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85)
교장이 마종공을 반기든 아니든, 말년이 소란스러워진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유감 정도만 표하면 충분하겠지.
…충분하겠지?
“허허, 그 나이에 혈기가 넘치는 건 당연하지요. 이미 익숙합니다.”
익숙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동아리 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화끈한 예방 주사를 맞아서 괜찮다 이건가.
그 와중에 익숙하다고만 했지, 차마 괜찮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 선이 교장의 최후의 양심이자 이성일 터.
“몇몇은 제국 생활이 낯설 거라는 게 안타깝지만, 다행히 그 아이들을 돌볼 사람도 있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교장의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타국에서 제국으로 올 신입생들을 걱정하는 말이지만, 실상은 ‘타국 학생은 빌라르 경에게 맡기자.’ 라는 은밀한 합의 제안이었다. 제국인 감찰관이 왕족들과 차기 성자를 가까이서 관리하고, 제국인 교장이 아카데미를 총괄하고 있으니 빌라르 경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속삭임. 내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타국 학생들은 빌라르 관할로 두는 게 맞다. 제국인이 관리하면 텃세 같지만, 같은 타국인이 다가오면 마음의 벽이 낮아지지 않겠나.
‘마법사들은 내 담당.’
물론 빌라르에게 타국 학생들을 떠넘긴다고 놀고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빌라르가 타국인이라는 이유로 타국 학생을 맡았다면, 나는 마종공의 예비 남편이기에 마법사를 맡는다. 짐이 두 개면 하나씩 나눠 가지는 것이 도리지…
그렇게 빌라르 없는 자리에서 각자의 업무 분담이 마무리 되었─
“그러고 보니 감찰부장. 궁내성에서 특이한 말을 했었습니다.”
“궁내성이 말입니까?”
의외인 말인지라 찻잔으로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외무성이나 교육성이 입을 열었다면 이번 사건 관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궁내성이? 궁내성은 이번 일하고 관련이 없을 텐데?
단순히 타국 입학생이 많은 건 궁내성이 움직일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아카데미 학생 문제로 궁내성이 반응할 거라면 류티스나 라테르, 타니안이 입학했을 때부터 반응했겠지. 귀족 학생 20, 30명보다 왕족 학생 하나가 더 중요하니까.
“예. 3황자 전하께서는 학생인 동시에 리브노만이시니, 귀빈들과 미래의 동량들이 혼란스러워 하더라도 염려치 말라 하더군요.”
그 말에 입꼬리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역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신년하례식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이름뿐인 황족에서 명실상부한 황족으로 복귀한 아인테르다. 황족이라는 이유로 놀고 먹는 꼴을 보지 못하는 리브노만의 전통에 따라, 당연히 아인테르도 구를 때가 된 것.
‘찾았다, 내 인력.’
감동적이다. 인력이 하나라도 생기면 엄청 잘해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평민도 감지덕지인 상황에서 황족이 합법 노동자? 아, 당연히 업고 다녀야지. 앞으로 아인테르는 땅을 밟을 일이 없을 거다. 내 등에서 내려오지 못할 테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허락한 고오-급 노동력, 정말 감사하게 쓰겠습니다.
구매자의 신분이 높을수록, 지불한 금액이 많을수록 고품질의 물건을 얻을 수 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시장 논리. 그렇기에 크라시우스 가문이 소유한 마차는 황실에 납품하는 마차 정도를 제외하면 부족함 없는 품질을 자랑한다.
튼튼한 재질, 안락한 내부,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한 좌석,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승차감. 길고 지루한 마차 생활을 그나마 양호하게 즐길 수 있는 요소들.
그러나 아무리 편하고 안락하더라도 마차라는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세라, 괜찮아?”
“괜찮다니까. 벌써 몇 번째 묻는 거야?”
그야 몇 번을 봐도 안색이 좋지 않으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안 그래도 피곤한 세라가 표정 관리까지 시작할 게 뻔하니까. 차라리 지금처럼 얼굴에 상태가 드러나야 마차를 멈추거나 도시에서 쉬는 등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럴 줄 알았지.’
