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10)
그 말이면 충분했다. 아르메인은 혹시 모를 제국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잠시 숙일 것이니,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나는 제국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라는 지시. 일개 기사에게는 너무 막중한 임무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적어도 아르메인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감찰관은 곧 침공할 국가의 인사를 앞에 두고 태연할 인물이 아니다. 확실히 선을 긋거나, 아니면 대놓고 도발을 했을 성격. 적어도 내가 본 감찰관은 그랬다.
‘만일 그 성격이 철저히 연기라면─’
적어도 류티스 저하가 입학하기 전부터 침공을 준비했다는 것.
…끔찍한 가능성이다.
***
타니안 코인 풀매수 메타에 돌입한 후로는 열성적인 설득 작업을 시작했다.
타니안의 회복 성법은 잘린 사지도 금방 붙일 정도인데 오히려 강화 성법이 특기라더라, 그러면 애초에 다치지도 않고 하늘을 벨 수 있지 않겠냐, 황태자가 친히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했는데 어찌 거절하겠냐 등. 정말 온갖 명분을 동원하여 입을 놀렸다.
“…좋아요. 그렇다면 한 번, 이번 한 번은 넘어갈게요.”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마르.”
다행히 내 절절한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건지, 아니면 육체 안전이 보장되어서 그런지 마르게타를 포함하여 전원 설득에 성공했다. 솔직히 후자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크겠지만 목적만 이루면 되는 거지.
아무튼 타니안 코인에 힘입어 원정 구경까지 온 관중 앞에서 노쇼를 하는 건 피했다.
“로벤스 아카데미는 언제라도 올 준비가 되어있다고 합니다. 허락만 해준다면 바로 텔레포트로 오겠다더군요.”
“훌륭한 열정입니다. 배우고자 함에 망설임이 없다니, 아무리 타국의 교육 기관이라도 본받을만한 점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설득에 성공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교장 입장에서는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에 이어 로벤스 아카데미의 항복도 받는 꼴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마 제국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장으로 남지 않을까.
“이 늙은이의 지루한 말년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자주 생겨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역시 감찰부장의 덕이겠지요.”
“별말씀을. 제 덕분이라기보다는 교장이 쌓아온 덕일 겁니다.”
“허허, 그거 민망한 말이로군요.”
그 증거로 교장은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대화를 이었다. 난데없이 아카데미 상공이 갈라져서 당혹감이나 우려를 표할 만도 한데, 그런 발언은 없이 부드러이 고개만 끄덕일 뿐.
이게 로벤스 아카데미의 항복으로 마음이 너그러워진 건지, 아니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래저래 시달려서 해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교장의 말처럼 말년이 꼬이는 대신 활력으로 가득하다면 호재 아닌가.
뒤틀린 호재 같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교장의 승인이 떨어지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 로벤스 아카데미는 제국 아카데미에 공식 방문했다. 애초에 박람회를 노리고 돌격한 에르네스토 아카데미와 달리 로벤스 아카데미는 우발적으로 돌진한 거니 당연한 일이지만.
“로벤스 아카데미의 교감 나르체 요하임입니다. 교장께서도 직접 오고 싶어 하셨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우발적인 방문이라고 방문객의 격이 낮은 것은 아니다. 비록 교장이 직접 온 것은 아니나, 검술계에서는 교장보다 명망 높은 교감이 직접 방문하여 교장의 불참에 양해를 바란다는 말을 할 정도. 이 정도면 로벤스 아카데미가 보일 성의는 충분히 보였다.
“교장께서 직접 오셨다면 저희가 감사할 일이지, 어찌 뵙지 못한 것에 서운함을 표하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기에 교감의 방문에 제국 아카데미는 교장이 직접 나서는 의전을 보였고, 한 단계 높은 인사의 접견에 로벤스 아카데미 측도 그럭저럭 만족한 모양이었다.
물론 100% 만족하는 건 하늘이 갈라지는 걸 두 눈으로 본 이후겠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의전이 무슨 소용이야.
“혹시, 옆에 계신 분이 감찰부장님 되십니까?”
그렇게 교장에 이어 교감과도 인사를 나눈 나르체 요하임은 옆에 있던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예, 맞습니다.”
“감찰부장님께 과분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광으로 생각하며 오늘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나르체 요하임의 모습에 약간 아찔한 감정마저 들었다.
