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01)
“전하. 그러고 계시면 감찰부장이 곤란할 겁니다.”
“이런. 감찰부장에게 민망한 모습을 보였군.”
다행히 황태자비가 부드럽게 말하자 황태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황실의 유일한 양심인 황태자비다. 믿고 있었다고.
“크라시우스 가문의 후계자, 재무성 감찰부장 칼 크라시우스가 제국의 작은 태양과 작은 달께 인사드립니다.”
“어서 오게. 바쁜 와중에도 이리 얼굴을 보여주니 반갑군.”
아무튼 황태자가 두 발로 서는 걸 보고 빠르게 허리를 숙이자, 황태자도 평온한 목소리로 답해줬다. 바쁜 걸 알면 애초에 안 부르는 게 정답 아닐까? 1과장한테 임신 소식을 흘렸으면 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다른 것도 아니고 황손 관련 일이니 참는다.
그래, 참는데…
‘너 왜 눈을 그렇게 뜨냐.’
허리를 들자마자 황태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굉장히 기괴하고 말로 표현하기 꺼림직한 감정이 깃든 눈이었다.
뭐지 이 새끼. 평소에도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시선이다. 시골 동네를 홀로 떠도는 개를 목격한 개장수의 시선인데.
“제국 전체의 경사를 들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눈빛이라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축하 인사를 하러 왔는데 공포에 질려서 돌아갈 수는 없지.
“역시 감찰부장의 충정은 늘 감탄스럽다네.”
“과찬이십니다.”
다행히 성공적인 주제 전환이었는지 황태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감찰부장의 경사를 듣게 되면 크게 축하할 터이니, 소식만 빠르게 가져오게나.”
아닌가? 잘못 전환한 건가?
분명 예비 신랑에게 하는 덕담이지만 영 오묘하게 들리는 발언이다. 저 말이 내 뒤를 이을 노동력을 생산하라는 말처럼 들리면 기분 탓일까.
“감찰부장.”
그래도 겉으로는 덕담이니 적당히 예, 예 거리며 대답을 하는 사이, 황태자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직접 축하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 아이도 감찰부장을 봐서 반가운지 인사를 하는군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는 황태자비,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황태자비 앞에 무릎을 꿇으며 함께 쓰다듬는 황태자.
가족 사이에 사랑이 넘치는 것 같아 보기는 좋은데, 적어도 신하가 없을 때 그러면 안 될까. 아랫놈인 입장에서 윗분이 무릎 꿇고 있는 걸 보면 많이 곤란하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황손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시면, 그분을 섬길 제 아이들도 좋게 봐주시겠지요.”
곤란하기는 하지만 입을 다물 수는 없는 법.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무난한 답을 꺼냈─
“당연한 말이지. 감찰부장이 이 아이를 섬기는 중신일 텐데, 어찌 자네 아이들을 언짢게 보겠나.”
?
‘이 시발.’
너 이 새끼, 그거 무슨 뜻이야.
아무리 황태자라도 그런 말은 선 넘었지. 하다못해 황희도 세종 죽기 전에는 은퇴했는데, 나보고 문종까지 섬긴 황희가 되라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감찰부장이 옆에서 지켜준다면 정말 든든하겠군요.”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는 황태자비를 보니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시발.
문종을 섬기는 고명대신이 될 것 같은 기분에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왕 온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라는 황태자비의 말에 붙잡히고 말았다. 밥 먹고 가라는 권유는 어쩔 수 없지.
사실 정중히 거절해도 상관없다. 아침부터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고, 황태자비도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대화가 ‘넌 내 자식한테 물려줄 노비임.’ 같은 말이었는데 도망치면 무슨 꼴을 보려고.
하필 마지막 대화가 저따위면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저 주제로 계속 대화를 할 테고, 노비 상속은 우발적인 발언이 아닌 구체적인 계획이 될 수 있다. 그건 막아야 한다.
“아침부터 함께하니 가족이 된 기분이군. 이거 참, 든든하기 그지 없어.”
웃음기 섞인 황태자의 말에 치가 떨렸다. 가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좆 같은 놈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저 객에 불과한 신하에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무리 객이어도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 가족이나 다름없지. 난 황실에게 있어 감찰부장이 그런 객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그 말에 더욱 소름이 돋았다. 두고두고 현역에 종사시켜서 밥을 먹이겠다는 노예주의 마인드 아닌가. 사악한 새끼, 다시 태어나면 꼭 너 같은 상사 만나라.
“후후, 혹시 모르죠. 정말 가족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황태자비의 확인사살에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의 말에 비해, 유감스럽게도 황태자비의 말은 실현될 가능성이 제법 있다.
황태자비 입장에서 나는 부친인 전승공과 친한 사람이라 믿을만할 거고, 황태자 입장에서도 300년 동안 충성을 맹세한 제국백 가문 사람이다. 현 황제의 황후와 황비의 가문이 각기 다른 이유로 문제였던 걸 생각하면 괜찮은 선택지겠지.
물론 난 싫다. 지금도 미칠 것 같은데 황실과 이어지면 얼마나 시달리려고. 아마 한 가문에 과도한 권력이 집중된다고 견제가─
‘좋은데?’
생각해 보니 견제를 당하면 좋은 거 아닌가? 사직서 내밀기에 그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나.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도 정략결혼을 추진하기에는 양심이 아프니 내 자식 중에 황족을 홀릴 정도로 매력 넘치는 아이가 등장했으면 좋겠어… 황손이 내 아이를 홀려도 괜찮고.
“비의 말이 맞다. 감찰부장의 가문은 번창할 일만 남았으니, 감찰부장의 자식이 황실과 이어질 수도 있지.”
