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96)
“사도는 신의 총애를 받아 신의 뜻을 행하는 자, 굳이 비유하면 여명 교단의 성자 같은 존재입니다. 신물은 그런 사도에게 신이 하사한 물건이고요.”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잠시 입을 다물자, 베들러는 친절히 용어 설명까지 해줬다.
유감스럽게도 용어 설명까지 듣자 혹시나 하는 마음은 확신으로 변했다.
‘사도?’
“영원한 푸른 하늘께 바치는 마지막 제물은 나 자신이었군.”
아무래도 그거 카간 같은데. 그 새끼 막타를 내가 치기는 했지.
‘신전?’
“팀장님. 종교 시설로 보이는 건물이─”
“태워. 가아르 부족이 다시 뭉칠 구심점은 전부 없애.”
아마 가아르 부족의 잔당을 소탕할 때 태운 것 같다. 입구에 늑대 모양 석상이 있길래 부수기도 했고.
‘신물?’
“주인님. 이건─”
“대충 창고에 둬. 관리할 필요는 없어.”
혹시 그 대검하고 대낫인가? 카간이 항상 들고 다니기는 하던데.
…
‘좆됐네.’
어쩌냐 이거. 그동안 내 앞길 꼬이게 한 건 에넨이 아니라 영원한 푸른 하늘 같다.
베들러를 배웅한 이후 부스 구석에 눕듯이 주저앉았다. 루이제가 걱정스레 다가오기는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고개만 저었다.
아니, 사실 존나 별일이다. 신벌 3스택이 쌓인 인생은 대체 어떤 인생일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 앞으로는 그냥 거울만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루이제에게 ‘나 신벌 받았어. 뒤지지 않은 게 용하대.’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아무리 연인 사이에 숨기는 일은 없어야 하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었다.
‘망할.’
계속 눈을 뜨고 있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니 이 세계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인간에게 개입할 수 있는 세계다. 종교 승리를 찍은 에넨은 빡겜 끝에 현타가 왔는지 조용하지만, 북방은 에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유일한 이교 구역이 아닌가. 그 이교 구역의 신이 에넨처럼 조용하라는 보장은 없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영원한 푸른 하늘도 에넨 같은 신적 존재이거늘, 단순히 유목민들의 전통문화 정도로 생각해서 쓸어버렸다.
“신이 격노했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베들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도 살해, 신전 훼손, 신물 모욕이면 아무리 자비로운 신이라도 분노할 수밖에 없다나. 솔직히 나였어도 눈이 뒤집혔을 것 같기는 하다. 사도 살해는 정당 방위니 넘어가더라도, 집을 불태우고 애장품까지 더럽힌 건 별개의 문제다.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한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입니다만, 영원한 푸른 하늘을 최초로 섬긴 자가 묻힌 자리 위에 신전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다른 신전들의 기둥은 8개 미만이라고 하더군요.”
심지어 내가 태운 신전의 기둥은 8개였다. 빙의 전 세계로 치면 성 베드로 대성당 같은 곳을 태운 상황. 영원한 푸른 하늘 입장에서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을 십새끼겠지. 아무리 이교도에 적성국이어도 성지는 건드리지 않는 게 국룰이니까.
“다행히 희망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한다. 순간 베들러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하나 싶었지만,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솔직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이지만 형제님이 살아 계신 걸 보면, 영원한 푸른 하늘도 에넨께서 굽어살피는 신도를 직접적으로 해하는 건 피하는 것 같습니다.”
“화는 났지만 최소한의 이성은 남았다?”
“예, 아마 사과와 함께 적절한 배상이 있다면 용서할 듯 합니다.”
깽판을 쳐서 상대의 눈이 돌아갔지만 신끼리 맞다이를 뜰 정도로 이성이 날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니 합의금을 내면서 사과해라. 그러면 신이라도 용서를 할 것이다.
