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03)
“차라리 전승공에게 손톱으로 만든 무구를 보내는 건 어떨런지요.”
하지만 광기에 빠진 윗분을 말리는 건 아랫놈의 임무. 정말 비늘로 장신구를 만드는 참사가 터지기 전에 더 좋은 방안을 말했다.
황태자비의 성격상 장신구 하나 받는다고 마음을 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귀한 재료로 무슨 짓을 했냐며 화를 내겠지. 그렇다면 황태자비가 아닌 장인인 전승공을 공략하는 게 효율적이다.
“좋은 방법이군. 과연 감찰부장이야.”
다행히 그럴듯한 해결책이라 느껴졌는지 황태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못난 놈. 넌 즉위하면 그 드래곤한테 꼭 사과해라.
제도에 다녀온 뒤로 제과 동아리실은 다목적실로 변하고 말았다.
이미 정신 나간 부원들 때문에 다목적실로 사용되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체스판이나 포커 카드 정도는 서랍에 박아둘 수 있지 않나. 이제는 제과와 상관없는 거대한 도구들이 제과 동아리실에 당당히 자리 잡고 말았다.
“기존 약재에 비늘을 갈아 넣으면… 아니지, 아예 포션에 담가서 숙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거 괜찮네. 좋은 재료만 뭉쳤으니 효과도 대단하겠어.”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말하는 마종공. 물론 일개 검잡이 입장에서 그게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다. 그냥 마종공이 즐거워 보여서 적당히 대꾸하는 거지.
“후후, 기대하렴. 상상도 못한 게 만들어질 거란다.”
그 대답에 마종공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비늘을 포션에 빠트렸다.
‘비늘 담금주.’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기껏 귀한 걸 준 드래곤에게 매우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아무리 봐도 담금주처럼 생긴 걸 어쩌겠나. 황금 드래곤 비늘 78년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
‘웅장은 개뿔.’
미친 생각을 털어내며 탁자에 소중하게 놓인 비늘과 손톱을 쳐다봤다. 이미 저택 안내를 받아 귀가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마종공은 드래곤의 부산물까지 보게 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마법사 입장에서 드래곤의 부산물은 최-고급 재료니까. 심지어 피와 달리 주기적으로 얻을 수 없는 물건이면 더더욱 귀할 터.
그렇게 귀한 물건을 난데없이 가지게 된 마종공은 ‘나에게 받은 선물 + 마법사의 열정을 불태우는 실험재료’라는 환상의 조합으로 인해 귀를 파닥였고, 제과 동아리실에 온갖 실험도구를 배치했다.
다행히 다른 부원들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라테르 같은 경우에는 마종공의 실험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더라. 부장인 루이제도 나름 마법사라 흥미를 보였고.
‘저걸로 장신구를 만든다고?’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마종공조차 조심스레 다루는 재료, 마법사들이 눈독 들이는 재료로 장신구를 만드는 게 말이 되냐. 아마 만들었다면 역사에 광인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세공사에게 넘기기 전에 제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드래곤 비늘로 만든 장신구와 드래곤 손톱으로 만든 검, 이왕이면 후자가 멋진 법이다.
한쪽에서는 마법 실험, 한쪽에서는 제과. 처음에는 이거 위생상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요즘 역사 시험은 전부 북방 위주네.”
“좋게 생각하도록 하죠. 아카데미가 아니면 어디서 북방 역사를 배우겠습니까.”
다행히 아카데미가 시험 기간에 돌입해서 실험과 제과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피했다. 만약 시험 기간이 아니었다면 부원들이 수업 중일 때만 실험을 했겠지.
“이론 시험은 번거롭기만 한데. 검사 입장에서는 실기 시험만 잘 보면 되지 않나?”
“맞는 말이군. 기사는 검으로 얘기하는 법이다.”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리히의 말에 류티스도 공감하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류티스의 앞에 놓인 공책은 첫 페이지에서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빌라르가 저 꼴을 보면 씁쓸해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손을 놓은 모습.
‘깡통 새끼.’
처참한 모습이다. 아무리 기사가 무력이 중요해도 기본적인 머리는 있어야지, 머리에 든 게 없는 칼잡이면 기사가 아니라 망나니 아니냐.
