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0)
제 30화
악역? 영애 – 4
보통 내 나이 정도면 이미 결혼을 했거나, 결혼이 아니어도 약혼 상태인 경우가 많다. 17세부터 성인으로 취급하는 이 세계에서, 21살 귀족이면 결혼 적령기에 정확히 겹치는 나이니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슬슬 적령기를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빙의 전에는 어린 나이, 빙의 후에는 전쟁, 종전 후에는 내가 결혼에 생각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 이 상태까지 왔다. 나를 향한 가주의 신뢰도 하늘을 찌르는지라, 먼저 나서서 결혼 압박을 펼치지도 않았고.
그러나 귀족들은 결혼 시장의 우량 매물을 가만히 둘 정도로 얌전하지 않았다. 숨 쉴 틈 없이 결혼에 관한 제안이 가문에 몰려들었고, 가주는 그 제안을 하나도 거르지 않은 채 그대로 나에게 보냈다. 감찰부장 업무와 정중한 거절을 병행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작년 신년하례식, 제국의 모든 귀족이 제도에 모인 날에 사건이 터져버렸다.
“이 아이가 내 딸아이다.”
전쟁과 황위 계승 분쟁, 반대파 숙청 등. 제국을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대강 수습하고 겨우 숨을 고를 수 있는 무렵에 열렸던 신년하례식. 그때 나도 부장으로서 이리저리 얼굴을 비추고 다녔고, 그 과정에서 철혈공을 만났다. 옆에 마르게타를 낀 상태였지.
철혈공의 소개에 마르게타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고, 나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또래 친구가 없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자네가 비슷한 나이더군. 제도에 머무는 동안 같이 어울려주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공작의 제안에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도 철혈공과의 연을 조금 더 단단히 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받아들였고, 그 이후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마르게타는 툭하면 감찰부 접견실로 찾아왔고, 가끔은 나를 제도에 있는 바렌티 가문의 저택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예상 외의 잦은 만남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래도 신년하례식 기간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르게타는 신년하례식이 끝난 이후에도 제도에 남아버렸다. 철혈공이 나에게 혼담 얘기를 꺼낸 것도 얼추 그 시기였다. 진땀을 흘리며 겨우 거절의 말을 꺼낸 나에게, 철혈공은 인상을 찌푸리며 딱 한 마디를 하고 돌아갔다.
“마르에게는 네놈이 직접 말해라.”
막 성인이 된 공녀의 면전에다 ‘당신과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아, 이 잔인한 사람…
하지만 어쩌겠나. 못하겠다고 드러누우면 바로 내 배를 째버릴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며칠이 지나서야 감찰부에 찾아온 마르게타에게 겨우 거절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후회할 거예요, 칼 영식. 저 같은 사람은 둘이나 있을 수 없거든요.”
의외로 마르게타는 격노하지도, 우울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미소 짓고는 자리를 떴다. 후회할 거라는 말이 ‘너를 죽여버릴 것이다.’ 라는 뜻으로 들려서 한동안 공포에 떨었지. 다행히 그 후로 철혈공이나 마르게타와 접촉할 일도 없었고, 난 무사히 살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갑작스러운 철혈공의 혼담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언젠가 마르게타를 혼인시키기는 해야 하는데, 격에 맞추자면 상대의 나이가 많고, 나이를 맞추면 격이 부족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황실을 등에 업고 부상해버렸다. 사위로 흡족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타협할 수는 있는 정도였겠지. 설마 내가 혼담을 까버릴 줄은 몰랐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 후에 철혈공이 분노를 표하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 정말 감사하고 있었는데.
– 어린 놈한테 그리 단호히 거절 당할 줄은 몰랐지.
1년 만에 연락을 건 철혈공은 과거에 묻어 두었던 폭탄을 들이밀었다.
“제가 당시에 생각이 짧아 각하께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 허, 지금이라면 혼담을 받겠다는 말이냐?