이상하다. 분명 황태자비와 같은 말인데 황태자가 하니 너무 음흉한 말로 들린다. 역시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중요한 법인가.
“그건 그렇고 감찰부장이 부럽군. 부인이 많으니 자식을 보는 행복도 많이 느낄 것 아닌가.”
웃음을 터뜨리는 황태자를 보니 확실히 느꼈다. 역시 메신저가 중요한 게 맞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냥 덕담으로 느꼈을 텐데, 저 새끼가 말하니 도발로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신분이 깡패라 직설적으로 욕을 할 수도 없고, 황태자비가 보고 있어서 돌려 까는 것도 망설여진다. 그러니 그냥 웃는 얼굴로 참을 수밖에.
그래도 방금 부인 운운한 발언 덕분에,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대신 나서줘서 제지할 사람이 생겼다.
“전하께서는 부인이 적어 행복이 덜하다는 거군요.”
아까보다 묘하게 싸늘한 목소리. 덕분에 황태자는 웃던 얼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머저리.’
급속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게 입은 함부로 놀리지 말았어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황태자궁을 탈출했다. 비록 황태자비의 마음이 상하는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 분노는 오롯이 황태자에게 향할 분노이기에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못난 놈, 부인이 하나인 사람이 부인의 숫자를 언급하는 건 너무 화려한 자폭 아니냐.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부인이 많아서 부럽다는 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기쁘─ 아니, 유감스럽게도 황태자비 역시 오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이번 일을 계기로 황태자가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라고 하지 않나.
‘어련히 잘 하겠지.’
사실 방금 자리에서는 미친 자폭을 했지만, 황태자 책봉 전에는 2황자파의 미친 암살 공세에도 살아남은 눈치 만렙인 놈이다. 입 조심하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더 빡치네. 나 놀리는 데 집중하다가 방심했다는 거잖아. 진짜 미친놈인가.
‘개새끼.’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은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부장니이이이임!”
오랜만에 1과장을 보는 자리에서 황태자 생각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마살로 가문의 저택에서 뛰쳐나오는 1과장. 평일이라면 감찰부까지 찾아가야 1과장을 볼 수 있었겠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저택에 있더라. 혹시 주말 출근을 하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아니어서 다행이다.
“잘 있었냐?”
아무튼 그런 1과장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겨줬다.
“어제도 연락했잖아요. 당연히 잘 지냈죠!”
“연락이랑 직접 보는 건 다르지.”
그 말에 1과장이 히죽히죽 웃으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방금 한 말이 마음에 꽤 들었나 보다.
“헤헤, 그래도 저를 보고 싶다고 제도까지 오면 곤란한데~ 우리 부장님, 아카데미에 적응 못하는 거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잘 적응하고 있다. 작년과 달리 노동력이 3호기까지 있어서 엄청 편하더라. 솔직히 제도 생각도 조금 가물가물했어.
물론 1과장에게 말하면 바로 드러눕고 뿌애앵 거릴 말이라 참았다.
“황태자비 전하 보러 올라온 거야.”
그렇다고 진실을 숨길 생각도 없다. 황손 소식만 아니었어도 오늘 올라오지는 않았지.
“와, 연인보다 황실이 더 중요해요?”
“응.”
섭섭하다는 듯 항의하는 1과장, 단호하고 짧은 답변. 그 답변에 나도 1과장도 잠깐 웃음을 터뜨렸다.
황실이 더 중요한 건 맞다. 우리 봉급 주는 게 황실이니 그보다 중요할 수 있겠나.
“그래도 저택까지 왔으니까 봐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1과장도 정말 섭섭한 건 아닌지 팔짱을 끼며 넘어갔다. 애초에 황태자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려준 건 1과장이니까. 오늘 내가 제도에 온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
“일단 들어가요! 아직 아침이라 추워요!”
활짝 미소를 지은 1과장은 그대로 내 팔을 잡아끌며 저택으로 데려갔다.
***
콧노래를 부르며 다과를 준비했다. 하녀를 시켜도 충분한 일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부장님이니 내 손으로 준비하고 싶었다. 원래 연인이 직접 챙겨줘야 감동한다 하더라고.
마음 같아서는 다과가 아니라 식사를 준비하고 싶었는데, 아직 내 실력이 그 정도는 아니라 포기했다. 소중한 한 끼를 모험으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아무리 부장님이 아무거나 잘 먹어도 이왕이면 맛있는 걸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나도 제과나 배울까?’
그리고 접시에 놓인 과자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미 부장님은 루이제가 만든 과자를 자주 먹고 있을 테고, 최근에는 베아트릭스 언니도 쿠키를 만들기 시작했잖아. 다른 연인들이 수제 과자를 주는데 나는 남이 만든 과자를 준다? 은근히 비교할 수밖에 없다.
좋아, 시간이 되면 틈틈이 공부하자. 베아트릭스 언니도 금방 배웠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람.
“차는 홍차로 괜찮죠?”
“그런 건 우리기 전에 물어보지 않냐?”
야박한 대답에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말았다. 지금은 ‘네가 우린 거면 다 괜찮아.’ 라는 대답이 돌아올 차례였는데.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그냥 줘.”
그래도 나름 비슷한 대답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나보다 어린 동생한테 높은 수준의 센스를 기대하는 건 너무한 일이지. 이 누나가 참는다.
“오랜만에 기성품 보네.”
다과를 내려놓으니 살짝 웃으며 말하는 부장님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마 구박보다는 장난 목적으로 말한 거겠지만, 하필 제과 문제로 고민하는 상황에서 저런 말까지 들으니 괜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