세라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에리히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차마 타국 왕자에게는 뭐라고 못하겠지만, 사랑하는 소꿉친구가 백치 기사로 전직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런데 에리히, 대련 상대는 정했나?”
심지어 류티스가 에리히에게 먼저 말을 걸자 세라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아니, 말 좀 건다고 지능이 옮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게다가 놀랍게도 류티스는 하는 짓이 괴랄한 거지 지능 자체는 의외로 양호한 편이다. 그 지능을 기행에 투자하는 것 같아 문제일 뿐.
아무튼 류티스의 질문에 에리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딱히 원하는 사람도 없으니 정해지는 대로 하려고.”
대련 상대를 수동이 아닌 자동에 맡기겠다는 말. 1학년 때는 학생들도 서로의 실력을 자세히 모르니 아카데미의 결정을 따르지만, 2학년이 되면 이미 알 건 다 아는 관계가 된다. 쟤가 나에 비하면 어느 정도로 약하고 강한지, 나와 동등한 놈은 누구인지 파악할 정도. 아카데미에서는 이 실력 파악도 능력의 일환으로 보는지 양자의 동의가 있다면 수동 지목도 인정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2학년이 되면 적절한 대련 상대를 찾기 위한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지만, 에리히는 실력에 자신 있는지 손을 놓았다. 크라시우스의 자신감이 보여서 이 형은 기쁘구나.
“너는 정했냐?”
“음, 바로 정했지.”
그리고 에리히의 역질문에 의외인 답이 돌아왔다. 자신감은 류티스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는데? 쟤가 눈치싸움까지 하면서 직접 상대를 지목했다고?
“샤를 올리드, 정말 뛰어난 실력의 기사더군. 올해도 그 친구와 붙고 싶어서 바로 신청했다!”
아.
그 말에 나는 물론 사정을 아는 몇몇 부원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잔인한 새끼, 하필 골라도 걔냐.
***
검술부 학생에게 있어 이론 시험보다는 실기 시험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에 원활하고 편안한 시험을 위해 대련 상대를 찾는 수고는 필수적.
물론 대놓고 하수인 상대를 고르는 건 지양해야 한다. 애초에 상대가 수락할지의 여부를 떠나서, 너무 노골적인 꼼수는 교사들의 눈에서 벗어나는 행동. 평가를 내리는 교사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편하게 가려다가 더 힘들어지는 수가 있다.
그래서 정말 신중하게 상대를 고르고 있었는데─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신중함이 독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론 시험을 준비하던 중 갑작스러운 검술부 수석 교사님의 호출에 놀랐지만, 호출 용건을 들으니 놀람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작위 귀족이기도 한 수석 교사님에게 반문을 하는 무례까지 저질렀고.
“류티스 학생이 실기 시험 대련 상대로 너를 지목했다.”
그럼에도 수석 교사님은 이해한다는 듯이 친절히 대답을 해줬다.
솔직히 지금 시점에서는 친절한 대답보다 화를 내며 농담이라고 해주기를 바랐다. 제발.
“저는 실력이 부족합니다. 류티스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반론을 했다.
그래, 나는 부족하다. 일개 학생이 기사왕국의 왕자와 상대할 수 있겠나? 이건 명백히 고수가 하수를 지목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성사되지 않는 것이 맞다.
“겸손이 과하군. 네가 부족하면 사람 노릇 하는 학생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러나 타당한 반론이 오히려 수석 교사님의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대련 상대인 당위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위성 같은 거 필요 없으니 말리라고. 내 선에서 없는 일로 하겠다 말하라고. 난 2년 연속으로 왕자하고 붙을 생각이 없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순간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어차피 왕자도 대련을 하기는 해야 하니, 괜히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것보다 경력자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안된다. 그건 안된다. 작년에도 정말 개처럼 구르지 않았나. 혹여나 왕족의 몸에 상처라도 날까, 빠른 패배를 노리는 것이 들키지는 않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었나. 운이 좋아서 들키지 않고 무난히 패배할 수 있었으나, 그 행운이 올해도 지속되라는 보장은 없다.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에리히나 지목할걸. 그러면 고수를 상대로 도전했다가 장렬히 패배했다는 점수라도 받을 텐데.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대련 상대는 신중히 정해야 하는 법이지. 좋은 결론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마.”
