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14)
현명공의 투정에 시달릴 뻔했지만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미지의 힘이 발휘되는 법. 기적의 순발력으로 현명공이라는 폭탄을 회피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
대신 완전한 회피가 아닌 희생양이 필요한 회피였다는 게 문제.
졸지에 현명공의 주정에 시달리고 있을 에리히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했다.
– 죠카아아아아! 어떠케, 어떡케 이럴쑤이써어어어어! 내가 죠카룰 얼마나사랑하눈대!
“아, 그게, 에리히가 외숙모님하고 오랜만에 연락을 하고 싶다고 해서, 제가 양보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치졸하게 팔아 넘겼거든.
– 거짖말! 쟈근죠캬하테 연락 업썼딴 말야!
“아마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라 긴장했나 봅니다. 외숙모님이 먼저 연락을 해보시는 건…”
– 오오옹? 그를까!?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미안하다, 에리히.’
하지만 꽐라공의 주정에 시달리는 건 크라시우스의 숙명이니 달게 받아들여라.
게다가 네가 관직이나 사교계에 진출하면 ‘칭호: 현명공의 총애를 받는’ 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는 거니 기쁜 일 아닐까?
이 형은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다음날 동아리 시간.
“…괜찮냐?”
“아니.”
온몸으로 피로와 배신감을 풍기는 에리히를 볼 수 있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수백에 이르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태울 마차 확보, 백이 넘는 마차가 이동할 루트를 찾기 등. 하나하나가 쉬운 일이 아니나 이미 작년에 같은 일을 경험한 학생회 입장에서는 귀찮기는 해도 가능한 일에 속한다. 비록 도착지는 작년과 다르지만 제국 남쪽 끝이나 서쪽 끝이나 거기서 거기지.
게다가 당연스럽게도, 아카데미에서 체네스까지 가는 길은 매우 평화로웠다. 제국 귀족 자제들은 물론 황족, 왕족, 차기 성자가 포함된 행렬. 거기다 현직 감찰부장과 마종공도 두 눈 부릅뜨고 버티고 있는데 자기 영지에서 사고가 터진다? 아마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평온한 죽음일 것 같은데.
‘현명공도 버티고 있으니.’
결정적으로 그 행렬이 향하는 곳은 체네스 공작령이다. 수백의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는 현명공 입장에서 손님들이 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면 분개할 일.
공작의 분노는 공포스러운 일이고, 그 대상이 현명공이면 더욱 공포스럽다. 그 양반은 정말 무슨 말로 화를 내고, 어떤 대가를 가져갈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까. 막말로 ‘나 화났으니까 다음 신년하례식 때는 발레복 입고 참석해!’ 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렇기에 진짜 광기를 목도하고 싶지 않은 영주들의 노력으로 수학여행 행렬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오빠, 여기요.”
대신 행렬만 평화로웠지, 나는 여러 의미로 분주했다.
“아, 고마워.”
아직 입안에 있던 사과를 겨우 씹어 삼키며 이리나가 건네주는 사과를 다시 입에 넣었다. 챙겨주는 건 고마운데 이런 속도로 먹으면 물을 마셔도 체해…
아무튼 사과를 입에 물며 눈동자를 굴리자 빤히 쳐다보고 있는 네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를 포함하면 다섯이나 되는 인원이 4인 마차에 탑승한 상황. 사실 귀족들이 타는 마차니 4인이 아니라 그 두 배가 타도 무방하지만, 권장 탑승 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한 마차에 사람이 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연인들과 따로 타는 것도, 연인 중 일부를 따로 태우는 것도, 나 홀로 다른 마차에 타는 것도 이상한 일. 덕분에 루이제에게 홀린 부원들을 감시하기 위해 마차에 탔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나를 중심으로 탑승 인원이 결정되고 말았다.
“헤헤,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좋네요.”
그 와중에 나와 시선이 마주친 루이제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체네스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며칠이나 걸리는 상황. 그 마차 이동 시간 동안 다섯이 붙어 있으니, 아카데미에 있던 때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기분이 없잖아 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서로 일정도 있고, 숙소도 별개라 갈라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
“그러게. 더 이러고 있으면 좋겠다.”
