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87)
“아, 예, 라테르 선배.”
빠르게 정신을 다잡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레이첼 소르타, 유벤 연합왕국 귀족 출신의 신입생. 처음에는 나와의 인연 때문에 아카데미 입학을 결정했지만, 뒤늦게 마종공의 파견 소식을 듣고 광분에 빠졌던 후배.
“무슨 일이지?”
얼굴을 확인하니 더욱 부끄럽다. 가까운 사람 앞에서 멍한 모습을 보인 거니까.
다행히 크게 신경은 쓰지 않는지, 레이첼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선배, 제과 동아리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랬지.”
딱히 숨길 일도 아니니 덤덤히 말하자 레이첼의 눈에 희미한 광기가 보였다.
“동아리 가입 기간은 언제죠?”
그 말에 레이첼의 속내를 파악하고 말았다. 마종공의 예비 반려가 고문이라는 건 이미 퍼질만큼 퍼진 소문. 그런 상황에서 제과 동아리 가입을 노린다는 건, 나처럼 지인의 힘을 빌리겠다는 것 아닌가.
역시 마법사들의 행동력은 무서운 수준이다. 다들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어떻게 이득을 볼─
‘…마법사들의 행동력.’
잠깐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무수히 많은 마법사 학생, 어떻게든 마종공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욕망, 누구나 아는 제과 동아리, 필연적으로 가입 신청 세례를 받을 고문.
있다. 내가 고문에게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생겼다.
‘대신 통제하면 된다.’
고문을 징검다리로 여겨 달려들 마법사 학생들을 제어하고, 동아리 가입 신청을 저지한다. 그러면 고문은 귀찮음을 피하고 평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고문에게 슬쩍 부탁하는 거다. 고문 성격상 매정하게 무시하지는 않겠지.
‘해볼 만하다.’
레이첼 덕분에 좋은 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정작 레이첼도 통제 대상에 포함되지만, 내가 마종공에게 제대로 배우면 대신 가르쳐줄 테니 원망은 말았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올해는 일이 잘 풀리는 해가 될 것 같다. 그래, 그동안 개처럼 굴렀는데 편안한 해도 있어야지. 에넨에게 양심이 있다면 외래종한테도 축복을 내릴 때가 됐어.
행복하다. 밀린 축복이 한 번에 터진 건지 생각도 못한 행운이 연이어 몰려왔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면 동서남북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지 않았을까. 아니, 사방이 아니라 팔방으로 포효할 자신도 있다.
그렇기에 눈 앞의 라테르가 오늘따라 예쁘게 보였다.
‘우리 3호.’
라테르를 보는 눈이 절로 따스해졌다. 지금까지 류티스와 더불어 귀찮은 양대 산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역시 지성의 상징인 마법사다.
사실 아무도 없는 동아리실에 쓰윽 나타날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시 무리한 부탁이라도 하기 위해, 아니면 사고를 쳐서 자진납세를 하기 위해 온 건가 걱정부터 들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라테르가 먼저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마법사들은 제가 다독여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바쁜 고문을 귀찮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걱정은 환희로 돌변했다. 마도강국의 왕자가 마법사들을 통제하겠다고? 내가 귀찮은 부분을 정확히 파악해서 대신 해주겠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고문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걱정 마라.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면 마종공께 부탁드릴 테니.”
물론 왕족이 자선 사업가는 아니기에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리는 없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도움을 주는 걸 테고, 다행히 라테르가 원하는 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마법사가 원하는 건 뻔하지.
그래서 라테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확답을 했다. 네가 나를 제대로 돕는다면, 나도 네가 원하는 걸 주겠다고.
“감사합니다, 고문.”
그렇게 쿨거래를 마친 라테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제도에 있을 때만 해도 올해를 어떻게 버티나 걱정이었는데,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절실했던 인력이 줄줄이 늘어났다. 그것도 하자가 있기는커녕 뛰어난 인력들로.
심지어 라테르는 정말 뜬금없이 굴러온 노예, 아니 인력이었다. 황족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아인테르, 가족이기에 상부상조하는 에리히와 달리 라테르는 자신의 의지로 손을 보탠 것이지 않나. 비록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온 결과지만, 아무렴 어떤가. 오히려 이득이 걸렸기에 더 열심히 일하겠지.
