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97)
히덴 백작가의 이름은 가볍지 않다. 2대 황제이신 에이만카 2세로부터 제국백의 이름을 받고, 약 300년의 세월 동안 황제와 황실의 방패로서 살아왔다. 천명을 위해 리브노만의 그림자에서 살았고, 모든 영광을 유일한 주인인 리브노만에게 돌렸다. 그것이 히덴 백작가의 긍지이며 자랑.
그런 히덴 백작가의 첫째로 태어난 순간부터 내 어깨에는 300년의 긍지와 자부심이 올려진 것이다. 설마 첫째이자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지만.
“너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구나.”
가끔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했다. 제국백이라는 이름은 첫째가 짊어질 수밖에 없지만 동생들이 가주를 돕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혼자다. 믿고 따를 오빠나 언니도, 나를 응원해줄 동생들도 없는 혼자.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께서 더 슬퍼하실 테고, 가신들은 동요할 거다. 히덴 백작가를 우습게 여기고 도모하려는 자들이 나올 거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냉철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히덴의 이름을 받아 평온한 삶을 산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에리히가 미웠다. 아주, 아주 조금.
“크라시우스 가문의 아이들이다. 형은 너보다 두 살 많고, 동생은 두 살 적구나. 공교롭기도 하지.”
제국백 가문끼리 교류하는 사교장. 그 자리에서 제국백 가문을 이끌어 갈 자제들이 만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께서는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여서 크라시우스 가문을 가장 먼저 소개받았다. 부모의 관계가 자식에게도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칼 오빠와는 평범하게 인사를 나눴다. 오빠는 이 자리에 의무적으로 참석한 느낌이 짙었고, 나도 오빠의 어깨에 올라간 짐을 알았기에 그러려니 싶었다.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 귀찮게 할 필요가 있겠나.
“안녕 누나!”
하지만 에리히는 아니었다. 칼 오빠와 달리 해맑았고, 정중함보다는 활발함을 내세웠다. 다짜고짜 누나라고 했을 때는 꽤 놀랐었지.
놀람 뒤에는 언짢음이 몰려왔다. 나나 칼 오빠 같은 첫째는 무거운 짐을 감당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주제에 귀찮게 굴기나 하고. 너는 의무는 없이 권리만 누리며 편하게 살고 있으니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그때는 나도 너무 어려서 했던 생각이고, 나이를 조금 먹고 나니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귀족에게 의무가 없을 리가 없는데. 설령 없더라도 그것이 에리히를 미워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데.
“누나도 검술 연습해? 나랑 형도 그런데.”
“와, 말도 잘 탄다! 나도 누나처럼 탈 수 있을까?”
“이거 선물이야! 치즈 케이크! 우리 주방장이 이런 거 잘 만들어!”
그러나 당시에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래서 에리히를 멀리 했는데─ 이상하게 에리히는 아무리 밀어내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다.
정작 같은 후계자인 칼 오빠는 타일글레헨 백작령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에리히는 호르펠트 백작령까지 놀러 오며 친근하게 굴었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누나, 뭐해?”
“숨 쉬어.”
정말 다행이다. 귀찮은 티를 노골적으로 풍겼는데도 나를 싫어하지 않아서.
아무튼 끈질기게 놀러 오는 에리히, 가차 없이 밀어내던 나. 그 기묘한 관계는 사소한 계기로 변하게 되었다.
무예에 썩 재능이 없던 아이가 노력으로 재능을 메우려고 했지만, 결국 한계에 도달해서 절망한 이야기. 검으로써 명성을 떨친 아버지를 본받지 못해 두려움에 빠진 아이가 울던 이야기. 이 얼마나 사소하고 흔한 이야기일까.
그렇게 평범히 끝날 수 있던 이야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에리히가 방문하면서 다르게 흘러갔다.
“유모가 그러는데, 높은 사람은 전부 잘할 필요가 없대. 그냥 포기하지 않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로도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른대.”
“나도 형이랑 누나를 보면 대단한 것 같더라!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던데.”
솔직히 딱히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결국 내 재능은 거기까지라고, 재능에 순응하라는 말로 들렸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오히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길이 마침내 끝난 것 같았고, 뜨거운 햇빛만 쏟아지던 길에 그늘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부족하면, 가신들이 불안해해.”
그래서 속에만 품고 있던 불안을 처음으로 토했다. 나보다 어린 애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러고 싶었다.
