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07)
카간이 남긴 상흔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내가 야매로 따라한 건 오죽하겠나. 애초에 상흔이 영구적으로 남는 거였으면 북방 하늘은 이미 마계처럼 변해 있었겠지. 아무리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끼치더라도, 자연은 스스로 회복하는 법이다.
게다가 옆에서 하늘 베기를 관람하던 관중 중에는 마종공도 있었다. 하늘 베기니 뭐니 해도 결국 마나를 활용한 기술이고, 마나가 접목되어 있다면 마종공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 덕분에 알아서 사라졌을 상흔은 더욱 빠르게 봉합되었다. 마종공이 아카데미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흔적 자체는 5분 만에 사라졌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보지는 못─”
“그만.”
단호한 황태자의 말에 입을 닫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친절하게 보내온 텔레포트 마법사,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문을 열어주는 호위 기사. 아주 간략화된 과정을 거쳐 마주한 황태자는 미간을 짚으며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대가리 박고 변명을 풀었다. 아무리 징계 스택이 초기화 상태라 두려울 것이 없다지만, 괜히 뻗대면 괘씸죄로 한 방에 근신까지 먹을 수 있다. 그건 피해야지.
“감찰부장.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지 않나.”
그러나 변명은 받지 않겠다는 말에 무심코 시선을 내리 깔았다.
솔직히 맞는 말이기는 해. 이미 하늘이 찢어졌는데 5초고 5분이고 무슨 상관이겠나. 칼날이 심장에 5초 동안 박혔든 5분 동안 박혔든 거기서 거기다.
그렇게 내 입을 닫은 황태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나마 아카데미 인근에는 주요 도시가 없어서 혼란이 적었네. 흔적이 관측된 지역에서도 그저 검은 무언가가 보였을 뿐, 하늘이 갈라졌다는 발상은 못했더군.”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하늘에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고 ‘아, 하늘이 갈라졌구나.’ 라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냥 이상한 무언가가 나타났구나─ 싶지. 직접 검을 휘두른 것을 본 게 아닌 이상 하늘이 찢어졌다는 발상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제도의 하늘이 검게 변했다면 흉조이나, 아카데미의 하늘이 변했다면 단순한 마법이나 실험의 여파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네. 마침 마종공이 있었으니 더욱 그렇지.”
심지어 이상 증세가 보인 곳은 아카데미, 그것도 마법의 정점인 마종공이 있는 곳. 황태자의 말처럼 또 마법사들이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고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
‘…별일 아니네?’
그리고 황태자의 말을 듣고 나니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거 적당한 훈계 정도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
내가 하늘을 찢은 건 맞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한 미친놈의 기행이 아닌 마법사들의 일상적인 실수로 여기고 있다. 물론 하늘에 검은 흔적이 남은 건 단순히 실수로 생길 일이 아니나, 적어도 검으로 베였다는 결론보다는 마법의 여파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즉, 범죄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피해자는 없고 목격자도 없는 기묘한 상황.
‘살았다.’
피해자가 없다면 훈계, 최대치가 시말서─
“하지만 전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세.”
아.
급격한 드리프트에 희망감도 급속도로 고개를 숙였다.
“어제부터 끊이지 않고 보고서가 올라왔지. 역천자의 잔재가 나타났다, 가아르의 망령이 돌아왔다, 온갖 흉흉한 말이 나오더군.”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다시 한숨과 함께 한 무더기의 서류를 나한테 건넸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을 보니 집어던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집어던지기 전에 서류 더미를 받아 확인하니, 다급함과 혼란이 느껴지는 문장이 여과 없이 눈에 들어왔다.
[ 아카데미 상공에 멸세의 흔적 관측. ]
[ 멸세를 흉내 낼 수 있었던 인물은 제국군과 유목민 세력을 통틀어도 극소수. 그중 현재까지 생존 중인 것은 감찰부장과 우데스르 도르곤뿐. ]
[ 도주 중인 우데스르 도르곤이 휘하 유목민에게 멸세를 가르쳐 제국에 침투시켰을 가능성 존재. ]
마치 발작 버튼이 눌린 것처럼 부정적 추측이 난무하는 보고서. 상황 설명보다 뇌피셜로 가득한데, 이거 보고서라고 봐도 되나.
아무튼 요한묵시록이나 다름없는 내용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대토벌 전쟁에 참전한 지휘관과 병사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 한 명이라도 승진, 부대 이동, 전역 등, 무슨 명목으로든 아카데미 인근이나 근처 영지에 있었다면 바로 눈치챘겠지. 멸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니까.
