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98)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의 교장, 유벤 연합왕국의 마법계와 교육계에서 거물로 통하는 네임드. 그냥 유벤 버전 교장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왕년에는 제법 불같은 성격이라고 하던데, 여기 교장도 젊을 적에는 군부에서 활약했었지.
‘귀찮게.’
그리고 이제 그 양반을 만나러 가야 한다. 솔직히 귀찮다. 토템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배회할 수 있다는 건 기쁘지만, 그 이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국인과의 교섭이라고 생각하면 썩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겠나. 교장이 정말 간곡하게 부탁했고, 사정을 들어보니 상당히 그럴 듯한 이유였는데.
“에르네스토 아카데미 측에는 경매와 별도로 쿠키를 판매할 생각입니다.”
첫 발언부터 심상치 않았다. 혼란을 우려하여 경매를 진행하기로 해놓고 자국인도 아닌 타국인에게 따로 쿠키를 공급하다니.
물론 교장이 이유 없는 삽질을 할 사람은 아니기에 묵묵히 들었다. 실제로 합당한 이유를 곧바로 말하기도 했고.
“아카데미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과 귀족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그 궤가 다릅니다. 전자는 철저히 주어진 예산과 정해진 사용처 내에서 어떻게든 쥐어짜야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같은 아카데미의 교장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설득력이 미쳐 날뛰었다.
“경매에서 참가자 하나하나의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지만, 에르네스토 아카데미는 자존심을 굽히고 제국까지 온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미 자존심을 구기고 온 상황이니 실리를 최대한 챙겨줘야 무난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복잡하군요.”
그 말을 듣고 마법사의 세계는 어렵다는 걸 느꼈다. 상대가 자존심을 굽히면 영혼까지 털어먹는 게 국룰 아닌가? 아무래도 마법사들끼리는 교류할 일이 잦아서 상대를 일방적으로 패는 건 자제하는 것 같다.
“그러니 쿠키는 어느 정도 주되, 돈이 아닌 다른 걸 받을 생각입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교장의 발언은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금화는 귀족들이 경매장에서 뿌릴 테니,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에게는 마법사만이 줄 수 있는 걸 얻자고.
예를 들면 대륙의 마법사들이 모이는 세미나, 논문 분쟁, 공동 개발, 유적 발굴 등. 온갖 분야에서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의 양보를 요구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바로바로 튀어나온 걸 보니 평소에도 간절히 원했던 문제 같더라. 교장으로 지내면서 쌓인 울분이 많았나.
“양보는 실리가 걸린 사안 아닙니까?”
“저 쪽은 이미 마종공의 가르침과 쿠키를 원한다고 알린 상황입니다. 그걸 위해 제국까지 왔으니, 다른 건 포기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마법사의 방식은 잘 모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지만 양보를 마법사가 직접 언급하기는 곤란하고, 지금 시기에 교장끼리 회동을 하면 시선만 끌게 됩니다. 감찰부장이 경매 주관자라는 명목으로 만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경매 주관자는 무슨, 그냥 제과 동아리 고문이라 이름만 올린 주관자인데.
사실 아직도 의아하기는 하다. 무슨 사춘기 청소년의 예민한 비누 멘탈도 아니고, 같은 마법사끼리 양보 운운하는 것도 함부로 못 하는 게 말이 되냐. 외교적 수사도 이 정도면 병이다.
그나마 교장에 대한 신뢰도가 높으니 참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알아서 처리하는 교장이 직접 부탁할 정도면 정말 곤란한 문제겠지.
“실례하겠습니다. 쿠르트 셰레 선생님, 맞으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됐다. 타국 주요 인사와 접하는 이유가 쿠키 팔이라니, 조금 자괴감 드네.
“마종공 각하와의 연으로 이번 경매 주관을 맡았는데, 선생님과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 인사드렸습니다.”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그래도 무난한 대화가 될 것 같아 다행이다.
박람회 수익은 아카데미에서 반, 동아리에서 반을 가져간다. 동아리가 구르고 굴러 얻은 수익을 아카데미가 가져가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뭐 전통이라고 하니 어쩌겠나. 애초에 귀족들이 부스에서 얻은 돈 정도에 집착할 리도 없고. 그냥 아카데미의 가르침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준다고 한다.
그렇기에 각 동아리는 부스의 성과에 집중하지, 수익 자체에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다. 제과 동아리도 작년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개당 금화 12개의 가격으로 7개, 펠란 백작께 낙찰되었습니다.”
