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86)
“그래. 어서 와. 에리히가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고?”
“아니, 나는 갑자기 왜.”
농담을 담아 말을 걸자 졸지에 피격당한 에리히가 떨떠름히 입을 열었다.
“후후, 그런 건 없었어요. 에리히 덕에 편하게 잘 수는 있었지만요.”
그 말에 동아리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에리히에게 꽂혔다. 나는 물론 루이제, 이리나, 류티스까지 전부.
아니, 당연히 세라가 의미심장하게 말해서 음란마귀가 발동한 거라는 건 안다. 에리히가 갑자기 적극 수준을 넘어 저돌적 행보를 보일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이성보다는 본능이 한 발자국 빠른 편이니 어쩔 수 없는 시선 아니겠나.
“…무릎 베개 얘기야.”
역시 음란마귀가 맞았다. 미안하다, 솔직히 아주 조금은 의심했어.
루이제가 열심히 반죽을 주물럭거리는 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세라도 루이제에게 다가가 관람 모드에 돌입했다. 영지에서 안면을 트기도 했으니 대화도 제법 나누는 것 같고.
“동성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야.”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에리히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정말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확실히 다행이기는 하다. 아무리 에리히가 세라를 신경 쓰더라도 성별의 벽을 넘을 수는 없다. 남녀로 나뉜 기숙사, 아주 가끔 성별이 나뉘는 수업. 그런 상황 속에서 에리히가 세라를 전담 마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형.”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던 에리히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만약, 만약에. 아무도 세라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형이 챙겨줄 수 있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세라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시녀장의 딸이기도 한데 당연히 챙겨야지.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신들을 보살피는 건 의무를 넘어 상식이다.
“그─”
자연스레 ‘그래’ 라고 대답하기 직전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얘도 포섭할까?’
에리히, 내 동생, 제국인, 제과 동아리, 크라시우스 가문이라 제법 권위도 있음, 루이제에게 차인 이후로 사고는커녕 속을 썩인 적도 없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완벽한 노동력이다. 내 아래라고 부르기 애매한 아인테르와 달리 명확하게 내 아래인 것도 매력적이고.
“─러고 싶은데, 나도 일이 아예 없지는 않잖아.”
그렇기에 드리프트를 꺾었다. 어차피 해줄 수 있는 일이지만, 이왕이면 생색은 내자고.
“간간이 나 좀 도와주면 여유가 생기는데, 그러면 가능하지.”
“내가 형 일을?”
“당연히 어려운 일은 안 시키지. 비전문가한테 맡기면 일만 늘어나.”
그래, 어렵지는 않을 거다. 단지 속이 타들어가고 탈주하고 싶은 욕망이 치솟을 뿐.
그래도 이건 장담할 수 있다. 진짜 어렵고 짜증 나는 메인은 내가 책임진다. 에리히는 곁가지만 맡아줘도 충분하다.
“알았어. 나도 부탁하는 건데 그 정도야.”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내 2호기.
내가 가문 이으면 이것저것 많이 챙겨줄게.
오늘따라 교장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이런 측은함은 반 대항전 이후로 오랜만이다.
“아카데미는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타고난 피의 차이가 기회의 차이로 오지 않으며, 국적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처량함이 두뇌까지 잡아먹은 것은 아니었는지, 교장의 말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아카데미는 평민 학생이라고 홀대하지 않으며 타국인이라고 개판인 성적을 주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런데 분명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인데, 왜 듣는 사람이 절로 애절해지는 걸까. 누가 보면 ‘우리 이렇게 평화롭고 공정하니까 사고 치지 말아 주세요.’ 라는 애원으로 보이겠어.
‘애원 맞나?’
솔직히 애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듣는 사람의 동정심을 자극한 개학 기념 연설을 마친 교장의 뒤를 이어 교감이, 그 뒤는 각 학부를 담당하는 수석 교사들이 훈화를 이어갔다.
‘올해도 그대로네.’
