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94)
그리고 나와 호르펠트 백작의 대화를 들은 아인테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래, 얘가 호르펠트 백작이다. 작년에 전대 호르펠트 백작의 서프라이즈 은퇴 이후로 열아홉의 나이로 제국백 작위와 제국의회 의원직을 짬맞은 가여운 존재.
“예, 전하. 제노비아 히덴 오브 호르펠트입니다. 신년하례식 때 전하를 뵐 기회가 있었지만, 제가 우둔하여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제국백이 황실과 제국을 위해 노력하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이해합니다.”
다시 고개를 숙이는 호르펠트 백작에게 아인테르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사실 아인테르와 호르펠트 백작이 초면인 건 당연한 거다. 제국백이 황실 인사와 만나봤자 황제나 황태자지, 황위와 거리가 먼 3황자와 만날 일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새롭게 등극한 제국백 얼굴을 미리 알아두지 못하다니, 막 실권을 찾은 3황자라 그런지 센스가 부족하구나.
…아니, 그냥 정치나 인맥에 관심을 가지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던 시절의 잔재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슬픈데.
“헌데 백작은 감찰부장과 친분이 있는 것 같군요.”
“예, 히덴 가문과 크라시우스 가문은 예전부터 교류가 있어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화제를 전환하기 위한 아인테르의 질문에 호르펠트 백작은 덤덤히 답했다. 솔직히 친분은 나보다 에리히와 더 두텁겠지만, 아무튼 몇 번 만난 건 사실이니.
“그리고 그때의 버릇이 남아 감찰부장께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나에게 사과를 건네는 호르펠트 백작.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아마 방금 감찰부장이 아닌 칼 오빠라고 부른 걸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이름을 틀린 것도 아닌데 그 정도야.”
물론 초면도 아니고 지인이 이름으로 불렀는데 결례일 게 있겠나. 장관처럼 야, 이새끼, 개새끼 수준만 아니면 된다.
***
작게 웃음을 흘리는 칼 오빠를 보니 만족스러웠다. 이거 제대로 통했다.
작위를 받기 전 말괄량이 꼬마가 아닌, 당당한 제국백이자 자랑스러운 제국의회 의원의 모습을 보였다. 빠르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모습, 사적 인연이 아닌 공적 관계를 중시하는 모습. 분명 감찰부장인 칼 오빠에게는 마음에 드는 모습일 터.
‘이렇게 점수를 따는 거지.’
아카데미에 파견 중인 칼 오빠, 제도에 머무는 나. 이런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도저히 만날 기회가 없다.
그러니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주의해야 한다.
‘아주버님께 잘 보여야 돼.’
에리히의 형이자 크라시우스 가문의 차기 가주. 그런 사람에게 잘 보이면 에리히와의 결혼이 더욱 수월해질 거다.
제국의회의 역할은 법을 제정하며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 이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 역할에 불과하다. 실상은 황제 폐하의 지시에 가장 먼저 움직이는 수족들의 모임. 폐하께서 원하는 법을 만들며,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부서나 관료를 공격한다. 그것이 제국의회와 의원들의 실질적 역할이다.
그렇기에 제국 초창기 때의 의원들은 황제의 거수기, 황실의 개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나, 오늘날 그러한 비아냥은 권력의 핵심 중 핵심이라는 극찬에 불과했다. 폐하께서 아끼고 애용하며, 언제나 가까이서 보필하는 측근들. 귀족들 입장에서 무엇보다도 영광인 일 아니겠나.
폐하께서 가장 먼저 휘두르는 검, 폐하를 지키는 최후의 방패. 그런 제국의회 의원들이 제국의 이상 사태에 대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올해 아카데미는 제법 소란스러울 것 같구려.”
회의를 위해 모인 의원 중 최연장자인 기벨트 백작의 발언. 의장인 바르돈 백작보다 일개 의원이 먼저 입을 연 상황이지만, 바르돈 백작은 물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정 주기마다 서로 돌려가며 맡는 의장보다는 연륜과 경험으로 압도하는 기벨트 백작의 발언권이 더욱 강하니.
