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82)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아카데미로 갈 명분이 없잖아.”
일단 광분 상태인 1과장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러다가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나한테도 들어온 사람한테도 민망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미 드러누워 땡깡을 부리기 시작한 1과장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위로고 뭐고 원하는 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는 듯, 물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언니도 아카데미에 가면 반반에서 4대 2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외치는 1과장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까지 느껴졌다. 아카데미 상주 인원과 비상주 인원의 균형이 깨지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건지, 보는 사람이 절로 측은해지는 외침이었다.
동시에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공평하게 반반으로 갈리면 아쉬워도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지만, 자신이 속한 그룹이 소수파가 되어버리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해.
“이미, 이미 제도에 있어서 다섯 번째까지 밀렸는데, 이러다 부장님 머리에서 잊혀지면 어떡해요!”
그리고 그런 말까지 들으니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루이제와 이리나는 물론, 마르게타보다 먼저 만난 것이 1과장이었다. 그런데 제도에 있다는 죄로, 아카데미에서 같이 지내지 못한다는 죄로 고백 순서가 밀리고 밀려 다섯 번째까지 오지 않았나.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1과장의 마음 속에는 일말의 한과 불안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그런 상황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만 덩그러니 제도에 남는다. 혹시 고백 순서로만 밀리는 게 아니라 애정으로도 밀리는 게 아닐까 두렵겠지.
“싫어! 잊혀지는 건 싫어! 엔딩쯤에 그런 애도 있었지, 로 남는 건 싫어어어!”
아니 씹, 비유가 왜 그래. 미래라도 보고 왔냐.
그래도 그만큼 1과장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하니 적당히 하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무리 불안하다고 해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토로할 수도 없고, 그나마 동지인 4과장은 이런 거에 민감한 성격도 아니니 홀로 속이 타들어가지 않았겠나. 어쩌면 내 앞에서 이러는 것도 해결책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답답하고 원통해서 한풀이를 하는 걸 수도 있다.
심지어 1과장은 내 앞에서 바닥을 보인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펑펑 울면서 진심으로 버둥거리고 있는 상황. 이미 바닥을 찍었으니 우는 것 정도는 부끄럽지 않다 이건가. 용감하긴 한데 방향이 이상해.
“아카데미에서도 매일 연락할 테니─.”
“통신구로는 손도 못 잡고 포옹도 못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주말마다 마종공한테 텔레포트라도 부탁해서─”
“그러면 언니하고 3인 데이트나 하겠죠!”
그것도 그렇긴 하지.
‘어쩌지.’
미치겠다. 진짜 답이 없는 상황이네.
그렇다고 1과장을 아카데미로 데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명분이 없고, 만약 1과장까지 아카데미에 상주하면 4과장만 덩그러니 남는다. 그건 4과장한테 너무한 짓이다.
아니면 마종공에게 아카데미 파견을 포기해달라고 말해? 그러면 1과장 대신 마종공이 우는 모습을 보지 않을까? 게다가 1과장 얘기를 들어보니 파견 명목은 어디까지나 유일한 제자인 루이제를 챙기기 위해서라, 내가 나서서 막을 명분이 없다. 애초에 이미 황제의 최종 승인도 받았다고 하는데 일개 부장이 나서기도 좀.
“내가 개학 전까지는 최대한 같이 다닐 테니까…”
“좋아요.”
?
“진짜 너무 아쉽지만, 방학 동안에만 같이 있어주면 참을게요.”
자신의 옷으로 바닥의 먼지를 전부 닦겠다는 듯 버둥거리던 1과장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럽게 울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자연스레 다가와 무릎에 앉은 1과장.
“귀여운 애인하고 떨어지는 거니까, 지금만큼은 예뻐해 줘야 돼요!”
“…그래.’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얘 이걸 노리고 연기한 거였구나.
아니, 서러움 가득한 땡깡은 연기보다는 진심에 가까워보였다. 단지 상황 자체를 뒤엎는 것은 불가능하니, 자기가 원하는 거라도 챙기기 위해 내 죄책감을 자극한 것.
‘빨리 졸업을 해야 할 텐데.’