혼돈의 아카데미 속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라인업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애초에 어지간한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닌 이상 수석 교사가 바뀔 일은 없지만.
아카데미 각 학부 수석 교사는 정해진 보직 기간 없이 능력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10년 넘게 수석 교사 자리를 차지한 넷이 굳건하고 버티고 있는 형태다.
검술부, 마법부, 사제부, 학술부. 아카데미를 이루는 네 학부의 최고 책임자는 제국을 넘어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능력자니까. 제국의 황족이나 귀족들을 가르치는 자리인데 애매한 사람을 앉히겠나. 당연히 그 분야의 거물을 모셔와 앉히니 디팬딩 챔피언처럼 수석 교사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지.
그렇기에 학부 수석 교사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로 취급되며, 고위 가문 출신 학생들도 수석 교사들에게는 존중을 보이는 편이다. 심지어 수석 교사를 처음 보는 입학생들은 존경이 담긴 눈으로 수석 교사를 쳐다볼 정도─
라고 들었다.
‘…너무 노골적인데.’
수석 교사가 앞에 나와있음에도 술렁거리는 학생들. 누가 봐도 수석 교사가 아닌 그 뒤로 향한 시선.
졸지에 무시 당한 수석 교사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지만, 정작 수석 교사도 그 시선 패싱을 이해하는지 빠르게 말을 마치려고 안달인 모습이었다. 자기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 뒤에 있는 사람을 보고 싶다는 것처럼.
‘그럴만하지.’
학생들의 시선, 앞에 나간 마법부 수석 교사의 힐끔거림은 나를 향해있었다. 정확히는 내 옆에 서있는 사람에게.
나도 그 시선을 따라 슬쩍 옆을 쳐다보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백발, 하늘을 찌를 듯한 귀가 인상적인 여인.
“─다음은 마탑 파견 강사이신 마종공 각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그 말에 마종공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그 분야의 거물인 수석 교사? 1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디팬딩 챔피언? 알게 뭐냐, 그 분야 자체나 다름없는 살아있는 전설이 나타났는데. 마법부 수석 교사도 마종공이 텔레포트로 나타나자마자 무릎까지 꿇으며 인사 올리더라. 나름 나이 지긋한 양반이 그러니 보는 내가 더 민망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무슨 말을 하든 좋아할 겁니다.”
“후후, 그래. 조언 고맙구나.”
발언대로 나아가는 마종공에게 나름의 응원과 격려를 건네자, 마종공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조금 걱정이기는 하다. 마종공은 마탑에서만 생활하는 히키코모리라 남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경험이 없다. 이거 너무 난해한 말을 해서 학생들이 혼란 상태에 빠지거나, 환영 박수가 끝나기도 전에 연설이 끝나지는 않을까.
물론 마종공의 명성을 생각하면 쌍욕을 날려도 다들 좋아하겠지만.
예상대로 마종공의 연설은 열렬한 환호 속에 끝났다. 대충 원피스가 있다는 말을 들은 해적 지망생들 같은 반응이었다.
“수업 중에는 무엇이든 물어보렴. 내가 아는 모든 걸 가르쳐줄 테니, 습득하는 건 너희의 노력에 달렸단다.”
진짜 원피스와 맞먹는 선언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그 마종공이 ‘내가 아는 거 전부.’를 선언했는데 정신이 멀쩡할 마법사는 없다. 대륙 제일의 마법사가 모든 걸 가르쳐주는데 실력이 늘지 않는다? 그건 자신의 재능이 바닥이라는 뜻이니 마법의 길을 포기하도록 하자.
그렇게 광폭화에 돌입한 마법사 학생들,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종공의 명성에 취한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개학식 겸 입학식이 끝났다.
“아가, 가자꾸나.”
그리고 스르륵 내 곁에 다가와 손을 잡는 마종공의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대로 동아리실에 가도 되지만, 마종공은 수업이 있지 않나? 설마 첫날부터 공강인 교수가 되는 건가?
“수업은 어쩌시고요.”