뭔가 지극히 자본주의스러운 방식이라 기묘하지만, 오히려 어렵지 않은 방식이라 다행이다. 성지에 가서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제사를 올리라고 했으면 더 곤란했을 테니.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가 다른 신에게 기도를 올리라는 말씀을 드리는 건 민망하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와중에 참된 사제의 발언을 하는 베들러를 보고 다짐했다. 앞으로 여명 교단에 진심을 담아 헌금을 하자고. 그리고 그만큼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도 하루 세 번 기도하자고.
‘시발.’
그건 그렇고 무슨 인생이 이러냐. 황태자와 장관에게 치이는 걸 넘어 이제는 신에게도 치이고 있네.
그래도 힘내자. 이미 뒤진 카간과 불타 없어진 신전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신물이라도 열심히 관리하면 봐주지 않을까?
‘나머지는 당사자하고 기도로 합의 봐야지.’
미안하다, 영원한 푸른 하늘. 배상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낼게. 신전이라도 남아 있다면 헌금도 줄 텐데, 그 신전을 내가 태웠네.
만약 북방이 안정되면 불탄 신전도 다시 복구할게…
박람회는 베들러의 깜짝 선언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흘러갔다. 작년 박람회 때도 세 번째 영광을 제외하면 문제 없이 진행되었고, 올해 추가된 마법사 손님들도 쿠키 경매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으니 일이 터지려야 터질 수 없다.
“내일 아침에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의 손님들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 손님까지 도착했다. 길고 긴 연고전의 종식을 상징하는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의 방문. 덕분에 교장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사실 진작에 올 수도 있었지만, 박람회 첫날부터 인파가 몰리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는 이유로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의 방문 일자는 박람회 중반부로 합의됐다. 솔직히 인파 조정보다는 길들이기 목적이 강해 보이지만 어쩌겠나. 갑이 까라면 을은 따라야지.
게다가 을이라고 딱히 홀대한 것도 아니다.
“먼 길을 오는 것이지만 분명 기뻐할 겁니다. 마종공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무엇보다 큰 영광이지요.”
교장의 말에 마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들이기 목적이기는 하지만 자존심만 조금 구길 뿐, 실리는 가득 챙길 수 있는 합의였으니 딱히 불만도 없을 거다. 아무튼 박람회에 오기만 하면 마종공이 친히 가르침을 준다고? 그러면 걸어서라도 가야지.
“멀리서 온 아이들을 그냥 보내면 얼마나 섭섭하겠니. 한 번 정도는 만나줘야 서로 좋게 헤어질 수 있단다.”
심지어 깜짝 수업을 마종공이 자청한 거라는 걸 알면 감동해서 울지 않을까 싶다.
“그거 다행입니다. 그만큼 제국 아카데미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릴 기회가 될 테니까요.”
“허허, 맞는 말씀입니다.”
슬쩍 교장에게 승리 축하 인사를 건네자 교장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교장이 웃는 걸 볼 때마다 흐뭇하다. 타국 주요 인사들의 단체 입학으로 처절하게 망가진 교장의 말년이 다시 회복되었으니까. 이제 교장이 은퇴를 하게 된다면 작년에 있던 재앙보다는 올해 일궈낸 연고전 승리를 떠올리지 않겠나. 마무리가 좋으면 다 좋은 거다.
그렇게 한참이나 웃던 교장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감찰부장, 쿠키는 얼마나 만들어졌습니까?”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지만 중요한 내용이기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카데미 교장과 감찰부장 사이에서 쿠키가 중요한 내용 취급받는 것도 웃기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말 중요하다. 아마 쿠키 물량에 따라서 아카데미가 엎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지 않을까. 그건 쿠키의 모양을 한 영약 같은 음식이니.
“520개 정도 만들었습니다. 직접 보관 중이시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교장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520이라는 수치가 적은 물량은 아니지만 쿠키는 한 번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음식이다. 마종공의 쿠키를 경매에 부치기로 결정한 것이 벌써 며칠 전인데, 아직도 520개? 이상하다고 생각할만하다.
하지만 대량 생산이라는 전제부터가 틀렸다. 마종공은 그냥 만들고 싶을 때 만들고, 기껏 만들어도 대부분 내 입에 욱여넣었다.
