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02)
‘바로 공부해야지.’
부장님이 돌아가면 바로 시작하자. 시간이 나면 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서라도 해야겠어.
“기성품이 안정적인 맛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일단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여기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장님도 머쓱할 테니.
“맞다. 페넬리아는 저녁 전에 돌아온대요.”
차를 마시는 부장님에게 슬쩍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면 오후에는 페넬리아를 만나러 가겠지만, 부장님을 오랜만에 보는 건 페넬리아도 마찬가지잖아. 나 혼자 독점할 수는 없지.
“그래? 생각보다 빨리 오네?”
“드래곤은 비늘을 뚫는 게 문제지, 피 자체는 금방 뽑잖아요.”
의외로 북방 파견 임무가 아니라 국내 임무를 수행 중인 페넬리아와 묵광대. 현재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상위 재료로 취급되는 드래곤의 피를 채취 중이다.
드래곤의 피를 뽑으려면 비늘을 뚫어야 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뚫기만 하면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 페넬리아의 능력이면 금방 처리하고 올 수 있는 일이다.
“이번에는 네 마리라고 했나?”
“네. 페넬리아는 제도 근처에 사는 드래곤만 맡았고, 나머지는 다른 부대가 맡았어요.”
그 말에 부장님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페넬리아도 고생이 많아. 한 마리도 번거로울 텐데 네 마리나 맡고.
그래도 옛날에는 제도 근처에만 열 마리가 살았다고 하니 다행인 건가?
***
1과장의 설명을 들으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 산 지도 어느덧 6년째에 돌입했지만, 아직도 드래곤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복잡하다.
보통 드래곤은 위대한 존재, 혹은 거스를 수 없는 악의 존재로 서술된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압도적 강자라는 건 매한가지. 그러나 이 세계의 드래곤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는 그랬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아펠스 초창기 즈음, 인간의 마법력과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드래곤을 토벌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그럼에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토벌이지만, 대적 불가능한 적과 토벌 가능한 보스몹은 큰 차이가 있다.
‘하여간 아펠스 놈들.’
대륙 역사학계와 생물학계에는 이런 말이 존재한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겨서 찍으면 절반은 아펠스가 범인’ 이라는 격언. 빙의 전 모 국가가 생각나는 격언이나, 이 세계에서 아펠스는 그 모 국가보다 뛰어난 인성을 자랑한 국가다.
드래곤 토벌 가능성이 보이자 병력 피해는 신경 쓰지 않고 토벌을 시작했고, 덕분에 아펠스 시기 동안 드래곤의 개체수는 화려하게 폭락했다. 이거 멸종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진지하게 나올 정도로.
그 뒤로도 여러 일이 있었는데, 결말은 아펠스가 좆같았던 드래곤들이 크펠로펜과 손잡고 아펠스를 멸망시켰다는 거다. 에이만카 대제는 당대 드래곤 로드를 타며 군사들을 지휘했다지.
아무튼 아펠스에게 시달린 드래곤들은 크펠로펜과 대타협을 했고, 그 대타협 내용 중 하나가 주기적인 피 제공이었다. 죽어서 한 번에 뱉는 것보다 오래 살아서 주기적으로 줄 테니 너희는 귀찮게 굴지 말라는 기묘한 타협.
“건국 당시에는 황궁에도 드래곤이 살았다는데, 요즘은 다 산이나 동굴에서 지내서 번거로워요.”
예전처럼 황궁에 있었다면 페넬리아도 금방 끝냈을 텐데─ 라는 말이 덧붙여졌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황궁에서 사는 드래곤은 대체 뭘까…
드래곤 세 개체에게서 피를 뽑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동굴, 그 동굴에 거주하는 황금색 드래곤. 마지막 개체인 황금색 드래곤을 슬쩍 찌르자마자 다른 드래곤들에 비해 험난할 것 같다는 조짐이 느껴졌고, 슬픈 조짐은 언제나 맞았다.
너무 험난했다. 앞선 세 개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 덕분에 온 힘을 다해서 비늘을 뚫어야 했다. 그 여파인지 아직도 손이 떨릴 정도.
“다 끝났느냐?”
