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15)
정말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기세에 가슴이 철렁했다. 기습 공격이 아닌 사전 예고인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카데미 학생들이 있는 곳에 공작이 강림하는 건 너무한 일이다. 마음 편히 놀아야 할 수학여행 일정 중에 까마득한 윗사람을 맞이하는 꼴이지 않나.
차라리 다른 공작이었다면 사교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텐데, 영지에서 나오지도 않는 주당을 상대하는 건 좀.
– 나한테 바꿔줘.
– 으이잉? 쟈기, 쟈기도 우뤼죠카 보고시퍼?
– 당연하지. 그러니 어서.
– 죠아! 여기!
그렇기에 우리가 공작성으로 찾아가겠다─ 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현명공의 옆에서 외숙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운 일이다. 현명공을 보며 답답했던 가슴이 순식간에 뚫리는 기분이다. 역시 현명공의 유일한 억제기야. 성능 확실하지.
– 잘 도착했나 보구나. 그래, 오는 데 불편한 건 없었고?
“예.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현명공을 밀어내고 통신구를 쥔 외숙부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래, 이게 옳게 된 인사다. 친척과 연락을 하면 인사부터 하는 게 맞다. 현명공은 보자마자 찾아가겠다는 일방적 통보만 했지. 제발 남편의 1할이라도 보고 배워라.
– 네 외숙모가 조카들을 보고 싶어서 성화니, 오늘 봤으면 좋겠구나.
“아, 예. 알겠습니다.”
– 물론 호텔로 갈 건 아니니 걱정 말고.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에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 에리히와 같이 관광이라도 하고 있으렴. 이왕 보는 거 좋은 곳에서 만나야지.
적당히 사람 없는 곳으로 빠져 있으면 그곳으로 찾아가겠다는 말.
확실히 현명공이 호텔로 오든 내가 공작성으로 가든 소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제3의 장소에서 만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소음이 생기겠지만, 적어도 가장 덜 시끄러운 방법.
– 아, 다른 일행을 데리고 나와도 괜찮단다.
그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외숙부가 조카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예비 조카며느리들밖에 더 있겠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외숙부가 말하지 않아도 데리고 갈 생각이기는 했다. 적어도 마종공이 코앞에 있으면 현명공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에리히에게 현명공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나라 잃은 애국지사의 표정으로 변하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가는 게 좋냐, 외숙모가 오는 게 좋냐?”
“조카가 외숙모를 오게 할 수는 없지.”
작은 조카를 움직이게 하는 데는 그 한 마디로 충분했으니까. 아무리 에리히라도 학생들 보는 앞에서 볼이 쭈왑쭈왑 빨리는 건 싫겠지. 솔직히 그건 나도 싫어. 그딴 걸 남들 앞에서 당하면 혀 깨물고 죽고 싶을 거다.
“세라, 너도 같이 가자.”
“네, 네? 저도요?”
그리고 죽을 상으로 어기적거리는 에리히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세라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외숙부에게 조카며느리들도 데려와달라는 말을 들었으니 세라를 데려갈 명분은 있다. 비록 에리히와 세라가 공식적으로 약혼을 하거나 핑크빛 기류가 흐르는 관계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세라를 데려갈 필요성이 있다.
‘이럴 때라도 우위를 점해야지.’
애석하게도 세라는 호르펠트 백작에 비해 다방면으로 밀린다. 선천적인 건강과 가문의 격 때문이니 노력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열세.
그렇기에 세라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호르펠트 백작과 달리 에리히 옆에 붙어있을 수 있다는 장점.
“두 분도 네 이름은 알고 있어. 조카의 소꿉친구가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면 좋아하실걸?”
그 말에 세라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지능과 눈치가 아메바 수준이 된 누군가와 달리, 세라의 눈치는 지극히 정상적이니까. 내가 본인을 생각해서 한 제안이라는 건 바로 알아챘을 거다.
“네! 바로 준비할게요!”
황급히 외투를 찾는 세라를 보니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뭔가 호르펠트 백작에게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세라도 세라 나름의 경쟁력을 갖춰야 제국백 경쟁자를 상대로 하악질이라도 할 텐데. 질 때는 지더라도, 마음껏 싸우다가 져야 패배를 인정할 수 있는 법이다.
“벌써 제수를 챙기는 거니?”
그 모습을 보던 마종공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역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노골적인 챙김이었나 보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으니 당연하지만.
그런데 시발, 정작 에리히는 왜 이것도 못 알아채는 건데.
“동생 때문에 속이 탈 테니 형이라도 도움을 줘야지.”
본능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한숨을 억누르며 적당히 대답했지만, 동시에 진심이기도 하다.
에리히의 눈치가 멸망한 상황에서 나까지 개판이면 그보다 끔찍한 상황은 없다. 기껏 건강을 회복한 세라가 다시 뒷목을 잡고 쓰러지지 않을까. 그러면 어머니와 시녀장을 볼 면목이 없다.
“좋은 형이구나. 언젠가는 동생도 형의 마음을 알아줄 거란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일단 나오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외숙부가 에리히와 관광이라도 하라고는 했지만, 진짜 관광지로 갈 수는 없는 노릇.
‘갔다가 얼마나 시선을 끄려고.’
공작 부부와 은밀히 만나야 하는 상황인데 관광지에서 접선을 한다? 아무리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한다지만 그건 선을 넘었다. 숲이 너무 울창해서 나무가 진입도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외숙부가 굳이 밖에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적당한 장소가 있다는 말. 뒤져보면 무언가 나오겠지, 라는 심정으로 지도를 구했고─
“아, 여기면 사람 적을 것 같아요.”
“오.”