지금은 자존심을 배제하며 철저히 엎드리고 있지만, 만약 이번에 하늘 베기를 보여주지 못했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자존심을 버린 대가가 노쇼라면 누구라도 미치지.
고맙다, 타니안… 네가 제국과 아르메인 관계를 살렸어…
***
감찰부장은 바로 하늘을 베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학생들을 연무장으로 인도했다.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닌데 질질 끄는 건 먼 길을 온 학생들에게 도리가 아니지요. 원하는 것을 보고 푹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로서는 기꺼운 말이다. 아카데미의 일정을 억지로 조율하고 제국에 온 상황이라, 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여파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이미 교감으로서 업무에 치이고 있는 상황인데 더 치일 수는 없다.
그러니 감찰부장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첫날부터 용무를 달성했다면 최대한 빠르게 본국으로 복귀할 수 있으니.
‘…많군.’
그 와중에 이미 소문이 퍼졌는지, 감찰부장을 따라 도착한 연무장에는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로서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경험일 테니 이해한다.
그저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 사이에 류티스 저하가 계신 것이 오묘할 뿐.
‘저하…’
아르메인의 자긍심이 제국 아카데미에 고개를 숙이는 장소에 아르메인의 왕족이 있는 기묘한 상황. 그 기묘함을 느끼며 살짝 쓴웃음을 짓는 사이, 백발의 청년이 감찰부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청년과 감찰부장을 중심으로 밝은 흰색 빛이 일렁이는 걸 보면 성법일 터. 아마 저 청년이 차기 성자인 타니안 에네스인 모양이다.
그 뒤로도 차기 성자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감찰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에 술렁거리던 연무장에 일제히 침묵이 감돌았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겠다는 듯 그 많은 사람들이 움직임조차 멈췄다.
그 사이에서 움직일 자격이 있는 건 오직 감찰부장뿐.
‘허.’
그리고 부끄럽지만 감찰부장이 검을 든 순간부터 감탄하고 말았다. 무인에게 기본이란 무엇보다 중요하며, 기본이 얼마나 충실한지는 자세만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감찰부장의 자세는 완벽했다. 간단한 준비 동작임에도 흠을 찾아볼 수 없었고 발을 앞으로 내딛는 자세, 팔을 내미는 자세마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런 완벽을 얻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을까.
그래, 하늘을 베는 위업을 달성한 것도 저렇게 튼튼한 기본이 있어야─?
‘무슨.’
감탄은 순식간에 경악으로 돌변했다. 느릿하게 검을 움직이던 감찰부장의 심장에서 흉폭한 마나 순환이 이루어지더니, 그 마나는 감찰부장의 오른쪽 가슴으로 이동하여 폭발했으며, 폭발한 마나는 마치 집어삼키듯 감찰부장의 오른팔과 검에 퍼졌다.
비정상적인 마나 순환. 어쭙잖게 따라 했다가는 그 순간 심장이 터졌을 정신 나간 운용법.
그 미친 마나 순환을 느낄 수 있는 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벌리며 광인을 지켜 봤고─
– ■■■■■■■■■──!!!
광인의 위업이 하늘에 펼쳐졌다.
‘하.’
아까 감찰부장의 자세를 볼 때와는 다른 의미의 탄성이 나왔다.
푸른 하늘을 모욕하듯 흉측하게 자리 잡은 검은색의 흉터. 하늘을 삼켜 새로운 하늘이 되겠다는 듯 점점 벌어지는 상흔.
‘…악신인가.’
여명 교단의 성서에는 대륙 북부에 에넨에게 대항했던 악신들이 봉인되어 있다고 한다.
그 악신들을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세상에 나타난다면 지금 감찰부장처럼 하늘을 찢고 모욕하지 않을까?
***
큰일 났다. 믿었던 강화 성법에 배신당하고 말았다.
일단 팔은 멀쩡하다. 겉으로는 멀쩡히 붙어있고, 저번처럼 뜯어져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참사는 피했다.
‘안에서 터졌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겉만 멀쩡했다. 타니안이 팔은 제대로 강화했는지 외견은 유지했으나, 피부 아래의 근육이나 신경, 뼈는 완전히 작살이 난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게 어디냐. 이번에는 다치지 않았다고 우길 수 있다. 아무튼 보기에는 이상 없으니까. 팔이 안 올라가는 건 갑자기 힘을 써서 욱신거린다고 하면 되는 거고.
