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83)
그러나 직접 불러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경우가 다르다. 동생이 아닌 황자로 취급해도 충분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나에게 형제와 동생이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마치 진심으로 가족이라 여기는 것처럼, 그동안의 어색했던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는 것처럼.
“전하께서는 훗날 태양이 되실 분 아니십니까. 제국을 위해 언제나 헌신하시는 것을 아는데, 어찌 제가 형제의 정을 운운하며 전하의 발목을 잡겠습니까.”
새하얘진 머리에 비해 곧바로 겸양의 말이 나온 건 그동안 눈치를 보며 살아온 본능일 것이다. 이 역시 함정이 아닐까, 만약 여기서 전하를 황태자가 아닌 형으로 여기면 숙청의 빌미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본능.
“그리 말하지 말거라. 에이만카 대제께서도 동생들의 도움으로 제국을 세우셨거늘, 그분만 못한 내가 어찌 홀로 설 수 있겠느냐.”
그러자 황태자 전하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낯설다. 이 사람이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전하, 도련님. 마시면서 말씀하세요.”
“고맙소, 비.”
“가, 감사합니다, 전하.”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하자 후속타가 이어졌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친히 차를 가져오시고, 3황자가 아닌 도련님이라 말씀하셨다. 황태자 전하께서 동생이라 언급한 것처럼 비 전하마저 나를 가족으로 취급하겠다는 발언.
상상도 못한 사건의 연속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비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다도에 조예가 깊었지. 입에 맞을 거다.”
“예, 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런 나를 향해 차를 먼저 마신 황태자 전하께서 나지막히 입을 여셨다.
‘먼저…’
같이 마시는 음식을 먼저 먹다니. 독살의 위협이 없다는 걸 직접 증명한 건가?
“아카데미 생활은 어떻더냐.”
“폐하의 은덕이 온 제국에 뻗어있으니, 불편함 없이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툭 튀어나온 질문에 본능적으로 나온 대답. 그 와중에 대화 주제로 아카데미가 언급되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아카데미라니.
‘추궁인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아카데미를 이유로 추궁을 한다면 짚이는 것이 많았다. 당장 외국 주요 인사와의 우정, 제국 변경백 가문 자제와 접촉, 당시에는 몰랐다지만 마종공 유일 제자와 같은 동아리 등. 하나하나가 의심을 받기에 충분─
“올해는 마종공이 아카데미 파견 강사로 간다고 하더구나.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겠어.”
“…예?”
머리가 멈췄다. 감히 황태자 전하에게 반문을 하는 무례마저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 치명적인 무례와 실수를 이해하셨는지, 황태자 전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다.
“마종공도 제자를 아끼는 모양이지. 아마 루이제 영애가 졸업한다면 다시 없을 기적일 거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황태자 정도 되면 이런 상식을 초월한 일에도 덤덤히 반응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아카데미에 공작이 머무는 경우는 처음이지 않더냐. 타국의 귀빈들도 계신데, 혹 마종공이 머무르며 불편함이 있을까 우려스럽다.”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졌다. 갑작스러운 아카데미 언급, 아카데미에 방문하는 마종공, 삼국 전력이 아카데미에 거주 중인 상황에서 이변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
형제와 동생 운운한 것을 제외하고 앞선 것들만 조합해서 생각하면 빠르게 결론이 나왔다. 이번 신년하례식을 통해 황족의 권리를 돌려줬으니, 이제는 황족의 의무를 다하여 아카데미의 이상 사태를 방지하라는 뜻.
‘이게 낫지.’
긴장감이 급속도로 풀렸다. 영문 모를 호출과 대화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적어도 황태자로서 황실의 일원에게 지시를 내린 것 아닌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만남이고, 당연한 대화다. 처음 형제니 뭐니 한 것은 처음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황자를 다독이기 위한 의례적 발언이었을 터.
“심려치마소서, 전하. 저 역시 부족하나마 리브노만이니 마종공과 귀빈들이 불편함 없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네가 아카데미에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구나.”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전하.
역시 업무적 대화가 맞았다.
***
아인테르가 돌아간 후, 자리에 앉아 남은 차를 마셨다.
“전하.”
그리고 비의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쓴웃음을 짓는 비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괜찮으신가요?”
“괜찮소. 나보다 아인테르가 걱정이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고민 끝에 이 자리를 마련했건만, 결국 아무런 진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럴 거면 대면이 아니라 서신으로 얘기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목숨을 노리던 놈이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 것이니 속이 뒤집혔을 거요.”
다시 한숨이 나왔다. 계승 분쟁에서 승리하고 도르고스를 처리한 직후, 정말 눈이 뒤집혀서 아인테르도 처리하려고 했다.
혹시 2황자파가 아인테르를 구심점으로 다시 집결하지 않을까, 유일한 적자가 내 발목을 잡지 않을까 걱정됐다. 물론 과잉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무르게 행동하면 그 피해는 비와 장인 어른에게도 퍼진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말의 가능성도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인테르는 아무리 찾아도 숙청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황족의 권리를 앗아가는 걸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끝난 것이 다행이지만.
“뒤늦게 이러는 것도 위선이지.”
“전하.”