공감하는 듯 부드럽게 웃는 이리나를 보니 감개무량했다. 작년에는 내 그림자라도 밟을까 벌벌 떨던 이리나였는데, 이제는 나랑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마차에 있고…
‘사람 앞날은 모르는구나.’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다시 느꼈다.
체네스 공작령의 중심지 산토리아. 공작령의 심장인 만큼 제국 10대 도시 중 하나에 속하는 대도시.
그런 대도시니 관광객을 위한 숙소는 널리고 널렸고, 산토리아가 품을 수 있는 유동 인구를 생각하면 아카데미 학생과 교직원 정도의 숫자는 호수에 물 한 방울 넣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귀족의 격에 맞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 조금 복잡했을 뿐이지.
“특이하네요. 꼭 신전을 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숙소로 선정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마르게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체네스 공작령의 호텔은 보야르 공작령의 리조트와 달리 화려함보다는 웅장하고 깔끔한 느낌이 강했다.
“체네스가 관광지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전대 공작 시절에는 신도들의 순례길로도 유명했단다. 그러니 그런 신도들을 위해 화려함보다는 깔끔함에 초점을 맞춘 거지.”
그런 마르게타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마종공이 가볍게 마르게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을 해줬다.
현명공의 부친인 전대 체네스 공작. 24시간 내내 술에 취한 상태인 딸을 보면 믿기 어렵지만, 매우 독실한 여명 교단의 신자라 경건공이라 불렸던 인물. 그 독실한 신앙심으로 인해 당시 체네스 공작령에는 경건공의 수집 컬렉션─ 이라는 이름의 성물들이 안치되었고, 성지에 준하는 장소들도 제법 있었다.
공작이 작정하고 모은 성물들과 공작령 곳곳에 있는 신성한 장소들. 순례객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미끼였을 것이다. 덕분에 체네스 공작령은 관광지기는 하되, 보야르의 화려함과는 다른 느낌의 관광지가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보야르와의 멸망전을 피하기 위한 방법 같기도 해.
정작 오늘날 체네스 공작이 경건과 신앙과는 아득히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게 유감이지만.
“…조금 의외네요. 현명공께서 다스리는 곳이니 더 활기차고 화려한 곳일 줄 알았어요.”
꽐라 새끼가 영주인 곳이니 더 개판일 줄 알았다, 라는 말을 굉장히 곱게 포장한 발언. 그 따뜻한 마음씨에 나도 마종공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마 내 외숙모가 현명공이라는 걸 알고 좋게 말하는 거겠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공작성은 마르 생각하고 비슷할 겁니다.”
“아…”
그래서 따뜻한 마음과 대비되는 참혹한 진실을 알려주자 마르게타는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애석하게도 사실이다. 영지의 분위기는 당대 영주의 성향에 따라 갈라지는 편이고, 현명공의 성향을 생각하면 체네스 전체가 거대한 술집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몹시 다행스럽게도 현명공 옆에는 억제기가 있지 않나.
외숙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인해 신앙과 도덕이 살아 숨 쉬는 체네스는 그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그 대가로 공작성이 거대한 술집으로 변모했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것이다.
“굉장히 유쾌한 분이신가 봐요.”
“너무 유쾌해서 문제란다. 경건공은 너무 진중해서 탈이었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호텔을 둘러보던 루이제는 우리 대화에 관심이 쏠렸는지 입을 열었다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마종공의 대답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마종공이 난색을 표하는 인물. 아마 마종공이 공작으로 집권한 1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인물이지 않을까? 아니, 분명 그럴 거다. 100년 안에 현명공 같은 인물이 여럿이었다면 황가는 고혈압으로 멸문했을 테니.
‘소공작은 멀쩡해서 다행이다.’
문득 현명공의 유일한 자식에게 생각이 뻗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현명공이 살론 공작가의 돌연변이라는 걸 증명하는 인물이자 현명공의 치세만 지나면 정상적인 공작이 등극할 거라는 희망을 주는 인물. 여러 의미로 제국의 주목을 받지만, 모친과 마찬가지로 영지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하지만 외숙부가 소공작에 관한 걱정이나 한탄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딱히 하자가 있는 인물은 아닐 터.
‘나 같은 타입이겠지.’