“가신들이 모르게 귀족끼리 도우면 되잖아. 내가 형한테 말해서 누나 도와달라고 할게!”
그 말에 무심코 웃음이 터졌었다. 차라리 가신들은 내 휘하기라도 하지, 귀족은 대등한 상대라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그래도 그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으로 에리히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칼 오빠 말고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응, 누나는 내 친구니까! 평생 옆에서 도와줄게!”
평생 옆에 있겠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당연히 어린아이가 가볍게 한 말이라는 건 안다. 비겁하게 그때 발언을 빌미로 에리히에게 결혼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냥 그 말로 인해 스스로 옭아매는 삶에서 벗어났고, 나보다 어린 동생에게 반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나 홀로 간직할 소중한 추억이다.
그 추억을 마음에 품고 에리히가 도와줘야 할 누나가 아닌 멋지고 당당한 누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안녕하세요, 백작 각하. 오늘도 와주셨네요?”
기껏 그런 누나가 됐다고 자부했는데, 왜 거슬리는 게 에리히 옆에 있는 거지?
“에리히가 운영하는 부스인데 매출은 올려줘야지. 우리가 남도 아니고.”
어느새 다가온 불청객에게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금발 꼬마, 세라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건방져. 병아리 같은 게 인상을 써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남작가 주제에.’
애써 눈 앞의 병아리를 무시했지만, 사실 남작가라는 위치는 저 병아리에게 약점이 되기는커녕 나를 위협하는 독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병아리가 고개를 숙이면 나는 저 아이도 에리히의 부인으로 인정할 생각이 있다. 승자의 관용 정도는 얼마든지 보일 수 있지. 반면 내가 패배하면 그대로 끝. 남작가의 영애가 에리히의 첫 부인이 되면 나는 그대로 에리히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더욱 물러날 수 없다. 패배해도 뒤가 남은 저 아이와 달리, 나는 한 번의 패배가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질 수 없어.’
유모의 딸? 소꿉친구? 나도 에리히의 소꿉친구다. 우리 아버지도 에리히의 아버지와 친한 분이고.
조건은 같다. 아니,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침대에 누워만 있던 아이에 비해 나는 다방면으로 인맥도 쌓았고, 제국백이라는 작위도 이었으니까. 부족한 것 없는 몸이니까.
에리히는 몸만 오면 된다. 그러면 에리히에게도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게 해줄 수 있어.
‘너는 뭘 해줄 수 있지?’
허약한 영애, 크라시우스 백작가를 섬기는 트리마라 남작가의 영애. 오히려 에리히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 네가 에리히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물론 가문의 격이 부족하니,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꺼지라는 건 아니다. 사랑은 철저한 거래 관계가 아닌 같이 있는 걸로도 행복한 공생 관계니까.
“정말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요. 누가 보면 남매인 줄 알겠어요.”
“글쎄. 나랑 에리히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너희가 남매 같지.”
단지 상위 호환인 라이벌이 등장하면 알아서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할 뿐.
***
쟤네 또 싸우네.
‘이따가 올까.’
마르게타를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문워크 충동이 일어났다. 웃는 얼굴과 그렇지 못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세라와 호르펠트 백작.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케이크를 우물거리는 에리히.
다른 부원들이 숨 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디저트까지 즐기다니. 저 새끼는 위장이 강철인 건가, 머리가 강철인 건가. 요즘 전적을 보면 후자 같기는 한데.
“오, 오라버니. 오셨어요?”
문워크 충동이 이성을 이기려고 할 때쯤, 구석에 박혀 오들오들 떨고 있던 루이제가 황급히 달려왔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은 절박함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도망치기는 글렀네.
‘말려야겠다.’
두려움 가득한 루이제를 보니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캣파이─ 아니, 저걸 캣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총성 없는 전쟁을 끝내야 루이제의 호흡이 되돌아올 거다.
사실 쟤네가 예비 아주버님인 내 앞에서는 다소 자제하는 걸 생각하면 예비 형님인 루이제 앞에서도 자제할 거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루이제가 겁을 먹을 필요가 없기는 한데─
‘첫사랑만 아니었어도.’
유감스럽게도 예비 형님은 ‘예비’ 형님이지만, ‘내 남자의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은 현재진행형이다.
