 자작가의 평범한 자제가 실세 중의 실세 부서인 감찰부에 왔다. 행정부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인 입장인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까. 옆에 있는 시리도 이 상황이 얼떨떨한지 멍한 기색이 역력하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물론 감찰부장님께 추천장을 받은 후부터 이러한 미래를 예상했지만, 예상과 실제로 겪는 건 다른 법이다.
‘일생의 은인.’
그렇기에 감찰부장님은 나에게 단순한 상사가 아니다. 평범하고 평범한, 제국의 수많은 귀족 중 하나로 끝났을 내 운명에 큰 기회를 주신 분이다.
다른 것도 아닌 ‘감찰부장의 추천장으로 20살부터 감찰부가 된 귀족’ 이라는 입지를 가졌으면서 평범한 인생을 보낸다? 그건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할 내 능력 부족이다. 굴러온 기회도 살리지 못하는 무능.
“감찰부 밖에서 보는 부장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부장님은 관대한 분이시다. 이유 없는 질책은 하지 않고, 너희가 노력하면 그만한 보상을 주실 분이지.”
감찰부장님을 향한 감사와 앞으로의 다짐을 하는 사이, 신입들을 인솔하는 차장님께서 나지막히 입을 여셨다.
안다. 잘 알고 있다. 감찰부장님에게 붙은 흉흉한 악명과 달리, 그 분은 자비롭고 공명정대하며 유능한 분이시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좋을 대로 붙이는 악명과는 너무나 다른 분이다.
“그러니 긴장하지 말아라. 오늘이 지나면 뵐 일도 없을 테니 고개만 숙이지 말고.”
그 말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긴장하지 말자. 감찰부장님을 처음 뵈는 것도 아니잖아.
생각해 보니 아카데미 감찰관이 아닌 감찰부 부장으로 계시는 감찰부장님은 처음 뵙는 게 맞다.
“올해는 많군. 과장들도 기뻐하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오시는 감찰부장님을 보니 다리가 떨렸다. 머리는 익숙한 분이라고 말하지만, 몸은 머리의 통제에서 벗어나 긴장에 빠지고 말았다.
이상하다. 장소 하나 달라진 것 때문에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고?
“감찰부에 온 걸 환영한다. 볼 기회는 적겠지만, 언젠가는 자주 볼 수 있기를 기원하지.”
그래도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감찰부장님을 보니 긴장이 조금씩 사라졌다.
아무리 장소가 달라졌어도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아는 그 자비로운 분이 다른 사람으로 변할 리는 없지 않나.
‘언젠가는 자주.’
그리고 단순한 한마디가 내 심금을 울렸다. 감찰부장님과 자주 볼 수 있는 직급이라면 간부뿐. 즉 저 분은 우리에게 간부를 목표로 힘을 내라 응원을 해주신 거다.
그렇다면 그 응원에 보답해야 한다. 반드시, 반드시 간부가 되어 저 분의 뒤를 따를 것이다. 감찰부장님께 추천장을 받은 사람으로서, 감찰부장님의 안목이 별로라는 뒷말이 나오지 않게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