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09)
“검만 휘두른 작은 일에 감사를 받으니 민망하군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감찰관님께 다시 작은 일을 부탁해도 될는지요?”
“이런, 그건 좀 곤란합니다.”
수석 교사의 농담에 마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앵콜쇼는 안 된다. 그걸 했다가는 부탁한 사람이 마종공의 분노를 온몸으로 겪을 테니 더더욱.
수석 교사가 경쟁 파벌에게 항복 연락을 받았다는 것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제국인의 경쟁 파벌이면 어딘지는 뻔하잖아.
“아르메인에서,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빌라르를 보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마 제국 아카데미 방문을 추진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제국 아카데미의 협조와 당사자인 감찰관님의 동의가 먼저입니다만은…”
드물게 말꼬리를 흐리는 빌라르. 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에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해한다. 빌라르도 어디까지나 본국의 의사를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하다. 메신저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그 뒤에 있는 본체가 문제인 것을.
‘빠르네.’
그리고 각오한 상황이기에 충격은 덜했다.
마종공의 아카데미 상주 소식을 들은 대륙 마법사들의 반응, 박람회 때 아카데미에 우르르 몰려온 에르네스토 아카데미 학생들. 그 꼴을 보고도 지금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머리가 없는 거다. 아르메인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거라는 건 진작에 상수였다.
그냥 예상보다 너무 빨라서 문제지. 류티스 새끼 조국 아니랄까 봐 행동력이 장난 아니다.
‘로벤스 아카데미라.’
아무튼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에 이어 제국 아카데미 관광을 희망하는 곳은 로벤스 아카데미. 무려 아르메인 왕가의 이름을 붙여 설립된 아카데미다. 그만큼 아르메인에서의 상징성은 압도적.
그리고 수석 교사에게 항복 선언을 한 경쟁 파벌의 거물이 로벤스 아카데미의 현직 교감이다. 어쩐지 너무 빠르게 대가리 박는다 싶었는데, 제국 아카데미에 올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그런 거였나.
“배움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심지어 정당한 요청이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어쨌든 로벤스 아카데미가 제국 아카데미에 숙이고 들어오는 건 긍정적인 신호다. 다른 곳도 아닌 아르메인 왕가의 이름을 받은 아카데미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제국 아카데미에 온다? 누가 봐도 제국의 승리와 천명을 공인하는 꼴 아닌가. 틈만 나면 아르메인을 무릎 꿇리려는 제국 입장에서 이보다 호재는 없다.
뭐, 그걸 아는 아르메인에서도 로벤스 아카데미를 제국에 보내겠다는 말을 한 걸 보면 하늘 베기가 인상적이기는 한 것 같고.
“교장에게는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아르메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찰관님.”
내 빠른 대답에 빌라르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뭘, 내가 더 감사하지. 내가 귀찮은 것만 빼면 아무튼 제국이 이득인데.
단지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장차 아르메인의 동량이 될 학생들이 하늘 위의 경지를 본다면 더욱 정진할 것입니다.”
“하하, 이거 제가 힘 좀 써야겠군요.”
다른 곳도 아닌 아르메인에서 빠르게 대가리를 박는 성의를 보였다면 제국도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
쉽게 요약하면 또 하늘을 가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야 한다.
‘어쩌지 이거.’
하지 않는 건 애초에 선택지에 없다. 아르메인의 항복 과정은 제국 무인이 하늘을 베는 걸 봄으로서 완성되는 거니까. 만약 제국 아카데미까지 왔는데 아무런 퍼포먼스가 없다면 제국이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의심할 가능성이 크다.
솔직히 나라도 의심할 것 같기는 해. 자국 무인이 하늘도 베는 놈이면 자랑하려고 안달이 났을 텐데 꽁꽁 숨긴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
그러니 로벤스 아카데미 학생들이 오면 다시 멸세를 시전해야 한다. 그것이 황태자가 바라고, 제국 아카데미가 바라고, 아르메인이 바라고,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
‘…어떻게 설득하지?’