‘최고다.’
동아리실을 나가는 라테르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최고, 그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마종공의 예비 반려기는 하지만, 감찰관이라는 입장상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다. 그 거리감 때문에 원활한 통제는 어려웠을 터. 하지만 학생인 라테르가 협력하면 거리감 문제가 해소된다. 거기다 라테르는 왕족이라는 권위가 있으니 더욱 수월하겠지.
물론 마법사들의 미친 광기와 행동력을 생각하면 왕족이라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겠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라테르가 1차적으로 거르면 극소수만 남을 텐데, 그 정도는 여유롭게 관리할 수 있다.
‘고맙다…’
이 시대 진정한 이성, 라테르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진짜 고맙다. 내가 하루에 한 시간은 마종공하고 1:1 트레이닝하게 해줄게.
아카데미 졸업할 때쯤이면 네가 유벤 제일의 마법사가 될 거야.
개학식 전의 우려와 달리 아카데미는 평온했다. 교장의 연설이 신입생들의 양심을 자극한 건지, 아니면 신입생들의 상식과 예절이 굳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카데미는 평화로웠다.
게다가 타국 학생들을 관리하는 빌라르, 마법사들을 통제하는 라테르가 버티고 있으니 어찌 소란이 생기겠나. 유사시에는 아인테르와 에리히도 투입할 수 있으니 가슴이 절로 웅장해지는 라인업이다. 오호대장군을 확보하고 유비군을 플레이하면 이런 기분이려나.
“빌라르 경이 없었으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을 겁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빌라르를 동아리실에 초대했다. 다른 셋은 동아리 시간마다 만나서 이것저것 챙겨줄 수 있지만 빌라르는 아니지 않나. 마침 마종공도 수업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라 누구를 초대하기는 딱이지.
“과찬이십니다. 제가 없었어도 아카데미는 훌륭히 학생들을 보듬었겠지요.”
“하하, 제국인으로서 기꺼운 말이군요. 교장도 기뻐할 겁니다.”
덤덤한 빌라르의 반응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차를 따라줬다. 사실 빌라르가 타국 학생들을 떠맡은 건 나와 교장의 결정이라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히 본인이 없는 곳에서 정해진 결정에 앙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빌라르도 이 미친 입학 대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역할 분담과 협조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솔직히 빌라르가 타국 학생들을 맡아주지 않으면 답이 없기는 했어. 나나 교장이 손을 대기에는 제국인이라…
“그래도 빌라르 경의 도움 덕분에 편할 수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타국의 일에도 이리 협조해주시니 어찌 감사하다는 말을 아끼겠습니까.”
그리고 의자 왼쪽에 내려두고 있었던 상자를 빌라르에게 건넸다. 말뿐인 감사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 오고 가야 진심이 돋보이는 법.
“작은 성의입니다. 기사에게 육체보다 귀한 재산은 없지요.”
작년에 나와 함께 열심히 구른 빌라르, 앞으로 2년은 더 구를 빌라르. 함께 구르는 동지로서 애잔함과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어디 가서도 구하지 못할 귀한 선물을 준비했다.
“마종공께서 만든 포션입니다. 어지간한 상처는 곧바로 회복되고, 꾸준히 섭취하면 건강에도 좋을 겁니다.”
그 말에 빌라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마법과 연관이 적은 빌라르지만 마종공의 명성은 모를 리 없다. 심지어 몸을 굴리는 기사로서 고품질의 포션은 무엇보다 귀한 물건. 마종공이 만든 포션이면 그 어떤 포션과 비교해도 우위에 서는 물건이다.
“아가가 신세를 진 사람이면 열심히 만들어야겠구나.”
그리고 마종공도 특별히 힘을 써서 만들기도 했고.
비록 내가 섭취 중인 40년 존버 장생 포션 같은 건 아니지만, 애초에 포션에는 수명 연장 기능 같은 거 없어.