칼날에 묻은 피까지 병에 담는 사이, 머리 위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지 작게 말한 듯한 목소리임에도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예, 전부 끝났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자식으로서 부모의 약조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볍게 고개를 젓는─ 듯한 행동을 취한 드래곤. 인간 입장에서는 올려다 보는 것이 전부니 정확히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호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제국 건국 시기부터 드래곤들에 대한 정보는 상세히 기록되었다. 어느 지역에 어느 드래곤이 있고, 그 드래곤의 나이나 성향, 선호 음식이 무엇인지, 만약 거주지를 옮기면 어디로 무슨 이유로 간 건지 등. 그 기록을 토대로 제국은 드래곤들과 아무런 충돌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약 300년 전에 탄생한 이 드래곤은 다른 개체들에 비해 유난히 인간, 정확히는 리브노만 황가에 매우 우호적이다.
“그러고 보니 코르부스, 그 아이는 요즘 어떻더냐.”
병을 옮기는 대원들을 보던 드래곤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물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절로 몸이 굳고 말았다. 황제의 본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고 아이 취급하는 발언. 역적 취급을 받아도 무방하나, 눈앞의 드래곤은 그럴 자격이 있다.
“황태자께 업무를 넘기고 계십니다. 조만간 양위를 하실 것 같습니다.”
“허, 벌써 그렇게 됐나. 인간은 조금만 지나도 금방 늙으니 안타깝구나.”
한탄 섞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금방이라고 하기에는 수십 년이나 황제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드래곤은 에이만카 대제 시기에 탄생하여 크펠로펜 역대 황제들의 통치 시기를 겪은 황가의 역사, 그 자체다. 심지어 역대 황제들은 즉위식을 마치면 몇몇 심복들과 함께 이 드래곤을 방문할 정도.
대리인도 아닌 황제 본인이 직접 가는 건 과잉 행동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부럽구나. 그 아이는 곧 아버지를 볼 수 있을 테니.”
이 드래곤은 에이만카 대제의 자식이니까. 동시에 에이만카 대제를 태우며 전장을 누빈 당대 드래곤 로드가 남긴 유일한 자식. 그로 인해 제국과 드래곤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자.
“이런, 또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에게 이상한 말을 했군.”
추억에 젖은 듯 잠시 말이 없던 드래곤은 그리 말하며 꼬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꼬리에 밀려 내 앞에 놓인 한 무더기의 물체들.
“노동에는 그에 따른 대가가 있어야겠지. 내 비늘과 손톱이다. 전부 가져가거라.”
“…예?”
예상도 못한 말이라 뒤늦게 반문하고 말았다. 드래곤의 온전한 비늘과 손톱은 피와 맞먹을 정도로 귀중한 재료. 그러나 비늘만 뚫으면 주기적으로 뽑을 수 있는 피와 달리, 비늘과 손톱을 온전한 상태로 얻으려면 드래곤의 탈피를 기다려야 한다.
아쉽게도 탈피의 주기는 무작위. 게다가 드래곤들은 자기 몸에서 빠진 잔해를 달갑게 여기지 않기에 탈피를 하자마자 태우는 것이 다반사다.
“2년 전에 탈피를 했었다. 곧 너희가 올 때여서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지.”
그러나 이 드래곤은 그 거슬림을 참고 모아뒀다.
“감사합니다. 황실과 제국을 위해 유용히 사용하겠습니다.”
“괜찮다. 이건 고생한 아이를 위한 선물이니, 원하는 대로 써도 된다.”
그 말에 멍하니 드래곤을 바라봤다.
내가 원하는… 대로?
***
“…그래서, 나한테 가져온 거라고?”
“예.”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는 4과장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얘가 비늘에 손톱까지 주렁주렁 달고 왔을 때는 드래곤 슬레이어로 전직했나 싶었는데, 그냥 평화롭게 양도받은 거구나.
“특무성 장관도 임무 중 얻은 부산물은 현장 책임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4과장은 황급히 부연 설명을 했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물건인지 고민하느라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딱히 그것 때문에 말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고마워. 살다 보니 이런 걸 다 만져보네.”
일단 4과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를 표했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귀중한 물건을 공짜로 얻은 것은 사실이니까. 드래곤들도 피는 순순히 주지만 다른 건 줄 생각을 안 하는 편이다.
솔직히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당연하다. 인간도 헌혈 정도는 하지만, 피부를 벗기고 손톱을 뽑는다고 하면 쌍욕을 뱉지 않겠나. 아마 드래곤들에게 비늘의 비자만 꺼내도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며 ‘너도 아펠스랑 같은 눈으로 나를 본 거냐?’ 같은 말을 하겠지.
“주, 주인님, 이왕이면 포옹을…”
계속 머리를 쓰다듬자 4과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의외다, 마종공과 맞먹는 bpm의 소유자면서 먼저 말을 꺼내다니.