아니, 그것보다 뭔가 이상하다. 보고서에도 감찰부장이 멸세의 흉내를 낼 수 있다고 적혀있는데, 왜 내가 했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지? 도르곤이 간첩을 침투시켰을 확률보다 내가 했을 확률이 더 높지 않나?
[ 제국 최고 교육 기관이자 귀족 자제들이 모인 제국 아카데미에서 무력 도발을 일으킨 것은 명백한 천명을 향한 도전. ]
[ 타국 주요 인사까지 재학 중인 상황에서 감찰부장이 아카데미의 동요를 야기할 확률은 적으니 우데스르 도르곤의─ ]
의아한 마음에 다시 내용을 읽었다가 도로 눈을 감고 말았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상식적으로 아카데미를 지켜야 할 새끼가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카간이 쓰던 기술을 날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어떻게 생각하나?”
담담한 황태자의 말이 마치 ‘널 죽여버릴 것이다.’ 처럼 들렸다.
‘시발.’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라 한 번만 봐달라고도 못하겠네.
***
역시 감찰부장은 충신이다.
혹시 내가 업무에 시달려서 피로에 찌들지는 않을까, 반복되는 일상에 따분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우려하여 이런 대형 사건을 터뜨리지 않나. 감찰부장의 깜짝 선물을 받을 때마다 피로와 따분함은 확 가시니 이런 충신이 없다. 세상에 둘도 없는, 둘이 있으면 절대 안 될 충신이다.
‘…나이를 먹으면 좀 달라질까.’
제국 남부를 중심으로 비명을 지르듯 올라온 보고서들. 그 처참한 실체를 직접 읽은 감찰부장은 죄인처럼─ 아니, 죄인 맞구나. 아무튼 죄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못난 모습이다. 감찰부장은 차마 버릴 수 없는 신하니 깜짝 선물을 주든 끔찍 선물을 주든 품고 가야 하는데, 제발 40, 50대가 되면 자중해 줬으면 한다. 그때도 이런 사고를 터뜨리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생각하나?”
“소신의 경솔함으로 전하께 큰 근심을 드렸으니 어찌 할 말이 있겠습니까.”
더 열받는다. 차라리 뻔뻔하게 나오면 괘씸죄를 포함한 징계라도 내릴 텐데, 본인이 사고를 친 걸 알면 바로 고개를 숙여서 더 화를 내기도 애매해진다. 하여간 이상한 처세술만 익혀서.
그래도 감찰부장이 철저히 숙이고 있으니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시킬 수 있다.
“남부 방면군 사령관의 보고에 따르면 마법사들은 일제히 경악했다더군. 마법사들이니만큼 마법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건 바로 눈치챈 모양이야.”
그 말에 감찰부장의 고개가 더더욱 숙여졌다.
“그렇다면 아카데미에 있는 마법사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본인들 가문이나 조국에 어제 일을 말하면─ 대륙에 퍼지는 건 금방이군.”
“소신이 경솔하여…”
“행동을 말로 수습하는 건 비겁한 행동이지. 그렇지 않나?”
“…예, 전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감찰부장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겨우 말을 내뱉었다.
됐다. 이걸로 감찰부장은 무슨 결과가 나오든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황실이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네. 감찰부장의 검격으로 하늘이 갈라졌고, 이는 마종공이 증명할 수 있다고.”
황실은 수습이 아니라 확산을 택할 것이다.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일이라면, 애초에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라면 황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 이득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감찰부장의 우발적 행동이 아닌 황실의 지시와 관여가 있던 일로 변한다.
감찰부장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정진하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하여 감찰부장이 친히 검의 끝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다소 과한 감이 없잖아 있으나, 그만큼 미래를 생각하는 감찰부장의 마음이니 갸륵한 것이지.”
“과찬이십니다, 전하.”
감찰부장의 빠른 대답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길게 말하기에는 아직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이 정도만 말해도 감찰부장은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제 기사들이 올 차례다.’
마종공이 아카데미 파견 강사가 되면서 제국은 유무형의 이득을 얻었다. 마법의 끝에 이른 마법사를 직접 보고자, 가르침 한 구절이라도 듣고자 몰린 마법사들. 그리고 원활한 입국과 활동을 위해, 입학을 위해 몰린 청탁과 그에 걸맞는 대가.
처음 마종공이 아카데미행을 결정했을 때는 헛웃음만 나왔으나 정작 아카데미 상주를 시작하니 긍정적인 일만 생겼다. 이렇게 단맛을 봤으니 다른 활용법을 찾는 건 당연한 일.