덕분에 루이제도 저 둘이 충돌하면 지레 겁을 먹어서 구석에 숨고, 예비 형님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저 둘은 더욱 치열하게 논검을 펼치고… 끔찍한 악순환이다.
‘망할 놈.’
여전히 케이크를 섭취 중인 에리히를 노려봤다. 결국 저 둘을 홀린 에리히의 잘못, 홀렸으면서 눈치를 말아먹은 에리히의 잘못, 괜히 루이제에게 반했다가 차인 에리히의 잘못이란 거 아닌가. 기적적인 그랜드 슬램이다.
…그래도 아직 무력 충돌 사태까지 가지 않은 걸로 감사하자.
남은 박람회 기간 동안은 부스에 토템처럼 박혀있기로 했다. 루이제 말고 다른 부원들도 은근히 바라는 것 같더라. 나름 평화로운 개노답 연애 레이스를 펼치던 놈들 입장에서 치열한 논검은 보기에도 두려운 수준이었겠지.
그나마 마종공은 한참 어린 것들이 싸우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반대로 너무 어린 것들의 싸움이라 나 대신 말릴 수도 없었다. 이제 스물, 열여덟이 된 애들 싸움에 120 넘은 사람이 관여하는 건 좀.
‘빨리 끝나라.’
그렇기에 절실히 기도했다. 제발 이 박람회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막 태풍이나 우박 같은 자연재해로 조기 종료됐으면 좋겠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경쟁을 포기하고 고개를 숙인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내가 교장일 때에 에르네스토 아카데미가 고개를 숙인 것은 나 개인의 업보지만, 그 숙임으로 인하여 학생들이 마종공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유벤 전체의 복이다. 늙은이의 이름 하나를 더럽혀서 얻는 것으로는 너무나 과분한 선물이 아닌가.
“에르네스토의 후예들이라 그런지 이해가 빠르구나.”
게다가 그 마종공께서 유벤의 영웅을 긍정적으로 언급하시고, 멘토의 발끝에도 닿지 못한 우리를 후예라고 칭해주셨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일까. 학생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얼굴이 상기되거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웃었다.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 마법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나 탓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젊었다면 학생들과 같은 모습이었을 테니.
“제국의 마법사와 유벤의 마법사는 국경이라는 장벽에 막혀 있으나, 대륙 마법을 이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단다. 상대의 발전은 나의 호승심으로 이어지고, 나의 호승심은 우리의 경쟁으로 이어지지. 끝없는 경쟁이야말로 대륙의 진보를 이끄는 법.”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던 마종공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시며 말을 이으셨다. 비록 우리는 국경과 국적으로 갈렸으나 대륙 마법계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동지들이라고. 경쟁은 당연한 것이나 그 경쟁마저 대륙과 마법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과연 옳은 말씀이다. 그렇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대륙 마법을 이끌어가는 선구자께서 저리도 훌륭한 이상을 품고 계시니 마법계의 앞날은 너무나 밝다.
“내가 준 조언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렴. 그저 너희가 나아갈 때 작은 디딤돌로 사용하면 충분하단다.”
그 말을 끝으로 마종공께서는 강의실을 나가셨다. 조금은 씁쓸했다. 마치 모든 것이 풍족하고 완벽한 낙원에서 추방된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상실감에 먹힐 수는 없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낙원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거늘, 낙원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으니 어찌 불평을 가질 수 있을까. 마종공께서는 작은 디딤돌이라 하셨으나 오늘의 가르침은 평생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을 잊지 말자. 이 가르침을 토대로 더욱 나아간다면 언젠가 제국 아카데미를 능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종공께서도 경쟁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지 않나. 지금은 우리가─ 아니, 내가 졌지만 미래에는 우리가 이길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쿠르트 셰레 선생님, 맞으십니까?”
이 감동이 가시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 가르침을 복기하려는 찰나, 검은 제복을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흑발 흑안에 검은 제복을 입은 청년.
‘감찰부장인가.’
마법사로서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제국의 감찰부장인 것을 떠나 마종공의 예비 남편이니.
‘무슨 일이지?’
골치 아픈 문제는 아니어야 할 텐데.
***
안타깝─ 아니 다행스럽게도 자연 재해로 인한 조기 종료 사태는 터지지 않았다. 그래, 학생들의 열정이 담긴 박람회가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지. 당연한 일이다.
덕분에 멍하니 부스의 토템으로 지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한다.
‘쿠르트 셰레.’
급하게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