‘위장을 줄일 수도 없고.’
덕분에 요즘은 쿠키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대량 섭취하고 있다. 꾸역꾸역 먹은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520개나 확보된 것이 신기할 따름이지. 교장도 내 고충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걱정 마십시오.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너무 부족하다 싶으면 조금 서두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내 위장을 위해서라도, 아카데미의 평온을 위해서라도 이 대량 섭취를 지속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한정판이어도 정도가 있는 법. 구매 희망자에 비해 물량이 너무 적으면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겠나.
만약 쿠키를 하나씩 판다면 수백 명에게 팔 수 있겠지만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하나만 쥐여주는 건 도리가 아니다. 어디 가서 그런 짓 하면 정 없다는 소리 들어. 아카데미가 경매를 진행하는 건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온을 위해서니, 최대한 뒷말이 나오지 않을 방법을 택해야 한다.
너무 많이 뿌리는 건 아니지만 너무 적게 뿌리는 것도 아닌 그 미묘한 중간 단계. 공무원에게 있어서 익숙한 일이다.
“감찰부장이 맡아준 일이니 어찌 걱정이 되겠습니까.”
교장도 딱히 걱정되는 건 아닌지, 내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그래, 아무리 진지하게 말해봤자 그냥 쿠키다. 무슨 공청석유나 만년하수오 같은 걸 다루는 것도 아니고 쿠키. 마종공의 손길만 닿으면 쉽게 쉽게 만들 수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어.
***
작년에 비해 확연히 늘어난 손님, 덩달아 폭등한 판매량.
그러나 생산량은 작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부원들 모두가 합심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딱 두 명만 빼고.
“미안하구나. 스승으로서 제자를 도와야 하는데.”
사실상 동아리 명예 부원이 되신 스승님. 제과 실력은 충분히 1인분에 도달하셨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작 스승님이 만든 과자는 판매할 수 없다.
“괜찮아요. 재료를 옮겨주시는 것도 충분히 도와주는 거잖아요?”
그래도 상관없다. 스승님의 마법 덕분에 재료 운반에서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 생산량에만 관여를 할 수 없는 거지 시간 절약 부분에서는 큰 기여를 하고 계신다.
“미안해… 신입이 발목이나 잡고…”
올해 유일한 신입 부원인 세라. 몸을 쓰는 게 낯선 세라라서 아직 제과 실력은 미숙하지만,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기에 구박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생산 과정에서 절대 관여할 수 없는 스승님과 달리 세라는 어느 정도 소일거리를 도울 수 있으니까. 세라도 세라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다.
“신입이 미숙한 건 당연하잖아.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 기죽지 말고.”
그렇기에 시무룩한 세라를 다독여줬다. 즐기자고 있는 박람회에서 슬퍼하는 부원이 있는 건 볼 수 없어.
그런 마음을 담아 토닥이자 약간 물기가 맺힌 세라의 눈망울이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
“치즈 케이크로 줄래? 오늘은 두 조각.”
─다가 날카롭게 돌변했다.
온순한 양에서 싸움닭으로 돌변한 듯한 기세에 절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예상한 사람이 있었다.
마침 판매대에 있던 에리히에게 눈웃음을 짓는 여성. 에리히의 친한 누나이자, 누가 봐도 에리히에게 마음이 있는 여성.
‘호르펠트 백작님.’
오늘도 방문한 단골 손님. 하지만 이상하게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만약 세라가 없을 때 왔다면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두 조각? 평소에는 하나였잖아.”
“하나는 너 먹어. 고생하는데 배는 채워야지.”
“역시 누나밖에 없네.”
그 와중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들리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저 바보.’
웃으며 케이크를 포장하는 에리히의 모습에 미약한 원망감이 들었다.
아니, 에리히 입장에서는 소중한 친구니 살가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저 누나밖에 없다는 말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세라가 뻔히 듣고 있는데.
– 뿌득
옆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난 듣지 못했다.
난 몰라. 정말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