아니, 갑자기 그러시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철혈공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 한 번 기회를 저버린 놈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건 과분한 일이지.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이제 마르와의 혼담을 원하면 네놈이 직접 내 성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째서 혼담을 받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공작의 엄포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반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예, 예, 거리며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철혈공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 봤지만, 워낙 인상이 험악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것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분명 다른 공작들보다 세대 하나는 앞선 노인인데, 왜 이리 정정한 것인지. 겉으로만 보면 그냥 중년으로 보일 정도다.
– 바렌티의 인내는 길지 않다.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철혈공의 말이 비수로 변하여 나에게 날아왔다.
– 그저 피하기만 하면 네놈도 모르는 사이에 잡아먹힐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코웃음을 친 철혈공이 연락을 끊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또 철혈공의 성 앞에 효수 당하는 꿈을 꿀 것 같다.
이번에는 효수가 아닌 단두대에 끌려가는 꿈을 꿨다. 그래도 죽은 꿈이 아니라 죽기 전의 꿈으로 완화된 것이 다행이다. 아무튼 다행이다.
“아버님도 참. 칼 영식이 아무리 마음에 드셔도 갑자기 연락하면 실례인데.”
마르게타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철혈공과의 신나는 강제 화상 미팅 다음날, 마르게타는 나를 학생회실에 딸린 부회장실로 끌고 왔다. 다른 학생회도 없으니 어제 있었던 철혈공의 연락 얘기를 슬쩍 꺼냈고, 그 후로 계속 저렇게 웃고 있다. 나는 생존의 위협을 받았는데, 웃어…?
“제가 공작 각하의 마음에 들 일은 없을 텐데요.”
미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하지만 그 말에 마르게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님이 직접 연락을 걸 정도로 신경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나요?”
그야 드물 것이다. 문제는 나는 긍정적인 의미의 신경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의 신경 같아서 그렇지. 살생부 맨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도 신경 쓰는 사람이기는 하잖아.
내 꺼림직한 표정에 마르게타는 여전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공녀는 연약한 공무원의 마음을 모른다.
“아버님 연락이 두렵다면, 저하고 결혼하면 해결될 문제 아닌가요?”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후후, 그런가요?”
살짝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할 일은 전부 끝냈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르게타도 배웅을 하기 위함인지 같이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내일도 오늘 같은 시간에 오시는 겁니까?”
“네, 내일도 제가 찾아갈게요.”
“알겠습니다.”
이 박람회인지 뭔지,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루에 출근을 두번 하는 것 같아. 나 같은 공무원이 세상에 또 있을까.
***
칼이 부회장실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안았다.
“흐아아아─”
아마 거울을 본다면 얼굴이 붉게 물들었겠지. 칼의 앞에서는 마음을 가다듬는 것만으로도 벅차, 긴장이 풀리면 금방 이렇게 된다.
“둔한 사람.”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향해 원망스레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농담으로 혼인을 입에 담겠는가. 그것도 과거 혼담이 오고갔던 남자에게. 정말 둔감한 것인지, 아니면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라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후자라고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칼을 향한 원망만 무럭무럭 자랐다. 그래서 어젯밤에 아버님께 연락을 걸어, 칼을 조금 찔러 달라 부탁했고. 아버님 앞에서 쩔쩔맸을 칼의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풀린다.
살짝 한숨을 내쉬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반한 사람이 불리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힘든 싸움 같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아카데미에서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렇게 빠질 줄은 몰랐는데.’
칼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년 전이었다. 제국 역사상 최연소 부장이 탄생했으니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름. 심지어 그 이후로도 황실을 등에 업어 승승장구한 사람이니까. 전승공과의 관계도 친밀해 보였고.
그때부터 짐작했다. 내가 혼인을 한다면 상대는 저 사람이겠구나, 하고. 아버님이 내 혼인 상대를 두고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는 아니까. 마침 등장한 저 칼이라는 사내는 공작가의 사위로 삼기에 알맞은 사람이었다.