터질 것 같은 한숨을 참으며 1과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과장의 계략이 발군의 효과를 낸 건 내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 나도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연인들 전부와 떨어져 지내는 거면 모를까, 누구와는 같이 지내고 누구와는 떨어져 지내면 차별처럼 보이지 않나. 1과장과 4과장이 민간인이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하필 공무원이라 방법이 없다.
그러니 어쩌겠나. 제도에 남은 사람들의 원망과 푸념을 들으며 2년을 버티는 수밖에.
‘4과장도 만나야지.’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4과장도 만나자. 언제나 제도에 있는 1과장과 달리, 4과장은 언제 파견을 떠날지 모르니까.
1과장에게 진심 쓰다듬기를 해주며 겨우 합격을 받은 이후, 폭탄을 투하한 마종공에게 찾아갔다. 피아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폭격은 너무하잖아.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아가, 그게─”
“내가 베아트릭스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해? 너무 서운한걸.”
그래서 탑주실에 돌입하자마자 감정 공격을 시도하니, 마종공은 어쩔 줄 몰라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아마 내가 따질 경우를 대비해서 반박할 말은 준비했겠지. 그동안 방치한 루이제를 위해서, 제국 마법계의 발전을 위해서, 마탑의 인원이 부족해서 등등. 아무튼 둘러댈 수 있는 말은 많았을 거다.
하지만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대비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도 자기가 나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올 줄은 더더욱 몰랐을 터.
“내가 아가의 소식을 정보부장을 통해 듣는 게 가장 마음이 아팠단다. 이해하겠니?”
작년, 마종공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시절. 단순히 서운함의 표시였던 마종공의 말은 내 입장에서 무엇보다 무거운 경고로 들렸다. 그렇기에 머리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았는데, 그걸 이렇게 활용할 줄은 몰랐다.
“내가 있는 곳에 오는 거면 언질 정도는 주지 그랬어. 혹시 반대할 줄 알았던 거야?”
정답이다. 만약 마종공이 나에게 상의를 했다면 어떻게든 반대했을 거다.
그러나 이미 반대는 물 건너 갔고, 마종공이 아카데미에 오는 것도 무를 수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서운함을 풍겨서 마종공의 돌발 행동을 막아야 한다. 지나간 일은 과거니 그렇다 쳐도, 앞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터지는 경우는 없어야 하지 않겠나.
어째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개새끼처럼 보이지만, 상대가 마종공이면 어쩔 수 없다. 사자가 기지개만 펴도 근처에 있는 토끼들은 기겁하거늘,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군림한 마종공의 행보는 근처 피라미들에게 혼돈과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예비 남편으로서 그런 건 막는 것이 도리지.
“미안하구나. 아가와 먼저 상의했어야 했는데.”
다행히 내 진심이 먹혔는지, 마종공은 조금 시무룩한 기색으로 순순히 사과를 했다.
정말 반대할 줄 알아서 할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거라서 사과를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 마무리 되는 거면 무난한 마무리다. 사과와 재발 방지면 충분하지 않겠나.
“앞으로는 서로 숨기는 거 없이 말하자. 나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상의할 테니까.”
그렇기에 나도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마종공이 움찔거리는 걸 보고 말았다. 아주 찰나지만 확실히 동요했다.
아니, 뭔데. 또 나 모르게 무슨 일 저질렀어?
“…베아트릭스?”
“수, 숨긴 건 맞지만 아가도 기뻐할 일이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정말 기뻐할 일이었다.
내 생일 선물로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에리히에게 휴가라는 조언을 들은 것,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아서 황실에 정식으로 청원을 올렸다는 것, 감찰부를 지목하면 속이 보이니 제국 관료 전체를 범위로 삼았다는 것, 깜짝 선물이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
‘…진짜 공짜였다고?’
놀랍다. 말로는 공짜 휴가라고 했지만 당연히 독이 든 성배라고 생각했는데, 독이 아닌 포도주가 든 성배였다. 설마 마종공이 뒤에서 이런 노력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괜한… 짓이었니?”
“아니.”
조심스레 묻는 마종공에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짓이라니, 절대 그렇지 않다.
“고마워. 최고의 선물이야.”