‘와.’
박람회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시작된 경매. 나름 경매 주관자로서 참석했고, 탄성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아마 기립박수도 치지 않았을까.
정식 부원이나 고문은 아니지만 제과 동아리 명예 부원처럼 지내는 마종공, 경매 판매 물품도 제과의 결과물인 쿠키. 덕분에 이번 경매 수익은 제과 동아리 부스 수입으로 치겠다는 기상천외한 결론이 나왔다. 마종공은 수익에 관심이 없다고 했고,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100% 꿀꺽하기도 뭣하니 대충 타협한 것일 터.
그 결과, 제과 동아리의 수익은 미친 듯이 치솟고 있었다. 금화 아래로는 감히 언급도 되지 않는 광란의 경매, 내 연봉과 맞먹거나 능가하는 수치도 가볍게 언급되는 미친 광기. 물량이 나름 대량으로 풀린 상태에서도 이런 가격이다.
‘나보다 비싸네.’
씁쓸한 마음에 경매 참가자들이 앉은 곳을 쳐다보니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쿠르트 셰레가 보였다.
다행히 저 양반과의 대화가 무난하게 끝나서 에르네스토 아카데미는 적정량의 쿠키를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지금 경매를 보면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우리와 뒷거래를 하지 않았으면 에르네스토 아카데미도 저 미친 경매에 참가해서 돈으로 이겨야 했다는 의미 아닌가.
물론 기가 질릴수록 뒷거래를 제시한 우리 쪽에 감사하겠지.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십시오, 타국인.
“오, 오라버니, 정말 절반이나 저희가 가지는 거예요?”
다시 경매사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제과 동아리로서 경매 구경을 온 루이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당황스럽겠지. 합계도 아니고 개당 금화 10개 남짓이 나오는 미친 경매를 보고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심지어 루이제는 부와 거리가 먼 남작가 출신이다.
“그냥 스승님한테 전부 드리면 안 돼요?”
거의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에 루이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압도적인 액수에 기가 죽은 건지, 아니면 욕심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귀여운 질문이다.
“우리 부장님. 동아리 예산 늘어나서 좋겠네.”
“안 좋아요!”
더욱 울상을 짓는 루이제를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저거 네가 관리해야 하는 돈이야. 마종공이 안 받는다고 하니 어쩌겠어.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나마 황금공이 없으니 이 정도지, 황금공이 참여했다면 못해도 다섯 배 가격으로 휩쓸었을 겁니다.”
그 광경을 보던 아인테르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루이제를 위로했다.
아니, 저게 위로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위로 목적으로 한 말이기는 하겠지. 지금 상황은 최악이 아닌 차악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뜻.
“다섯… 배…”
유감스럽게도 그 위로는 루이제에게 닿지 않았다. 다섯 배라는 끔찍한 단어가 뇌에 각인되어 정신이 나갔을 뿐.
그런데 사실이다. 황금공이 경매장에 강림했으면 다른 경쟁자들을 돈으로 후려팼을걸.
“그러고 보니 이상하기는 하군. 황금공은 유벤에서도 유명한데, 그 자가 이런 곳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대리인도 안 보냈어. 아예 손을 뗀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다른 부원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종공 특제 도핑 쿠키라는 희대의 물건이 나왔지만, 황금공이 포기한 사태에 대해 의문을 품은 대화.
‘포기했겠냐.’
부원들은 모르겠지만 황금공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빨리 나한테 접촉을 시도했지.
– 감찰부장. 내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는데, 마종공이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예, 맞습니다.”
– 가격은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 30개만 보내주게.
접촉과 동시에 경매라는 번거로운 과정을 스킵하고 다이렉트로 돈을 꽂았다. 가격도 정말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보내더라.
딱히 양심에 찔리지는 않는다. 원래 높으신 분들이 편하게 사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황금공이 친히 경매에 참가했으면 30개가 아니라 전부를 가져갔을 거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행인 일이지, 아무렴.
“개당 금화 14개의 가격으로 6개, 스티넬 백작께 낙찰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행복하게 구매하는 걸 보니 내 기분도 좋아진다.
제과 동아리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박람회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사실 박람회 시작 전부터 예상한 결과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올해는 마종공께서 친히 만드신 쿠키까지 우리 동아리 실적으로 취급됐는데, 그러고도 1등을 못하면 조작을 의심해야지.