그런 와중에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감찰부장이 검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역천자의 기술을 흉내 낸 수준이고 역천자의 아들도 쓸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않나.
‘마종에 이어 검종인가.’
검으로 하늘을 가르는 경지에 이른 무인. 이 소문이 퍼지면 마종공 때와 맞먹는 소란이 생길 터.
‘기대되는군.’
마종공 때는 유벤 연합왕국의 에르네스토 아카데미가 고개를 숙였다. 마도강국이라 자부하던 자들이 제국 앞에 굴복한 것. 허면 이번에는 기사왕국인 아르메인이 굴복할 차례지 않겠나.
아르메인은 기회가 올 때마다 무릎을 꿇려야 한다. 제국과 국경을 접한 국가이자 제국의 뒤를 이은 강국. 거기다 기사왕국이라 으스대는 꼴이 얼마나 같잖던지.
그러나 이제 아르메인의 자부심도 끝났다. 기사왕국? 그래서 아르메인에는 하늘을 벨 수 있는 무인이 있는가? 압도적 1인자가 있는 마법계에 비해 무인들의 서열은 복잡했으나,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감찰부장이 1인자다.
***
살았다.
황태자가 보고서를 꺼내들 때는 최소 근신, 최악은 그 이상을 각오했는데 다행히 아무런 징계 없이 끝났다.
“정진하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하여 감찰부장이 친히 검의 끝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 누가 봐도 추가 업무를 강요하는 말이 나왔지만 괜찮다. 근신, 구금보다는 그냥 귀찮은 게 낫지.
게다가 마종공이 자기 편한 대로 가르침을 주는 것처럼 나도 열성적인 선생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개학 시즌과 맞물려서 사람이 몰렸던 마종공 때와 달리, 나는 학기 중이라 갑자기 가르침을 청하는 외부인들이 대륙에서 몰려오지는 않을 거다.
‘…하늘을 베서 다행이다.’
만약 하늘이 아니라 애매하게 아카데미를 벤 거라면 징계로 끝났겠지.
역시 미친 짓을 할 거면 본격적으로 하는 게 맞다. 두 번 할 짓은 아니지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가정에 누를 끼친 죄인이로소이다…
“저도 바렌티의 일원으로서 검을 배우기는 했지만, 칼처럼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어요. 그러니 제가 모르는 무인들의 생리가 있을 수도 있죠.”
의자에 앉아 조곤조곤 말을 잇는 마르게타. 그러나 부드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내 고개는 점점 숙여졌다.
지금 부드럽게 말한다고 마르게타의 화가 풀린 것은 아니다. 비록 황태자에게 소환당하기 전에 패닉에 빠진 연인들을 달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을 달랜 것에 불과하니까. 원래 분노 같은 감정은 황망함 이후에 찾아오는 법 아니겠나.
그러니 이 타이밍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한다면 그대로 마르게타의 귀싸대기와 접견할지도 모른다. 맞아도 아프지는 않겠지만 정신적으로 사망할 거다.
“하지만 칼.”
살며시 의자에서 내려온 마르게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칼은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요.”
내 손을 쥐고 잠시 말이 없던 마르게타는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다. 그 물기 섞인 목소리에 죄책감이 미친 듯이 자극된 것은 당연한 일.
“내년이면 저도 아카데미를 졸업해요. 그러면, 그러면 칼하고 결혼도 할 테고… 아기… 도 가질 테고…”
그 말에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는 계속 숙이고 있어서 헷갈리지만 위치상 루이제 같다.
“그러니 칼이 몸을 소중히 여겼으면 하는 건, 제 욕심일까요?”
“아닙니다, 전혀요.”
황급히 고개를 올리자 처연하게 미소 짓고 있는 마르게타가 보였다.
미치겠다. 황태자에게 살아돌아왔을 때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차라리 징계를 받는 게 마음 편했을 거다. 분명 화가 났을 상대가 호통보다 애절함으로 압박하니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버틸 수가 없다.
“이번에는 나도 한 마디 해야겠구나.”
첫 부인(진)의 뒤를 이어 입을 연 것은 둘째 부인(진). 심지어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듬는 편인 마종공이 드물게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가. 만약 사제가 없었다면 어쩌려고 그랬니.”
그리고 핵심을 관통하는 말에 다시 고개를 숙였─
“고개 들렴. 우리는 아가를 추궁하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묻는 거란다.”
도로 들고 말았다.
“게다가 평범한 사제면 팔이 잘린 걸 바로 치료하지 못한단다. 다행히 차기 성자가 있어서 망정이었지, 잘못했으면 며칠 동안 외팔이로 지내야 했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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