빙긋 웃는 세라를 향해 애써 마주 웃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마차가 좋아봤자 마차 아니겠나. 승차감이 좋고 흔들림이 거의 없다? 결국 미세하게나마 흔들림이 느껴진다는 의미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극히 미미한 거슬림이지만, 세라는 긴 자택 생활 끝에 처음으로 장기간 마차 이동을 하는 상황. 그 미세함을 직격으로 느낄 나약한 육체다.
그래서 마차가 아닌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하려고 했다. 어머니도 세라의 몸을 걱정하셔서 가문의 마법사를 붙여주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아카데미에서 활동할 텐데, 그때마다 힘들다고 투정 부릴 수는 없잖아요.”
정작 세라가 거절했다는 게 문제지만.
앞으로 몸을 움직일 일도 많고, 평생 텔레포트로 이동할 것도 아니니 마차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세라의 주장. 애석하게도 틀린 말은 아니기에 어머니도 유모도 세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몸이 약한 아이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본인이 힘든 걸 각오하고 평범하게 행동하겠다는 걸 어찌 뜯어 말리겠나.
“세라가 피곤해 보이면 바로 연락하렴.”
“알겠습니다.”
유모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라와 작별 포옹을 나누는 사이, 어머니가 슬며시 다가와 속삭였다. 혹시 중간에라도 세라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그러면 그때라도 마법사를 보내서 텔레포트로 이동하면 되니까.
그리고 영지에서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통신구를 만지작거렸는지 모르겠다. 세라가 마차의 흔들림 때문에 몸을 휘청일 때마다, 단순히 재채기를 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철렁거리던지. 그냥 냅다 마법사를 불러버리고 편하게 갈까, 하는 욕망이 수시로 꿈틀거렸다.
물론 그런 짓을 하면 세라의 원망을 받을 테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얘가 묘하게 고집은 강하니 원.
“저기, 에리히.”
그 사이에 멀미라도 났는지 작게 하품을 한 세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지, 혹시 지금이라도 마법사를 부르자는 건가? 드디어 이 가시방석에서 벗어날 기회인 건가?
“나 걱정되면… 어깨 좀 빌려줄 수 있어?”
아니구나.
그 말에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분위기를 보니 몸 좀 기대게 기둥이 되어달라는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이왕이면 기둥이 아니라 텔레포트를 부탁하면 더 기쁜 마음으로 들어줬겠지만.
아무튼 기대기 편하게 자세를 조정하자 세라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 마차도 넓으니 졸리면 눕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러고 있으니 따뜻하다.”
“그래? 다행이네.”
따뜻하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아픈 사람 입장에서 체온 조절은 중대사항이다.
‘어깨라며.’
아쉬운 게 있다면 잠든 세라의 몸이 스르륵 내려오더니, 자연스레 어깨가 아닌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는 점.
덕분에 세라가 깨어날 때까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무릎을 희생한 대가인지 마지막까지 마법사를 부르지 않고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오는 동안 언제 마법사를 불러야 하나 가슴 졸인 걸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그래도 세라의 건강이 양호하다는 뜻 아닌가.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정문에서 기숙사로 이어지는 대로를 달리는 사이, 굉장히 눈에 띄는 마차를 발견하고 말았다. 다른 마차들에 비해서 독보적으로 화려하고 거대한 마차, 그 마차 문에 당당히 그려진 로벤스 왕가의 문장.
‘류티스?’
누가 봐도 류티스가 탄 마차다. 저런 마차를 끌고 왔는데 안에 탄 사람이 류티스가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하지.
마침 저쪽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류티스의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 하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가문의 호위 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도련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에 달린 간이 창문이 열리며 호위 기사가 얼굴을 보였다.
“류티스 왕자 저하께서 차후 일정이 없다면 동아리실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오랜만이니 대화라도 나누자고 하시는군요.”