그저 그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산이 좀 높다.
마침 마종공이 수업을 마치고 복귀해서 슬쩍 입을 열었다. 넷을 동시에 설득하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먼저 포섭하는 게 편하니까. 게다가 마종공이 반대에서 지지로 돌변하면 다른 셋을 설득하는 것도 수월해진다.
“절대 안 돼!”
물론 돌아오는 답은 단호했다.
“아가, 마르가 했던 말을 잊었니? 이제 아가의 몸은 아가만의 것이 아니란다.”
단호한 외침에 이은 간절한 호소. 환상적인 강약 조절에 말을 꺼낸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죄인 맞구나.
“그래, 치료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상처가 사라지면 다쳤던 게 없던 일이 되니? 그걸 지켜보는 우리 심정은 어떻고.”
어느새 내 손을 감싸 쥔 마종공은 떨리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가는 우리가 다쳐도 고칠 수만 있다면 상관없는 거니?”
“그럴 리가.”
끔찍한 질문이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마종공의 말처럼 상처를 치료했다고 고통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오죽하면 쇼크사라는 개념까지 있겠나.
그렇기에 더욱 문제다. 논리가 완벽해서 도저히 반박할 말이 없다. 이성으로 따지든 감정에 호소하든 마종공을 이길 수는 없다.
“그래도 아르메인에서 제국까지 오는 건데, 그 성의를 봐서라도─”
“아가가 초대한 거니?”
“그건 아닌데…”
내가 미쳤다고 외국 놈들을 안방까지 초대하겠어. 같은 제국인도 꼴 보기 싫은 것들 많은데.
“…아무래도 아가가 무거운 짐을 진 것 같구나.”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은 마종공은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마종공 정도 되는 경력자라면 황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터. 그런 상황에서 무거운 짐 운운하는 걸 보니 황실에 찾아가 갈아엎을 기세다.
사실 보고 싶기는 하다. 황태자가 마종공에게 멱살이 잡혀 추수철 곡식 털 듯 흔들린다면 장관이기는 하잖아. 하지만 아르메인이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사안이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거고, 그러면 더 이상 황태자만 쥐잡듯이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겨우 이런 문제로 황제와 공작이 충돌하면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흑역사 아닌가.
결정적으로 난 이미 입금이 된 상태다. 아카데미에서 무게 잡고 헛기침 하는 대가로 징계를 면한 상태. 여기서 ‘저 못 하겠는데용?’ 이라며 태세전환을 하면 괘씸죄가 포함한 징계가 찾아온다.
‘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제법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다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으, 으응?”
한 마디만 더 하면 제도로 날아갈 것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던 마종공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법 중에는 신체 강화도 있잖아. 타니안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성법은 회복이나 강화 등, 생존에 특화된 기술이다. 실제로 사제들은 전투 전에는 병사들의 강화, 전투 후에는 치료에 전념하지 않던가. 차기 성자인 타니안의 강화라면 굶어죽어가는 빈민도 천하장사의 육체를 가지게 될 거다.
“…몸만 멀쩡하다면야…”
마종공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한결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다치지만 않으면 예비 남편이 무력을 과시하는 건데 말릴 필요가 없지. 오히려 자랑스러워할 일이다.
“강화요? 물론 가능합니다.”
그리고 동아리 시간, 타니안의 확답을 들을 수 있었다.
“치료보다 먼저 배우는 것이 강화 성법입니다. 저도 강화에 더 자신이 있는 편이지요.”
“잘됐군.”
오늘부터 타니안 코인 탄다.
무난한 날이었다. 평소처럼 류티스 저하의 일정을 살피고, 아국 전력을 점검하고, 유벤, 신성교국 측과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류티스 저하의 아카데미 입학 이후로 매일 반복하는 일정. 그렇기에 특별할 것 없는 날이었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그날은 실기 시험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것. 그마저도 작년의 경험이 있으니 크게 긴장할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류티스 저하는 샤를 올리드라는 학생과 훌륭한 대련 끝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셨으니.