정작 유력한 남편 후보는 1년이 지나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신년하례식이라는 명분이 없었다면 더 뒤로 밀렸겠지. 불만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더 자주 찾아가고, 짓궂은 말을 던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그 뒤에는 그대로 빠져버렸다. 어차피 남편이 될 사람이니 적당히 친해지려고 했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버렸다. 내 쪽에서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극적인 사건이나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다. 칼을 만나며, 칼과 대화하며, 칼과 웃으며 조금씩 호감을 품었고, 결국 가랑비에 젖듯이 어느 순간 이렇게 되어버렸다. 칼을 좋아할 이유는 많지만,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칼이 아니면 누구하고 결혼해?
“죄송하지만, 전 아직 누군가와 함께 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칼을 마음에 품었을 때를 떠올리니, 절로 같이 떠오르는 기억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연히 혼담을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면전에서 차였다. 최대한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답변하고 도망치듯 공작성으로 돌아갔었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얼마나 울면서 애꿎은 베개만 내려쳤는지 모른다. 결국 오라버니와 언니들에게 둘러싸여 위로를 받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나이차가 심한 남매들에게 자식 달래듯 위로 받는 건 정말…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전부 칼 때문이야.’
내 잘못은 없다. 애초에 칼이 괜히 튕기지만 않았으면 그럴 일도 없었으니까.
그 이후 인생 첫 실연의 충격에 공작성에만 박혀 있었지만, 아카데미 입학식이 다가오기에 문을 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심정으로는 아카데미고 뭐고 전부 싫었지만, 철혈공의 막내딸이 감찰부장에게 차이고 칩거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건 더 싫었다.
그렇게 입학한 아카데미에서 학생회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어찌 보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관료로 향하는 계단으로 여겨지는 학생회. 평상시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단체지만, 이제 어느 관료에게 달라붙을 이유가 생겼다.
함께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그러면 준비가 될 때까지 옆에 붙어 다니겠다. 관료 시험을 당당히 통과하여 재무성이나 감찰부로 들어가겠다.
아버님의 추천이라면 그깟 시험 따위 생략할 수 있지만, 추천을 통한 방식은 그 부서의 장이 거절하면 다른 부서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누가 감히 철혈공의 추천장을 거절하겠냐만, 상대는 이미 철혈공의 혼담을 거절한 전적이 있다.
‘운이 좋았어.’
그러나 관료 시험을 볼 것도 없이, 칼이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 아버님께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역시 우리는 이어질 운명이다. 중간에 조금 꼬임이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까.
이제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는 칼을 향해 차근차근, 느긋하게 다가가면 된다. 우선 그 애정 없는 칼 영식이라는 호칭부터 빨리 바꿔야지. 나를 마르라고 불러주면서, 정작 본인을 향한 호칭은 칼 영식에서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마음 고생 한 걸 생각하면 조금 괴롭혀주고 싶기도 한데. 그래, 칼이 나에게 푹 빠지게 해서 제발 칼이 자신을 칼 영식이 아닌 칼이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하게 만들자. 거절하는 척 하다가, 애가 타 보이면 슬쩍 받아줘야지.
완벽한 계획에 스스로가 감탄스럽다. 아카데미라는 장소에 같이 있다면, 절대 칼을 놓칠 수가 없다. 이미 칼은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바렌티는 원하는 걸 반드시 손에 넣는 가문이니까. 단지 언제 손에 넣느냐가 관건일 뿐.
‘아, 칼이다.’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오는 사이, 창밖으로 칼이 건물을 빠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멀어져 가는 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갑자기 칼이 뒤를 돌아볼지도 모른다. 그러면 부끄럽게 웃는 얼굴을 칼에게 보이게 되니까.
제과 동아리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칼을 보자 분홍색 머리의 영애가 떠올랐다. 칼은 그 영애를 굉장히 신경 쓰는 것 같았고, 영애도 칼에 대한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이성을 향한 호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상관 없어.’
다시 말하지만, 바렌티는 원하는 걸 반드시 손에 넣는 가문이다. 지금은 칼이 조금 방황하고 밀어내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칼이 있을 자리는 내 옆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곳에서 헤매는 정도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런 아량은 기꺼이 베풀 수 있으니까.
중간에 무슨 일이 있든, 결국 웃는 건 이 마르게타 바렌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르게타(본인을 치타라고 생각함)
과연 칼의 아카데미 생활을 함께할 악역? 영애는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