“내 수업은 4교시니 괜찮단다.”
하긴. 파견 강사 하나가 모든 수업을 담당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지.
만약 마종공이 어중간한 명성의 소유자라면 뽕을 뽑기 위해 굴렸겠지만, 교장보다도 상전인 마종공을 누가 굴릴 수 있겠나.
“동아리실에 가보고 싶구나. 어떤 곳인지 직접 보고 싶어.”
“알겠습니다.”
두 눈을 반짝이는 마종공을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동아리실이라고 해봤자 그냥 시설 좋고 깨끗한 공간일 뿐이지만, 마종공 입장에서는 말로만 듣던 꿈의 공간 아닌가.
구체적으로는 내가 하루 중 절반 이상을 머무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상향일 거다.
***
오랜만이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루이제에게 차인 이후로 처음이다.
조금 비참한 비유지만 진심이다.
‘마종공.’
이미 개학식도 끝나고 대강당에서도 나왔지만, 아직도 눈 앞에 마종공이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귓가에는 마종공의 목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상상도 못한 일이다. 겨울 방학 전까지만 해도, 조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 누가 감히 예상했을까.
‘마종공이 강사.’
어느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왕족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왕족의 품위도 마법사의 본능은 이기지 못했다.
작년에는 평범한 마탑 파견 강사에게 듣는 것으로도 만족했다. 유벤이 아닌 제국의 마법, 심지어 체계적이고 완벽히 정리되었다는 마탑의 마법이 아닌가. 그렇기에 마탑의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도 내 앞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러 성과가 있었고.
그런데 마종공이다. 대륙 모든 마법사들의 정점, 이 시대 마법계의 상징인 마종공이 가르침을 주기 위해 왔다.
‘다시 없을 행운이다.’
그래, 정말 다시 없을 행운이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누리지 못할 행운, 마법사 입장에서는 왕족의 피를 타고난 것보다 더한 행운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종공은 왕, 그 이상의 존재니까. 절대적인 경외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비교할 수 있지 않겠나.
“수업 중에는 무엇이든 물어보렴. 내가 아는 모든 걸 가르쳐줄 테니, 습득하는 건 너희의 노력에 달렸단다.”
마종공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조금이나마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발작했다. 수업 중에는 마종공에게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다는 은총 덕분에, 동시에 다른 학생들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물론 왕족이라는 점을 내세워 특별 대우를 받으려는 건 아니다. 일국의 왕자와 맞먹는 것이 제국의 공작이거늘, 어찌 왕족이라는 걸 내세워서 마종공에게 들러붙겠나. 마종공의 예비 반려가 제과 동아리의 고문이라는 것, 마종공의 유일한 제자가 같은 동아리인 루이제라는 것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점이다.
아무런 접점이 없는 것과 희미하게나마 연결점이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 게다가 예비 반려와 유일 제자의 지인이라는 건 희미한 연결점 수준이 아니다.
‘그것만 믿을 수는 없지.’
그러나 지인이라는 것만 믿고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다. 고문이 예비 반려? 이미 고문에게는 작년 1학기 때 큰 신세를 졌다. 루이제? 솔직히 부탁하면 들어주겠지만, 아마 나를 찼다는 죄책감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노력할 거다. 그건 오히려 내가 미안한 일.
‘나도 주는 게 있어야 하는데…’
과잉 행동을 할 것 같은 루이제를 제외하면 자동으로 고문만 남는데, 고문에게 무엇을 주면서 부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족한 게 있는 사람이어야 거래가 가능할 터.
복잡하다. 내가 가진 카드가 뭐지? 무슨 카드를 제시해야 고문에게 수업 시간 외에도 마종공을 볼 기회를 달라고 말할 수 있지?
“──하.”
적어도 고문이 원하는 걸 내가 줄 수 있어야 나도 원하는 걸─
“라테르 저하.”
‘아.’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다니, 아무리 고심에 빠졌다지만 부끄러운 일.
“아카데미에서는 선배라고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