아무 문제 없던 호위, 저하의 만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오늘만 같았으면 싶은 그런 날이었다.
“…….”
분명 그러했다.
하늘이 갈라지기 전까지는. 기이한 마나 증폭과 함께,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푸른 하늘이 갈라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웠다. 그때 이 감정을 고작 당혹이라고 표현해도 옳은가 싶지만, 그보다 확실한 표현은 없다. 오히려 장황하게 표현할수록 그때의 감정이 옅어질 것 같다.
하늘을 모욕하는 듯한 흉측한 상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 상흔을 우상에 홀린 이교도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검사에게 있어 그 상흔은 우상 따위가 아닌 신의 인도나 다름없는 성흔이었다.
그것이 검으로 낸 흔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헛소리를 한다고 혀를 찰 것이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검으로 이룩한 위업이라고.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하늘이 다시 아물기 전까지 나는 물론, 근처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빌라르 경.”
“그래.”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기사. 그 기사의 말을 전부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국에 보고하라.”
이 일은 고작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헛소리를 한다는 구박을 받더라도 반드시 본국에 보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숙소 근처의 연무장에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페로사.”
“아, 아버지.”
그 기사들 중에는 페로사도 있었다. 페로사도 그 흔적을 보고 좌절보다는 호승심을 느꼈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던지. 장차 크게 될 아이라는 생각에 아비로서 흐뭇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흐뭇함을 뒤덮을 소식이 들려왔다.
“감찰관이 말입니까?”
– 그래.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더군. 황제가 나선 것은 아니나 황태자의 발언이니 확실하지.
본국에 있는 왕실 기사단장의 연락. 넋이 나간 듯한 단장의 표정을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지만,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저번 사태가 인간의 행위라고 인정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1년 전부터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감찰관의 행동이라고 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 …덕분에 로벤스 아카데미도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의 뒤를 따를 것 같네.
그 말에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인의 기사로서 달갑지 않은 소식이니까. 로벤스 아카데미는 아르메인의 자긍심, 그 자긍심이 제국의 우위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 그리고 관료 놈들도 발칵 뒤집어졌지. 대북방 전쟁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게 밝혀졌으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종전 직후, 허술해진 제국의 방첩망을 뚫고 아르메인이 입수한 기록 중에는 ‘카간의 검격에 하늘이 찢어지고 대지가 울부짖었다.’ 라는 기록이 있었으니.
하지만 그런 걸 보면 보통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관료들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일 거다.
– 게다가 갑자기 제국이 무력을 과시한 것에 대해 군부도 위기감을 느꼈네.
이어지는 말에는 절로 표정이 굳고 말았다. 확실히 이 시기에 무력을 과시하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만약 아카데에 상주 중인 삼국 전력에 대한 경고라면 작년에 하는 게 옳았다. 이미 원활한 관계를 수립한 현 시점에서 삼국을 자극하는 건 제국에게도 손해 아닌가.
– 의견이 아주 분분해. 단순히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제국백 가문인 감찰부장을 내세웠다는 말도 있고, 제레노 왕국을 완전히 눌러서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의견도 있지. 혹은 레온 왕국을 향한 동진, 아국을 향한 압박, 북방 정복. 별 얘기가 다 나오더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단장이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니까.
갑작스러운 무력 과시. 그것도 류티스 저하를 포함한 삼국 인사의 입학과 마종공에 홀린 마법사들의 대거 입학으로 대륙의 시선이 아카데미에 쏠렸을 때, 아카데미 상공에서 벌어진 하늘 베기.
이걸 우연이라고 보는 게 옳을까, 아니면 계획적인 선언이라고 보는 게 옳을까.
– 로벤스 아카데미가 제국 아카데미에 가는 건 배움을 위해서만은 아니지. 알아두게.
“…명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