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12)
과장되게 흥흥 콧방귀를 뀐 1과장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엔딩 때 그런 애도 있었지─ 같은 일은 없게…”
– 아아-니! 왜 그런 건 잘 기억하냐고요!”
그걸 듣고 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아무튼 4과장하고 연락이 닿으면 안부 인사 좀 전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통신을 마쳤다. 4과장은 그새 북방으로 갔는지 연락이 안 되더라. 빨리 도르곤이 죽어야 4과장도 좀 쉴 텐데.
황태자의 말처럼 아카데미에 온 손님들의 관리는 교장이 맡았다. 내 역할은 하늘을 베는 걸로 끝났고, 감찰관이 손님을 대접하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니 당연한 일.
그 와중에 로벤스 아카데미도 나름 견학 목적으로 온 것이기에 형식상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경우에는 검술부 수석 교사가 무난히 상대했다. 로벤스 아카데미 교감이 경쟁 파벌 인물이라 그런지 여러 의미로 열을 다해서 처리하더라. 본인의 업무 만족도가 최상인 것 같기에 그러려니 했다.
“마르, 저 왔습니다.”
그리고 교장과 수석 교사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사이, 나는 학생회장실에 뿌리를 박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로벤스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내가 동아리실 지박령인 게 퍼졌는지, 몇몇 용감한 것들은 동아리실까지 찾아오더라. 내 작고 소중한 자유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당한 곳으로 피신할 필요가 있었다. 쉬고 있는 공무원을 건드리는 건 죄악이야.
“어서 와요. 오늘도 도망 온 건가요?”
“도망이라뇨. 마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죠.”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미소 짓는 마르게타를 보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물론 학생들에게 시달리기 전에도 매일매일 마르게타를 찾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오래 머무르고 있으니까. 내가 피신 목적으로 왔다는 건 진작에 알았겠지.
“곧 로벤스 아카데미 분들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던데, 아카데미도 다시 휑해지겠네요.”
이렇게 은근한 눈빛으로 말하는 걸 보니 확실하다. 이제 로벤스 아카데미 학생들이 사라지면 지금처럼 머무르지 않을 테니 아쉽다는 압박.
“원래 없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는 건데 휑할 게 있겠습니까? 있는 사람들로도 충분할 겁니다.”
“후후, 그렇겠죠?”
저렇게 노골적인 압박을 하면 앞으로도 잘하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앞으로 학생회장실은 제2의 동아리실이다…
게다가 마르게타는 올해가 마지막 학년이지만 나는 내년에도 아카데미에 있어야 하지 않나. 1년 동안 따로 지내야 하는데 올해는 최대한 많이 붙어 있어야지.
‘…결혼을 했는데도 따로 지내야 하나?’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다. 마르게타가 졸업하면 결혼을 할 생각인데, 정작 신랑인 나는 여전히 아카데미에 있어야 한다고? 이거 맞나?
내년에는 텔레포트 마법사를 따로 고용해서 매일 텔레포트로 출퇴근을 하던지, 아니면 마르게타가 아카데미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결혼하자마자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건 좀.
‘여차하면 1년 계약해야지.’
만약 아무리 찾아도 괜찮은 방법이 없으면 그냥 마법사나 고용하자. 어차피 쓸 시간이 없어서 쌓이기만 하는 금화 아닌가. 이럴 때 적당히 써줘야 화폐가 순환되고 그런 거다.
통수는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통수라고 부른다.
“어, 칼? 잠깐 이것 좀 보겠어요?”
“예?”
살며시 학생회장실에 들어오더니 마르게타에게 서류더미를 건네고 사라진 부회장. 순식간에 쌓인 서류를 씁쓸한 눈으로 보던 마르게타는 금방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떨떠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상하다. 작년에는 마르게타가 학생회 업무를 도와달라고 요청한 적이 제법 있지만, 그건 솔직히 나하고 조금이라도 같이 있기 위해 둘러댄 핑계다. 공식적으로 연인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딱히 그럴 필요가 없지.
그런데도 나를 불렀다? 무언가 기묘하고도 골치 아픈 일이 터졌다는 의미일 터.