“예, 감사합니다.”
수석 교사님이 말하는 좋은 결론은 내가 순순히 수락하는 것일 터. 그런데 누군가 희생하는 결론이면 좋은 결론이 아니지 않나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석 교사놈, 아니 님의 호출을 다시 받았다. 아직 적당한 거절 명분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곤란하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대련자를 상대로 훌륭한 모습을 보이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다.”
심지어 점수를 미끼로 걸기도 했지만, 딱히 흥미가 가지는 않았다.
물론 수석 교사가 직접 점수 운운할 정도면 꽤 높은 점수를 주겠지. 정상적인 노력으로는 얻기 힘들 정도의 점수일 것이다.
“훌륭한 모습을 보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싫다. 차라리 점수를 덜 받고 안 하는 게 좋지.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군. 1년 동안 지켜본 선생으로서 장담하건데, 너라면 분명 좋은 모습을 보일 거다. 내 제자라고 소개하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야.”
그 말에 잠깐 움찔하고 말았다. 자신의 제자라고 소개한다는 것은 검술로 명망 높은 수석 교사님의 추천장을 받을 수 있다는 말.
…아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게다가 수석 교사님의 추천장이 있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없어도 큰 지장은 없다. 과욕을 부리다가 피를 볼 수는 없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 오히려 선생님의 명예를 더럽힐까 우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 건네는 수석 교사님. 거절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에 치가 떨리지만, 일단 보고 얘기하라는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다지 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아마 검술부의 다른 교사님들 추천장이겠지. 수석 교사 추천장에 다른 교사들 추천장도 얹어지면 검술부 전체가 인증하는 인재라는 뜻이니까.
그런데 검술부가 아닌 아카데미가 인증하더라도 하기 싫, 은데…?
‘꿈인가.’
수석 교사님이 건넨 종이 쪼가리를 보자마자 눈이 커지고 말았다. 추천장은 맞는데, 교사 명의의 추천장이 아니다.
딱 두 장인 추천장. 하지만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명의다.
‘감찰부장?’
우선 하나는 감찰부장. 사실 감찰부장에 대한 소문은 유명하다. 유능한 학생들은 감찰부장이 기억했다가 졸업과 동시에 끌고 간다는 전설 아닌 전설. 실제로 작년 학생회 간부들은 감찰부장의 인도로 시험 하나 없이 행정부나 군부에 입성했다.
솔직히 그런 소문을 듣고 기대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다. 수석 교사의 추천장은 단순히 검술계 유명인사의 보증이지만, 감찰부장은 현직 거물의 지지다. 그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류티스.’
감찰부장의 추천장을 받았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설마 류티스의 추천장까지 받을 줄이야.
공식적으로 타국 왕자의 추천장은 제국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공식 입장일 뿐, 제국 귀족이 타국 왕족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암묵적인 가산점이 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왕족도 인정했냐는 감탄이 붙겠지.
그 외에도 사교계에서 왕족과의 깊은 연을 과시할 수 있다. 내가 관료나 군인의 길을 꿈꾸지 않더라도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
‘…이 새끼.’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고작 대련 상대 요청을 하면서 추천장까지 썼다면, 내가 얼마나 이 악물며 대련을 피하고 싶어하는지 안다는 뜻 아닌가?
그럼 알면서도 지목한 건가? 내가 추천장을 받으면 다 잊고 좋아할 것 같아?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맞다. 과거의 나는 잊었다. 상대의 지목을 피하던 비겁한 나는 죽고, 당당히 도전을 받아들이는 기사만 남았다.
무상으로 구르는 것과 유상으로 구르는 건 다르지.
류티스 저하를 위해 영혼을 걸 각오로 임하겠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도착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기쁘게 지옥으로 향하고, 아는 사람들마저 길이 예쁜 걸 위안 삼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샤를이 지목을 받아들였다고 하더군. 역시 그 친구도 나와 다시 붙고 싶은 모양이야!”
“아니, 그─ 아니다.”
기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