치료는 다들 물러난 뒤에 타니안에게 슬쩍 부탁하면 되겠지.
‘시발.’
…들키면 끝이다.
내가 쓰는 하늘 베기는 카간의 원본보다 약한 다운그레이드 버전. 그마저도 카간에게 칼빵을 당한 이후로 쓸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마종공의 포션 덕분에 여차저차 재현은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재현도 하늘을 벤다는 결과만 봤을 때 완벽하지, 위력 면에서는 아직도 부족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전쟁 때 썼던 위력을 재현하면 팔이 아닌 몸이 터질 수도 있다. 신체 내부의 마나를 무리하게 증폭하는 것이 하늘 베기의 시작인데 마나를 건드리자마자 몸의 상처도 맹렬하게 반응하더라. 마종공의 포션을 복용했더라도 상처의 존재감을 억누를 뿐, 없는 걸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상처가 난 몸통이 아닌 팔을 중심으로 마나를 움직이며 위력을 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이 끊어진 건 유감이지만.
‘할만한데?’
그래도 팔이 무리했으니 팔이 끊어진다는 직관적인 결과. 그렇다면 팔만 튼튼해지면 버틸 수 있는 거 아닐까? 팔이 멀쩡하면 몇 번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 거 아닐까?
‘개뿔.’
그 단순한 생각의 결과가 이거다.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안에서 터졌다.
“허, 차라리 끊어지는 게 좋았을 것 같군요.”
슬그머니 다가오는 나를 의아하게 보던 타니안도 내 팔 상태를 확인하더니 탄식을 내뱉었다.
“팔이 겉으로도 터졌다면 화력이 분산됐을 겁니다. 그런데 팔 내부에 갇혀 폭발이 일어났으니, 그 강도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요.”
덤덤한 진단에 조금 씁쓸해졌다. 내 팔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작살이 났는지 알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고칠 수는 있는 거고?”
“예, 다행히 치료에는 문제 없습니다.”
그 장담에 걸맞게 타니안이 기도문을 읊자마자 오른팔에 감각이 돌아왔다.
확실한 치료와 그렇지 못한 강화. 혹시 타니안이 고의로 강화를 약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할 수 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형제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민망하지만, 하늘을 가른 선례가 존재하지 않기에 제 강화가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애초에 상식 밖의 상황이라 예측을 할 수가 없고요.”
사실 타니안은 미리 경고를 했었다. 일단 강화는 써주겠는데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경고. 선례가 없으니 확신할 수 없다는 지극히 타당한 경고지만 그럼에도 강행한 건 나였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타니안을 탓하는 건 많이 추하잖아.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번 하늘 베기는 정말 상처 하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
타니안의 강화 성법. 다르게 말하면 에넨의 총애를 듬뿍 받는 차기 성자의 은총.
그 성법이 몸에 깃들자 카간이 남긴 상처, 정확히는 상처에 남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기운이 억눌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제가 아닌 나조차 ‘아, 이거 억눌렸구나.’ 라고 본능적으로 느낄 정도의 확연한 격차였지. 덕분에 ‘이 정도면 조금 더 강하게 운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미친 호승심도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했다. 결과는 이 지경이고. 전보다 강하게 힘을 끌어올렸으니 팔이 버틸 수가 있나.
‘강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전에 썼던 하늘 베기보다는 확실히 위력이 강했다.
일단 크기부터 저번보다 컸고, 상흔이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기는커녕 근처 하늘을 잡아먹듯 서서히 커졌다. 물론 어느 정도 커지다가 도로 작아지기는 했지만 저번에 만든 상흔은 커지지도 않았지. 누가 봐도 위력이 강해진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차이였다.
“…아가? 저번보다 더 강해진 것 같구나.”
“강화 성법 받았잖아. 아무래도 힘이 더 들어가서 그런 것 같아.”
덕분에 마종공에게 의심의 눈빛을 받기도 했다. 만약 그때 팔이 내부에서 터진 걸 들켰다면 주저앉아 통곡하는 마종공을 보지 않았을까? 그 뒤로는 이게 다 너희 때문이라며 아르메인 학생들에게 헬파이어를 날리는 마종공을 봤겠지. 끔찍한 일이다.
“강화 성법을 받았는데도 이 정도면… 앞으로는 쓰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와중에 타니안의 진지한 제안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