“무슨 일입니까?”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을 뒤로 하고 마르게타에게 다가가자 마르게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나에게 보여줬고─
“칼. 눈을 감으면 못 보잖아요.”
“잠깐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서류에 익숙한 문장이 보이자마자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시발.’
봤다. 나는 봤다.
서류에 새겨진 익숙한 문장을, 왜 이 타이밍에 아카데미에서 보이는지 모르겠을 문장을.
“올해 수학여행 관련으로 온 문서예요.”
내가 눈을 감자 마르게타는 친절히 내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난 아직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어.
“올해도 작년과 같이 보야르 공작령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다시 짜야겠어요.”
“예… 그렇군요.”
그러나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고 이미 터진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보야르 공작령에 이어 체네스 공작령이라니. 내년에는 울켄이려나요?”
기껏 마르게타가 농담까지 하는데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체네스 공작령, 살론 공작가가 다스리는 제국 서부에 위치한 지역.
그리고 현 살론 공작가의 가주이자 체네스 공작은─
“죠오오오카아아아아아아─!!! 오랫마니양!!”
꽐라공, 아니 현명공이다.
미치겠네.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술병을 들며 반기는 부끄러운 모습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당장 내 머리에서 나가, 꽐라공…!
조카 머릿속에 침투한 부끄러운 외숙모를 쫓아내고 나니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졌다.
‘왜 체네스지?’
정확히는 이성적인 현실 부정이 가능했다, 라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아무튼 혼란스럽다. 현명공이 부끄럽고 말고를 떠나 보야르 공작령이 아닌 체네스 공작령이 수학여행지가 된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2년 연속 같은 곳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카데미 일정에 수학여행이 생긴 계기는 황금공 아닌가.
영지에 만든 리조트 홍보를 위해 아카데미 학생들을 리조트로 부른 것이 수학여행의 시발점. 그 돈에 미친 양반이 그런 대형 홍보 수단을 한 번만 사용하고 남에게 양보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상대가 공작이라 양보했다? 돈이 얽히면 황실에도 들이받는 게 황금공인데 무슨.
‘다른 공작령이면 모를까.’
심지어 체네스 공작령은 관광지로서의 명성도 높다. 황금공 입장에서 체네스 공작령에게 수학여행 장소를 양보하면 경쟁자의 입지를 더 키워주는 꼴. 이건 황금공이 아니라 다른 영주여도 양보할 이유가 없다.
“의외군요. 올해는 리조트 예약이 꽉 차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의아함을 담아 중얼거리자 서류를 계속 읽어가던 마르게타가 짧게 탄성을 냈다.
“칼 생각이 맞아요.”
“예?”
“작년에 저희가 머무르던 리조트, 황실 공인 관광지로 지정됐어요.”
그 말에 모든 의혹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의 10년 만에 새롭게 추가된 황실 공인 관광지. 그러면 리조트는 물론이고 근처 숙소들도 미어터지겠네. 그런 포화 상태에서 굳이 아카데미 학생들까지 부를 필요는 없긴 하다.
‘…공인 관광지.’
이 시대에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게 이상하지만, 애초에 그런 걸로 태클을 걸기에는 너무 멀리 온 세계관이다.
그리고 황금공이 황실에게 공인 관광지라는 선물을 받고 수학여행 유치를 포기한 거라면, 아카데미가 체네스 공작령으로 가는 건 황실의 뜻이라는 거다. 이제 황금공의 의중이 아닌 황실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
“저희는 운이 좋았네요. 안 그래도 관광지로 유명한 보야르에 황실 공인 관광지까지 생기다니, 앞으로 몇 년은 사람들로 가득하겠어요.”
“예, 그럴 겁니다. 작년에 미리 볼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슬쩍 미소를 짓는 마르게타에게 마주 웃으며 상념을 접었다.
황실의 뜻에 의문을 가지는 건 인생을 쉽게 꼴 수 있는 방법이다. 이미 꼬일 대로 꼬였는데 여기서 더 꼬이면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신경 끄자.’
게다가 짚이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특히 귀빈들이 걱정이다. 제국에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을 것이니, 홀로 헤맬까 우려스럽다.”
신년하례식 기간 중에 황제의 초대로 불려간 식사 자리. 그곳에서 황제가 넌지시 꺼낸 발언.