감동을 참지 못하고 마종공을 끌어안았다. 마종공의 돌발 행동? 갑작스레 아카데미에 오면 곤란하다고? 헛소리다. 마종공이 있는 곳이 곧 마탑이니, 마종공은 정당한 근무지로 출근하는 것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감히 이 크나큰 은혜도 모르고 마종공께 서운이니 뭐니 그딴 망언이나 하다니. 반성하겠습니다…
“만족했다니 다행이구나.”
기습적인 포옹에 잠시 놀랐던 마종공은 이윽고 마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시 자괴감이 들었다.
***
작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피할 수 없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니.
“아인테르.”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상석에 앉아 계신 황태자 전하께서 나지막히 입을 여셨다. 기쁨, 분노, 반김, 증오 등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안도감이 들었다. 심지어 황태자 전하만 계시는 게 아니라 황태자비 전하도 계신다. 만약 나를 처분하기 위한 자리라면 비 전하까지 계시지는 않을 터.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내 인사에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왔으면 어서 앉으라는 듯이.
“신년하례식 이후로 처음 보는구나.”
“예, 전하. 그렇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레 날아오는 질문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신년하례식 이후로는 전하를 볼 일이 없었다. 전하는 업무로 바쁘고, 나는 철저히 대외 활동을 지양하고 있기에.
그래서 더욱 떨렸다. 만날 일이 없는 전하가 신년하례식이 끝나고 한 달이나 지난 시점에서 호출한 이유. 그것이 대체 무엇인─
“가족끼리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적으니 안타깝군.”
지…?
‘가족?’
예상 외의 발언에 몸이 굳고 말았다.
가족. 평범한 단어지만 내 인생과는 연관이 없는 단어. 아니, 정확히는 긍정적인 작용보다 부정적으로 작용한 적이 더 많았던 족쇄이자 낙인과 같은 이름.
나에게 가족은 무정하고 기계적인 부황, 황실과 제국보다는 애실론 가문을 더 중히 여겼던 어머니, 적장자라는 이유로 능력과 성정에 비해 과분한 걸 누리던 동복형밖에 없었다. 가족의 정을 느끼려고 해도 느낄 수 없었고, 애초에 후계 구도와 거리가 먼 나는 가족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나 동복형─ 2황자 중심으로 흘러가던 후계 구도가 급변하며 일이 터졌다. 전승공을 등에 업은 1황자, 심지어 전승공은 북방의 소란을 잠재우며 전쟁 영웅으로 등극한 상황. 당연히 적장자라는 걸 제외하면 내세울 점이 없던 2황자는 몰락했고, 2황자파의 핍박을 받던 1황자는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
“너는 도대체 누구 자식이냐! 너도 셀레덴, 그 년의 자식이었던 게냐?”
숙청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어머니와 동복형이 나한테까지 손을 뻗던 모습은 당혹감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이미 승부가 끝난 상황에서 일개 3황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가족의 정을 받고 자랐다면 죽음을 각오하며 도왔겠지만, 나에게 그들은 이름뿐인 가족이었다.
그러자 분노와 증오를 내뱉으며 나를 황비 태생이냐고 몰아붙였지. 차라리 그랬다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전하께서 마지막까지 2황자와 함께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신 것. 현명하신 선택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름뿐인 가족을 외면하고 숨을 죽이자 그만한 대가가 돌아왔다. 황태자가 된 이복형의 수족으로서 숙청을 주도하던 감찰부장은 어머니와 형을 처리한 후 나에게 다가왔다. 조용히 하고 있었으니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서글펐다. 가족 같지도 않은 가족 때문에 목이 잘릴 위험에 처했다. 이복형이 언제 돌변하여 내 목을 노릴지 모르는 세월을 보냈다.
그렇기에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보다 무거운 족쇄고,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다.
“형제라고는 우리밖에 남지 않았지. 둘뿐인 관계인데 너무 서먹했어.”
갑자기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이상하다. 올해 신년하례식에 참석하며 명실상부한 황족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존재가 더 이상 황태자의 입지를 위협할 수 없기에, 황실의 번창을 위해 최소한의 인정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