“페로사 경의 것도 챙겼으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리 귀한 걸 받을 줄은 몰랐군요.”
너무 넙죽 받으면 속물처럼 보일까 잠시 망설이던 빌라르였지만, 소중한 딸이 먹을 것까지 챙겼다고 하니 바로 손이 움직였다. 역시 아비 입장에서는 체면보다 자식의 건강 아니겠나.
“제가 준비한 선물이 초라해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조금 머쓱한 듯한 말에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정확히는 의자 오른쪽에 놓인 잘 포장된 상자로.
빌라르를 향한 동질감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는지, 빌라르도 나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었다. 동아리실에 오자마자 선물이라고 줬을 때는 감동했었지. 내 아카데미 파견 생활이 내다 버린 세월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감찰관님과 연인 분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아르메인에서도 제법 유명한 세공장이 만든 물건이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설마 여섯 쌍이나 준비할 줄은 몰랐다는 말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우직한 기사가 팔찌를 사올 줄은 몰랐다. 원래 의외의 사람에게 의외의 선물을 받을 때가 더 감동적이기는 하다.
“초라하다니요. 서로에게 없는 걸 주고 받은 것인데 초라할 게 있겠습니까?”
나는 구할 수 없는 아르메인의 장신구, 빌라르는 구할 수 없는 마종공 특제 포션.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걸 준 훈훈한 선물 교환일 뿐이다. 초라하고 과하고 따질 게 있겠나.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옅은 미소를 짓는 빌라르를 향해 마주 미소를 지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성이 빌라르의 절반만 됐어도 행복할 텐데.
***
동족 혐오에 걸릴 것 같다. 이 눈에 뵈는 게 없는 광견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어쩌다 광견이 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동족 혐오 직전에서 멈출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제과 동아리 부원이 아니었다면, 고문과 거래를 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광견 중 하나였을 테니.
‘역시 쉽지는 않군.’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문에게 거래를 시도했을 때부터 각오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귀찮고 짜증 날 줄은 몰랐다.
애석하게도 왕족의 권위로는 눈이 뒤집힌 마법사들을 전부 막지 못했다. 애초에 마종공 하나만 보고 대륙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아닌가. 고작 권위로 막아내기에는 너무 과격하고 광기 넘치는 자들이다. 그러니 권위에다 은근한 회유, 소소한 압박을 곁들이고 나서야 성과를 낼 수 있었고, 그마저도 완벽한 성과는 아니었다.
‘질긴 것들.’
정말 처절하게 막았음에도 꿋꿋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이미 공공연하게 제과 동아리 신청서를 작성한 사람, 동아리 신청 기간이 되면 바로 제출할 사람들이 언급될 정도니까.
“라테르 형제님?”
그렇게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사이, 타니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니안.”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개만 까딱였다. 어찌 보면 무례지만, 타니안은 무례보다는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내 상태에 집중했다.
“왜 그러십니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요.”
“성법이라도 써주겠나?”
“얼마든지요.”
내 말에 픽 웃음을 흘린 타니안이 머리에 손을 얹더니 짧게 기도문을 읊었다.
덕분에 육체에는 활력이 돋고, 흐릿했던 정신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진짜 해줄 줄은 몰랐는데.
“동아리 문제 때문입니까?”
다 안다는 듯한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과 동아리를 지키는 수문장이 된 건 딱히 비밀도 아니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거 라테르 형제님만 시달리는 것 같아 죄송할 정도군요.”
“내가 자처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 내가 자처한 일이다. 사실 힘든 일이니 거래 조건으로 올릴 수 있던 것 아니겠나. 쉽고 편한 일이었으면 고문이 가뿐히 처리했을 테니.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나만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눈에 불을 켜고 통제하자 일부 마법사들은 다른 부원들에게 접촉하기 시작했다. 가망이 없는 길보다는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는 길을 찾은 것. 지극히 마법사스러운 방법이다.
“그러는 너는 괜찮나?”
그리고 타니안 역시 그 부원 중 하나, 가능성 중 하나이기에 실시간으로 시달리고 있을 터.
“마침 그 얘기를 드리려 왔습니다.”
그러자 타니안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