황제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느그 나라 삼인방이 스파이로 활동하지는 않을까 의심하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공작령 중 하나이자 상업, 해운, 해군의 중심지인 보야르에 두 번이나 학생들을 보내는 건 거슬리는 일일 터. 어차피 어디론가 보내야 한다면 아예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은 게 황제의 심정일 거다.
나이도 많고 건강도 안 좋은 사람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걸 보면 안타깝지만, 차마 합리적 의심 상태인 황제 앞에서 의심 대상을 옹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솔직히 왕족인 주제에 남의 나라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들이 잘못이지. 황제는 잘못 없어.
며칠 지나지 않아 올해 수학여행지가 체네스라는 사실이 퍼졌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체네스는 서쪽에 있는 곳이죠? 처음 가봐요!”
그리고 새로운 여행지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루이제.
“아, 체네스…”
현명공이 버티고 있는 체네스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찔해진 에리히를 볼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에리히 역시 현명공에게 미친 듯이 시달린 인물 중 하나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심하게 시달린 피해자다. 현직 감찰부장이라는 방패 덕에 현명공의 연락을 그나마 최소화 할 수 있는 나와 달리, 에리히는 아무 방패막 없이 연락을 받아야 하니까.
“불참은 안 되겠지?”
“수학여행 기간 동안 통신구 켜져 있는 거 보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네가 안 오면 현명공이 네 얼굴을 24시간 볼 거다─ 라는 말을 곱게 포장해서 전달하니 에리히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마 조카 중 하나가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현명공이 듣게 되면, 빼애앵 소리를 지르고는 바로 통신구를 꺼내지 않을까. 미친 소리 같지만 현명공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황제도 포기한 주당을 무시하지 마라.
“왜 그러지? 체네스도 관광명소가 많은 곳으로 아는데,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거기 영주님하고 안 좋은 기억이 있기는 해.”
죽을 상인 에리히를 보고 의문이 들었는지 라테르가 입을 열었지만, 에리히의 답에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명공 각하가 우리 외숙모님이다. 에리히가 외숙부님을 좀 닮은 편이라 현명공 각하의 귀여움을 조금… 과도하게 받았지.”
“아.”
대신 부연 설명을 하자 라테르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보니 귀여움이라는 단어에 여러 추억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지만 에리히의 명예를 생각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 아직 꼬꼬마였던 에리히가 현명공에게 볼을 빨리다시피 뽀뽀 세례를 받은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그때 에리히,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했었지…
“오, 공작가와 얽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군!”
그 와중에 류티스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본인은 왕족이면서 대단하니 뭐니 해봤자 놀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이지만, 저 새끼 성격상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나랑 에리히가 현명공의 조카라는 건 제국 귀족 중에서도 은근히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타국인은 오죽하겠나.
‘다리 건너 사이기는 하지.’
현명공과 크라시우스 가문 사이에는 아라스 가문이라는 징검다리가 있다. 단순히 다리 하나가 끼어있는 걸로도 헷갈릴 여지가 있는데, 외숙부는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현명공에게 맞췄고 어머니의 성도 크라시우스로 변한 상황.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연결점을 모를 만도 하다.
물론 나를 상대할 일이 잦은 고위 귀족이나 관료들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만.
“어디 가서 조카라고 말한 적은 없으니까.”
“하하, 가족의 위세를 빌리지 않는 건 멋진 일이지!”
“…그래. 고맙다…”
호탕한 웃음을 보이는 류티스와 달리, 에리히는 다소 씁쓸한 기색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안다. 에리히가 무슨 심정으로 현명공의 조카라는 걸 숨겼는지 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외숙모.’
빙의자인 나도 그런데 진짜 가족인 에리히는 얼마나 심하겠나. 현명공의 친척이라는 명함은 술을 마실 때도 괜히 눈치를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행히 그런 에리히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세라가 조심스레 다가와 에리히를 토닥였다. 그러자 류티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를 비켰고.
‘저 새끼…’
남의 연애에 뛰어난 눈치를 발휘하는 걸 볼 때마다 답답함과 측은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너에게 다른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도 지금처럼만 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