솔직히 내가 남에게 히키코모리니 뭐니 구박을 줄 입장은 아니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영지, 그 후에는 제도에만 처박힌 입장이니까.
소공작도 업무에 충실하느라 나오지 못하는 거겠지. 무려 공작의 후계자라면 얼마나 할 일이 많겠나.
그렇게 생각하자.
***
아카데미 행렬이 공작령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행렬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었다. 혹시 소중한 조카들, 그리고 조카며느리들이 살론 가문의 터에서 불편함을 겪는다면 그만한 치욕이 어디 있을까.
그렇기에 공작가 휘하 영주들에게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행렬을 보필하라고 일렀다.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어련히 잘할 사람들이지만, 외숙부로서도 살론 공작가의 일원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 칼 도련님과 에리히 도련님, 전부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복귀하도록.”
– 예.
다행히 이런 관심과 걱정에 에넨께서도 감동하셨는지, 아카데미가 숙소로 지정한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신이 연락을 보냈다. 조카들이 무사히 숙소까지 도착했다고.
‘곧 보겠구나.’
통신구를 품 속에 넣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두 조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칼은 몇 달 전 신년하례식 때 봤지만 그때 본 칼은 감찰부장 칼이었다. 공작의 부군이라는 입장상 친밀하게 다가가기 어려운 관계. 그러나 지금은 여행을 온 조카와 그 조카를 맞이하는 외숙부의 관계라고 우길 수 있다.
‘…좋아할까?’
동시에 조금은 걱정이 된다. 너무 오랜만에 사적으로 만나는 조카들이라 무슨 선물을 주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칼에게는 짝을 찾은 걸 축하하는 의미로 장신구라도 주겠는데, 에리히는 영. 결국 칼과 마찬가지로 커플 장신구를 준비했지. 나중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기면 주라는 의미에서.
‘여차하면 금화로 줘야지.’
요즘 애들은 물건보다 화폐를 더 좋아한다고 들었으니까. 분명 에리히도 좋아할 거다.
그리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성에서 남들 눈치 볼 필요 없이 뛰어다니는 사람이면 누군지는 뻔하다.
“쟈아아아아기! 쟈기쟈기쟈기쟈기!”
술병을 든 왼손을 파닥이며 달려오는 델.
…잠깐, 술병이 하나?
‘세상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지금은 정오다. 정오와 아침, 밤, 자정, 저녁, 새벽은 델이 특히나 술을 많이 마시는 시간. 그런 시간대임에도 양손에 한 병씩이 아닌 고작 한 병이라니.
‘자중하는구나.’
분명 델도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 생각에 음주를 자중하는 것이 틀림없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진심인 델이니까.
“나 다 드러써어어어! 우뤼 죠카들하구우우~ 죠캬먀느리들 와따며!?”
“나도 방금 들었어. 마가렛 호텔에 도착했대.”
“와아! 당쟝가야징!”
나한테 오던 몸을 돌려 그대로 달려나가려는 델의 목덜미를 겨우 붙잡았다.
조카들이야 그렇다 쳐도, 호텔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직원들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술에 취한 공작이 말없이 나타나면 얼마나 놀라겠나.
“델. 미리 연락은 하고 가야지.”
“이이이잉~ 그치마안~ 바로 보고시픈데!”
“아로델.”
애칭이 아닌 본명을 부르자 델은 그제야 입술을 삐죽이며 버둥거리는 걸 멈췄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뻔뻔한 모습을 보이는 델이 유일하게 주눅 드는 모습을 보이는 게 고작 이름을 부를 때라니.
‘…조금 너무한 이름이기는 하지.’
아로델. 크펠로펜 제국 출신 성인의 이름을 딴 신실한 이름.
경건공이라 불린 장인 어른 입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 아로델이라는 성인이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자라는 것이 사소한 문제였다.
‘강인하게 자라라는 뜻이기는 했지만…’
장인 어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강인하게 자랐다.
뭐, 그래도 아무튼 강인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장인 어른께서도 천국에서 기뻐하실 거다.
짐을 전부 풀기도 전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 우뤼죠카아~ 방금 도착햇따며? 이 외숙모가 금방가께!
갑작스레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