하지만 그만큼 용기를 냈다는 것이니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자신의 약점을 알지만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 숭고하다.
“알았어. 페넬리아가 원하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그래서 바로 안아줬다. 사실 4과장이 부탁하지 않았으면 내가 먼저 안았을 거긴 해.
“흐읏─”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4과장의 팔이 내 등 뒤로 둘러졌다.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최대한 버티려는 4과장의 의지도 같이 느껴졌으니.
마종공과 더불어 스킨십 최약체라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나 모르는 사이에 발전하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비늘 뚫느라 고생 많았어. 같이 저녁 먹을 시간은 있지?”
“예, 예… 물론입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4과장이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만.
“저기, 주인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에르제베트도─”
“에르제베트는 점심에 만났지. 걱정 안 해도 돼.”
그 와중에 친구인 1과장을 챙기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친구가 맞기는 하구나.’
1과장도 4과장이 언제 올지 알려줬었는데, 서로 진실한 친구인 것 같아 감동적이다. 최근에 세라와 호르펠트 백작의 논검을 봐서 더 감동적이야.
식사 자체는 무난하게 끝났다. 원래 조용한 4과장이 입에 음식까지 물고 있으면 얼마나 더 조용해지겠나. 그나마 내가 말을 걸면 성실히,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대답하기는 했다. 아마 4과장도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만나기 어렵다는 걸 알 테니 대화가 간절하겠지.
덕분에 식사 자체는 무난하고 화목하게 끝났으나, 마지막에 약간 소란이 있었다.
“바,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귀한 걸 제가 어찌 감히…!”
“아니, 애초에 이거 네가 받아온 거야.”
4과장이 노동의 대가로 받아온 비늘과 손톱.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부 가지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기에 절반은 4과장에게 돌려줬다.
당연하다면 당연스럽게도, 4과장은 완강히 거절했지만─
“비늘은 가지고 있기만 해도 마법 저항력이 늘어나잖아. 대원들한테 나눠줘.”
묵광대를 들먹이니 겨우 받았다. 4과장에게 있어 묵광대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개처럼 구르는 묵광대 입장에서 마법 저항력이 달린 부적은 천금을 줘도 아깝지 않은 물건 아닌가. 공짜로 얻는다면 다들 기뻐할 거다.
물론 손톱은 꼭 무기로 만들라고 신신당부했다. 드래곤의 손톱이 재료라면 어지간한 명장들도 제발 돈을 줄 테니 맡겨달라고 애원하겠지. 내가 선물로 준 검보다도 좋은 게 만들어질 거다.
“주인님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네가 있는 걸로도 충분히 보답이니 부담 가지지 말고.”
“예, 예. 명심하겠습, 니다…”
약간의 소란 끝에 자기가 가져온 물건이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4과장을 돌려보낸 뒤, 아직도 한가득 남은 부산물을 바라봤다.
‘나머지는 어쩌지.’
고민된다. 양이 적었다면 내가 꿀꺽하고 말았을 텐데, 하필 남한테 나눠주기에 충분한 양이라 그럴 수도 없다. 이런 보물을 혼자 차지하면 나중에 배가 터지거나 입이 찢어지는 법이니.
‘…황태자한테 넘길까?’
잠시 고민하다가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냥 황태자한테 짬 때리면 충분하지 않나? 걔한테도 반 정도 주면 될 것 같은데.
그래, 미리 주는 임신 축하 선물이라고 치자. 내가 구해온 물건은 아니지만 연인은 일심동체 아닌가. 4과장 대신 생색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감찰부장.”
“예, 전하.”
“비늘로 만들 수 있는 장신구는 뭐가 있을 것 같나.”
미쳐도 단단히 미친 황태자와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제 발로 황태자궁에 오자 의아해하던 황태자는 비늘과 손톱을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황실 사람이라도 피를 제외한 드래곤의 부산물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이 깃들었던 눈에는 기괴한 광기가 차올랐다. 일단 비늘을 보고 장신구 운운하는 걸 보면 보통 광기는 아닌 것 같다.
‘미친 새끼.’
제정신이냐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 드래곤이 황태자의 직계 조상은 아니라지만, 나름 건국 시조의 자식 아닌가. 어떻게 보면 작은 시조라고 볼 수도 있는 건데.
동시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황태자비에게 얼마나 긁혔으면 드래곤 비늘로 만든 장신구를 떠올릴까. 내가 황태자궁을 나가자마자 시원하게 털렸으리라.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