걱정 가득한 비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위선이다. 가족의 정이 없는 부황을 원망했으면서 정작 동생을 죽이려고 한 것과 뒤늦게 형 행세를 하는 것. 전부 위선이고 가식이지 않나.
심지어 이 위선도 내 입지가 굳건해지고 양위가 코앞으로 임박해서야 시도했다. 아인테르가 죄가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내 안전이 확보되고 나서야,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적선하는 것처럼 위선을 행한 거다.
‘그러니 업무 얘기가 편할 수밖에.’
아인테르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굳어있었지만, 업무 얘기를 꺼내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듯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씁쓸하다. 형제로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상상할 수 없고, 오직 공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안심하는 아이. 그러나 누구를 탓하겠나.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비.”
“예, 전하.”
“늦었다고 생각하오?”
비에게 건넨 말이지만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동생을 죽이려고 했던 형, 형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동생. 이 형제가 평범한 형제가 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빠르지는 못했지만, 아직 늦지도 않았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는 비의 말에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과연 늦지 않았을까.
“도련님께서도 전하의 마음을 아셨을 겁니다. 그동안은 어떤 업무에도 접근하지 못했지만, 이제 정당한 황족으로서 제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신년하례식 참가에 이어 업무 할당. 이건 명백한 황족으로서의 대우였으니까.
이름뿐인 황족이 아니라 의무를 행하는 황족이요, 정당한 대우를 받는 황족이 되었다. 그 녀석이 머리가 나쁜 녀석은 아니었으니 진작에 눈치챘을 터.
“당장은 무리겠지만, 언젠가는 전하가 건넨 것이 화해의 손길이라는 걸 아시겠죠.”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
이 개시발.
“저기, 각하. 실례지만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타국 입학생이 늘어났네. 역대 최다 규모더군.
외무성 장관의 말에 머리를 부여잡고 말았다.
학생이, 복사가 된다고…?
제국 아카데미에 타국인이 입학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저 제국 학생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소수이며 재작년까지 고위급 인사가 입학한 전례가 없었을 뿐, 모두에게 열린 교육기관인 제국 아카데미는 푸른 피와 붉은 피, 제국인과 타국인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타국 학생이 늘어나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제국의 뛰어난 교육 시스템과 편견 없는 아카데미를 과시할 수 있으니 기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연하고 기꺼운 일에 외무성 장관이 직접 반응했다. 명목상 아카데미 감찰관인 나에게 급히 연락을 할 정도로.
‘역대 최다?’
게다가 심상치 않은 단어까지 등장했다. 물론 기존 최대 기록보다 한 명만 많아도 역대 최다가 갱신되지만, 고작 그런 사태라면 장관이 움직였겠나.
– 아마 작년에 입학한 요주의 인물들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네.
내가 침묵 상태에 빠지자 외무성 장관이 말을 이었다. 충격은 이해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두라는 배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요주의 인물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역시 너희 때문이었냐. 최근에는 좀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엿을 먹여?
– 왕위와 거리가 먼 왕족이라도 왕족은 왕족이지. 왕족과 선후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타국 교육기관이라는 것이 대수겠나.
작년에 그것들이 입학한 순간부터 예정된 재앙이었다는 말. 너무 끔찍한 선고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왕족 입장에서 타국 교육기관에 가는 건 페널티가 덕지덕지 붙을 행동이지만, 평범한 귀족들 입장에서는 감수할 수 있는 일이다. 귀족이면서 자국이 아닌 타국 교육기관에 갔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난 우리 왕자님이 고달픈 타국 생활을 하실 때 옆에서 보필한 충신인데?’ 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아니, 솔직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놓칠 수 없는 기회에 가깝다. 이미 각국 내부에서는 인맥이 굳건히 자리 잡았을 텐데, 왕족과 타국에 있다면 기존 인맥 관계를 초월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올만하네.’
지극히 객관적인 시야에서 판단하니 올 이유로는 충분하다. 진짜 예정된 재앙이었어.
– 당연하지만 신성교국 출신 입학생도 제법 있다네. 차기 성자가 직접 타지를 전전하는데,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야 많겠지.
그 말에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곳이 아닌 세 곳에서 지랄이라는 말이지만, 외무성 장관의 말처럼 당연한 일이기에 딱히 충격적이지도 않다. 만약 신성교국이 잠잠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무서웠겠지. 왜 너네는 조용하냐고.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예정된 재앙이면 이미 알고 대비했었다는 거 아닌가? 제국 공무원들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거지, 진짜 손을 놓는 무능력자들은 아닌데?
‘직접 말할 필요가 있나?’
혼란스럽다. 이미 외무성, 어쩌면 교육성도 함께 1년이나 대비한 입학 대란. 아카데미 감찰관이 알아둬야 할 사안은 맞지만 장관급 인사가 직접 전파할 정도는 아니다.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메신저 아닌가.
“각하께서 친히 일러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갔으면 당황했겠군요.”
그래서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정말 이게 다냐고, 아직 말을 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자 감사의 탈을 쓴 질문에 외무성 장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빨리 퍼지더군.
아.
– 마종공께서는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존경하는 분이지 않나.
아…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국을 넘어 대륙 마법사들의 정점에 선 마종공, 그 마종공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마탑.
당연히 마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