“허허, 학생들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역시 경험이지요. 어찌 보면 기회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식물도 과하게 물을 주면 뿌리가 썩는 법인데, 기회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기벨트 백작의 발언 이후, 다른 의원들도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3황자 전하의 실권 회복, 마종공 각하의 아카데미 상주, 작년부터 아카데미에 머무른 주요 인사. 실로 다양한 이유로 인해 올해 아카데미 박람회는 이전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몰렸다. 심지어 그 손님들의 작위나 직책이 가볍지도 않으니, 의회가 주목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
제국, 정확히는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이상 사태에 의회가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단지 그 관심을 누가 책임지고 보이냐가 관건이지만─
“그래도 호르펠트 백작이 간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는구려.”
“하하, 그러게나 말이오. 젊은 친구가 가는 게 훨씬 낫기야 하겠지.”
이번에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가기로 했으니까.
– 빌헬름 그놈, 정략으로 이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둘이 알아서 만나느니 뭐니, 아주 말랑말랑한 소리나 하고 있어.
얼마 전, 영지에 계신 아버지가 연락을 주셨다. 미래의 시아버지인 타일글레헨 백작께서 에리히의 결혼을 자율에 맡겼다는 중요한 정보와 함께.
그렇기에 제국의회가 아카데미를 주목하자마자 파견을 자청했다. 한 번이라도 많이 에리히와 만나고,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눠야 내가 바라는 꿈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노력하지 않고 결과를 기대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제도의 업무를 뒤로 하고 파견을 가는 건 부담이 큰 일이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에리히를 본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누구지?’
에리히 옆에 붙어있는 금발 꼬마를 보기 전까지는 분명 기뻤다.
***
호르펠트 백작과 친한 건 솔직히 내가 아니라 에리히였다. 나는 친구가 없고, 에리히는 많으니까. 사실 에리히에게도 카피바라의 기질이 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에리히에게 안내해줬는데, 아무래도 괜한 짓이었던 것 같다.
‘망했네.’
에리히를 보고 온화한 미소를 짓던 호르펠트 백작이 세라를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은 순간, 호르펠트 백작의 시선을 받은 세라가 에리히와 팔짱을 낀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거 아무래도 크게 망한 것 같다고.
그래,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작년에 작위를 물려받아 바쁠 사람이 아카데미까지 온 것부터 이상했어. 게다가 세라를 보자마자 굳었으니 뻔하지.
‘블랙 카피바라 새끼.’
호르펠트 백작도 에리히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에리히는 모르고. 머저리 새끼.
“제노비아 누나?”
제3자의 시선으로도 망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에리히는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갑자기 등장한 호르펠트 백작을 보고 놀란 기색 정도는 보였으니 덤덤은 아닌가. 물론 머저리인 건 그대로다.
“오랜만이야, 에리히. 그새 많이 컸네?”
아무튼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호르펠트 백작은 나를 대하던 때와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에리히가 공무원인 것도 아니니 아직은 친한 누나, 동생으로 대해도 되겠지.
누나가 아닌 그 다음 단계를 노리는 것 같다는 건 넘어가고.
“와,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잘 지냈어?”
‘저 미친.’
세라와 팔짱을 낀 채로 호르펠트 백작에게 다가가는 에리히. 그 참담한 모습에 쌍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미친놈이다. 호르펠트 백작한테 다가가려면 세라하고 팔짱을 풀든가, 계속 팔짱을 유지할 거면 호르펠트 백작한테 다가가지 말든가. 그걸 융합해서 시도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싸움닭을 같은 공간에 두는 꼴밖에 더 돼?
그러나 이미 서로가 서로의 사정거리에 진입한 두 싸움닭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상대를 째려봤다.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애써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한 호르펠트 백작이 말꼬리를 늘리며 다시 세라를 바라봤다. 키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일방적으로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시선.
“이 아이는 누구야? 친구?”
심지어 호칭도 아이다. 나이도 연상, 키도 더 큰 여인이 아이라고 찍어누르니 정말 세라가 애처럼 보이는 마법이 펼쳐졌다. 하필 세라가 병으로 고생해서 또래보다 작은 편이기도 하고…
“세라야. 예전에 말했던 소꿉친구.”
“아, 그 아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것처럼 반응한 호르펠트 백작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녀장 딸이랬지? 트리마라 남작가의 영애, 기억난다.”