그리고 지금은 1등이라는 소소한 명예보다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할 때다.
“자, 이건 에리히 몫.”
“…고마워.”
묵직한 주머니가 손 위에 올려지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마종공께서 만드신 쿠키를 판매한 후, 그 금액의 절반은 제과 동아리가 가지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가져야 할 돈은 아니지만 마종공께서 필요 없다고 하시니 어쩌겠나. 그렇다고 아카데미에 주기에는 아카데미도 이를 악물며 반만 가져갔다. 그 반도 억지로 가져간다는 느낌이 강했지.
그렇게 난데없이 거금을 손에 쥐게 된 동아리─ 와 부장.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루이제는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포함한 부원들은 그런 루이제를 보며 편하게 쓰라고 다독였다. 정확히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남의 일 취급했다, 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다 같이 나누자!”
그 결과가 이거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금화를 세던 루이제는 모든 수익을 부원 숫자대로 나누는 만행을 저질렀다. 혼자 감당할 수 없으니 모두를 공범으로 만드는 지독한 수법.
‘이거 어쩌지.’
지독한 수법이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나도 루이제가 품고 있던 부담을 그대로 느끼게 됐으니까.
물론 아인테르와 류티스, 라테르, 타니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황족이나 왕족인 입장에서 돈을 보고 놀랄 일이 있겠나. 그냥 쿠키를 팔아서 이런 액수를 벌었다는 것에 놀란 거지, 액수 그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제발 가져가라고 성화인 루이제를 보며 웃을 뿐, 그 외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귀족이다. 솔직히 크라시우스 가문에 평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양심이 없지만 황족과 왕족에 비하면 평범한 게 맞다.
심지어 후계자도 아닌 차남에 불과하지 않나. 이런 액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이건 세라 몫!”
돈을 나눠줄수록 묘하게 밝아지는 루이제의 목소리. 결국 마지막 희생자인 세라에게 이르러서는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 나 정말 필요 없어. 난 아무것도 안 했잖아.”
“여기 아무것도 안한 사람은 없어. 다 열심히 한 거니 받아도 돼.”
기겁하며 고개를 젓는 세라에게 루이제는 억지로 주머니를 쥐여줬다.
이상하다, 분명 대화 자체는 훈훈한데 왜 악행처럼 보이지? 세라가 글썽이는 게 감동보다는 두려움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럴만하지.’
그래도 세라의 심정이 어떨지 알 것 같기에 픽 웃음이 나왔다. 제국백 가문인 나도 부담스러운데, 일개 남작가인 세라는 어떻겠나. 게다가 저택에만 머물러서 사치와 거리가 먼 세라인지라 금화라는 단위 자체가 낯설 거다.
그런데 그런 금화가 손에 들어왔다. 그것도 여러 개.
“받아줘.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진심 가득한 루이제의 말에 세라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제발 루이제를 말려달라는 듯이.
‘미안.’
그런 세라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불가능하다. 말릴 수 있었다면 애초에 나도 안 받았지. 그나마 형이라면 말릴 수 있었을 텐데 하필 부재 중이네.
“가지고 있기 부담스러우면 유모한테 보내는 건 어때? 처음으로 직접 번 돈이라고 하면 유모도 기뻐할 거야.”
“그, 그럴까…?”
그렇다고 고개만 젓고 넘어가면 세라가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아 적당한 대답을 들려줬다. 다행히 썩 괜찮은 답이었는지 세라도 고개를 끄덕였고.
확실히 말하고 나니 괜찮은 방법이기는 하네. 나도 그냥 어머니한테 보내야겠다. 그러면 가문을 위해 쓰시든, 영지를 위해 쓰시든 알아서 하시겠지. 하다못해 어머니 개인 자금으로 사용되더라도 나보다는 바람직하게 쓰실 거다.
박람회 시상식을 치른 날 저녁에는 연회가 열린다. 박람회 기간 동안의 경쟁은 그저 아카데미 행사에 불과하니, 이 연회를 마지막으로 모든 감정을 털어버리라는 의미─ 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냥 연회다. 축제의 마지막을 즐겁게 마무리하는 거지.
아카데미에 방문한 손님들도 보통 시상식 이전에 돌아가기에, 연회는 오직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자리나 마찬가지다. 동아리 선배라는 이름의 윗사람을 대하던 학생들 입장에서는 마음 편하고 기꺼운 자리.
“에리히.”
“어,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