썩 괜찮은 제안이다. 개학식 때까지 할 일도 없어서 지루하게 지낼 텐데, 차라리 아는 사람하고 만나는 게 좋지 않겠나. 마침 상대가 류티스면 체스를 두거나, 1:1 족구라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서 기숙사로 들어가 버리면 세라가 혼자 남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남자가 여자 기숙사에 들어갈 수는 없지. 귀족으로서 어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을까.
“같이 갈래?”
여전히 내 무릎을 베고 있는 세라에게 묻자, 세라는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티스 왕자님이라면 같은 동아리인 그분?”
“…응.”
이상하다. 왕자님, 그분이라는 호칭이 너무 낯설다. 사실 이게 당연한 호칭이어도, 동아리에서 하도 괴랄한 모습을 봐서 그런지 존경심이 사라졌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지만 솔직히 어쩔 수 없다. 열렬한 왕가 추종자도 제과 동아리에서 한 달만 지내면 충성심이 하락할 거다.
“유쾌한 성격이니 걱정하지는 말고. 어차피 같은 동아리가 되면 매일 볼 텐데.”
“으응, 좋아. 미리 인사드린다고 생각하지 뭐.”
그러나 덤덤한 대답과 달리 눈은 묘하게 떨렸다.
이해한다. 난데없이 일국의 왕자를 보게 생겼으니 당연히 긴장되겠지. 물론 류티스의 본모습을 아는 내 입장에서는 의미 없는 긴장으로 보일 뿐이다.
“오, 에리히! 오랜만이다!”
“그래. 잘 지냈냐?”
기숙사로 향하던 마차를 동아리실이 있는 건물로 튼 후, 먼저 마차에서 내린 류티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대충 인사를 받자 옆에서 세라가 딸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 이상으로 털털한 왕족의 인사, 왕족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귀족의 모습에 많이 놀란 모양.
‘익숙해져야지.’
긴장한 세라에게는 유감이지만, 왕족을 향한 환상과 경외를 빠르게 털어내는 것이 제과 동아리 부원의 숙명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세라가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일단 나는 두 달도 걸리지 않았지만, 인간 관계가 서툰 세라니 반년은 걸리겠지…
“옆에 계신 레이디가 세라?”
“어, 기억하네?”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분명 겨울 방학 전에 세라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저 녀석이 아직도 기억할 줄은 몰랐다.
“그야 세라 영애를 말할 때마다 눈에서 애정이 뚝뚝 흐르던데, 잊으려야 잊을 수가 있나.”
누가 들어도 과장스러운 어조에 픽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세라를 만날 예정이라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애정…”
그래도 세라가 은근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
아카데미에 도착한 이후로 숙소보다 동아리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숙소에만 있으면 할 일이 없지만, 적어도 동아리실에 있으면 놀아줄 사람이라도 있지 않나. 학생회실 단장으로 분주한 마르게타를 빼면 루이제와 이리나도 동아리실에 오고, 입이 심심하면 루이제가 과자도 만들어주고─ 썩 괜찮은 휴식을 보내고 있었다.
“음? 고문 선생도 계셨습니까?”
쟤를 보기 전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망할.’
류티스의 얼굴을 보니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는 실감이 났다. 이제 방학도 끝,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구나…
“너도 왔냐?”
“하하, 기숙사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내 생각이나 쟤 생각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점에서 수치심을 느꼈다. 왜 이럴 때만 생각이 통하는 건데.
아무튼 웃음을 터뜨린 류티스의 뒤로 에리히와 세라도 들어왔다. 오는 길에 만나기라도 했나, 얘네가 동시에 올 줄은 몰랐다.
‘진짜 왔네.’
그리고 늘 침대에만 있던 세라가 아카데미에 있는 걸 보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에리히의 손을 잡고 있는 걸 보면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장기간 마차 여행의 피로라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다. 건강한 사람도 오래 마차를 타면 멀미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세라는 오죽하겠나.
“안녕하세요, 오빠.”
내 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