기분 탓인가. 저 말이 ‘어딜 가신의 딸 주제에 백작가의 자제와 어울리려 하느냐.’ 라는 돌려까기처럼 들리는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만 그리 느낀 것이 아닌지, 세라의 눈동자가 잠깐 떨리더니 곧바로 반격기가 날아왔다.
“에리히. 제노비아라면 그 히덴 가문의 그분?”
“아, 응. 맞아.”
“그러면 호르펠트 백작 각하시네? 바쁘실 텐데 아카데미까지 오시다니, 상냥하시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듣기에는 평범한 말이지만, 그 속에는 ‘넌 백작이라는 사람이 아카데미에 올 정도로 한가하니?’ 라는 말이었으니까.
“백작이신데 에리히를 허울 없이 대하는 걸 보면 마음이 따뜻한 분 같아.”
아, 하나 더 있네. 작위 귀족이 일반 귀족가 자제하고 반말로 얘기하는 게 맞냐는 예법 지적.
살며시 목을 매만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오고 간 논검에 구경하는 사람의 숨이 절로 막히는 기분이었으니까. 주변을 살피니 다른 부원들도 에리히 주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두렵다. 루이제를 둔 부원들의 개노답 레이스, 분쟁 하나 없이 평화롭게 해결된 여섯 연인 같은 말랑말랑한 경험만 한 우리에게 있어서, 저 치열한 아가리 파이팅은 인세에 강림한 지옥이다. 진짜 광기를 목도한 가짜 광기 같은 거지.
‘루이제…’
그 와중에 에리히의 첫사랑이자 첫 실연인 루이제는 정말 쥐 죽은 듯이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혹시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 공포에 질린 모양.
물론 루이제와 에리히의 관계는 제과 동아리 전체가 철저히 함구 중이라 세라도 모르지만, 그래도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은 절로 두려운 법 아니겠나. 안전거리를 확보할만하다.
쉴 새 없이 살을 날리던 논검은 호르펠트 백작의 퇴장으로 마무리 되었다. 정확히는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몰리는 걸 우려한 호르펠트 백작이 먼저 등을 돌린 거지만.
“이따가 다시 올게. 나도 박람회 기간 동안에는 아카데미에 있을 예정이거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 휴전에 불과했다. 호르펠트 백작이 아카데미에 남아 있다면 언제든 2차전, 3차전이 터질 수 있는 상황.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된다. 고작 이런 일에, 내가 당사자도 아닌 일에 도망치는 건 우스워 보이지만, 지인 둘이 동생을 두고 치열하게 아가리 파이팅을 하는 미친 광경이다. 그 꼬라지를 보고 온전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치정 싸움 보는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닌 이상 버틸 수 없다.
심지어 그 사이에 낀 동생이라는 놈은 눈치도 지능도 원시 시대 상태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새끼 아마 서로 살을 날려댄 것도 모르고 있을걸.
머리가 아프다. 작년에 있던 개노답 레이스를 구경하면 속만 터지고 말았지, 지금은 근처에 있다가 피폭당할까 봐 겁이 난다. 둘 다 소꿉친구라 10년 넘게 칼을 갈아와서 그런가.
‘이딴 걱정을 할 줄은 몰랐는데.’
자괴감 들고 괴롭다. 아카데미 부수기를 하는 단체들도 전부 처리하고, 우르르 몰려온 신입생들도 나눠서 관리하니 이젠 가족이 문제냐.
그래도 어쩌겠나. 긍정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카데미나 국가의 안위가 흔들리는 사건보다는 아기자기한 치정 싸움이 터지는 게 이득이기는 하다.
…과연 아기자기가 맞는지 의문이지만.
“오, 이게 타니안 님이 만든 빵이로군요.”
“예,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입니다! 다섯 개만 더 주십시오!”
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부스 구석에서 판매대를 바라보니, 사제복을 입은 청년이 타니안의 빵을 충동구매 중이었다.
마법사 손님, 귀족 손님에 이어 타니안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제 손님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제들은 딱히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굳이 내가 나서서 인사할 필요도 없다는 거다.
‘사제가 최고네.’
역시 신의 뜻을 따르는 선량한 존재들이다. 다른 직업군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선한 사람들이야.
“저기, 형제님? 잠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타니안이 갑자기 부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놈이 좋게 생각하자마자 통수를 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