이리나가 가리킨 곳을 보자마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더 고민할 필요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일단 이종족 보호 구역에 속하기는 하지만 연이은 확장으로 인해 구시가지로 전락한 지 오래인 지역. 구시가지라는 말도 과분할 정도로 휑한 곳이라 관광객은커녕 현지인, 거주 이종족도 적을 테고, 산토리아의 성벽을 벗어나야 하는 곳이지만 마차를 타면 금방이다. 거리도 적당히 있고 보는 눈도 없는 곳. 딱 좋네.
“외숙모하고 인사 나누면 바로 보호 구역으로 갈까? 이왕 마차까지 타서 갔는데 그냥 돌아오기는 아쉽잖아.”
“그건 그렇지.”
에리히의 타당한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종족 보호 구역이면 마종공도 궁금해하는 곳이니 빠르게 볼 수 있으면 나야 좋다.
그렇게 상의를 끝내고 통신구를 꺼냈다. 어디로 가겠다는 말 정도는 남겨야 외숙부가 쉽게 찾아올 수 있을 테니.
***
문 너머로 들려오는 발소리에 읽고 있던 책을 조용히 덮었다. 이 울림은 분명 어머니가 오는 소리. 괜히 책을 펼치고 있다가 술방울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우울해질 것 같다.
“리리이이이!”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오셨다.
어머니도 참. 공작으로서 품위는 지켜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아니, 공작이 아니라 일개 귀족이어도 누군가의 방에 들어올 때 노크를 하거나 문밖에서 말을 거는 건 상식─
“또 책보구이써써? 으이그, 가끄믄 바께 나가서 노르라니깐!”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껴안은 어머니는 내 볼에 계속 입을 맞추셨다.
‘술 냄새…’
어머니가 볼에 입을 맞출 때마다, 입을 열 때마다 진하게 느껴지는 술 냄새에 나도 취하는 기분이다. 이상해, 고작 냄새 때문에 사람이 취할 리는 없는데.
아무튼 쉬지 않고 볼에 입을 맞추는 수준을 넘어 쪽쪽 빠는 수준에 돌입한 어머니를 조심스레 밀어냈다. 매일 이러는 분이지만 오늘도 이러면 곤란해. 오늘은 손님을 보는 날이잖아.
‘정확히 말해야 돼.’
쭈르륵 밀려나는 어머니를 보며 눈에 힘을 줬다. 오늘은 나와 친척이기도 한 크라시우스 가문의 자제들을 보는 날. 심지어 그 친척 중에는 현직 감찰부장도 포함되어 있다.
영지에 있는 나도 감찰부장의 위명은 잘 안다. 젊은 나이에도 수많은 활약을 하며 정계의 거물이 된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아직도 어머니 품에 안겨 뽀뽀나 당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친척이자 중앙의 거물인 사람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도 부족할망정,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러니 확실하게 말하자. 어머니의 행동은 300년 살론 공작가의 명예를 더럽히고, 공작가를 따르는 무수한 가신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나에게 과도한 애정을 보이는 것도 살론 공작가를 이끌어 갈 내 체면을 갉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 이건 어머니에게 독한 짓을 하는 게 아니야. 어머니와 가문을 위해 해야 할 말은 하는 거야.
그러니 망설이지 마, 릴리아나 살론. 설령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그건 한 순간─
“이이잉! 리리이이이! 엄마품애서 버서나면 못써!”
입을 열기도 전에 도로 품에 안겼다.
“어, 엄마! 답답해!”
심지어 이번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꽉 안기고 말았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는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말에 어머니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왜!’
이해할 수 없다. 소공작이 가벼운 언행을 하면 공작인 어머니가 따끔히 혼내는 게 맞는데!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올해로 열 살인 어엿한 레이디인데!
“그러다가 리리 기절하겠어.”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려도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아버지의 말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자마자 황급히 아버지의 몸을 방패 삼아 숨었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아버지를 무시하고 나에게 달려들지는 않으니까.
“델. 리리한테 나갈 준비하라는 말만 하라고 했잖아. 그새 울리면 어떡해.”
“아, 안 울었어요…”
아버지의 말에 본능적으로 부정했지만 슬쩍 눈가를 닦으니 물기가 묻어 나왔다.
이게 다 어머니 때문이야… 레이디가… 부끄럽게 눈물을 보이고…
“흐끄윽─”
“아이고.”
서러움에 왈칵 눈물을 쏟아내자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더 서러웠다.
이종족 보호 구역의 구시가지. 예상대로 한적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멍하니 현명공을 기다리자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마차 하나가 도착했다. 마차에 살론 공작가의 문장이 박혀있는 걸 보니 확실히 현명공.
문장을 보자마자 침통히 눈을 감는 에리히를 뒤로하고 마차에 다가가니, 기사들이 손을 대기도 전에 마차 문이 스스로 열렸다.
“히야아아아! 죠오오까아아아!”
거의 부서질 기세로 문을 열어젖힌 현명공은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 기사들은 표정 변화도 없는 것이 현명공의 기행에 익숙해진 모양.
안타까운 일이다. 공작 일가를 가까이서 호위하는 기사면 능력이나 성품, 출신을 인정받았다는 건데 하필 그 공작이 현명공이냐. 업무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하루하루 무사히 지났으면 하는 해탈감이 더 클 것 같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외숙모님.”
“히히! 오랫마니야 죠카! 여어억씨! 통신규보단 직쩝보는개낫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반갑다는 듯 내 팔뚝을 연신 내려치는 현명공에게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미 현명공의 시선은 내 뒤로 향해 있었으니까. 심통을 부릴만한 대답을 하지 않는 이상 금방 떨어질 거다.
“쟈근조카아아아!”
실제로 현명공은 곧바로 다음 사냥감을 향해 달려갔다. 몇 개월 전에 본 큰 조카보다 몇 년 만에 보는 작은 조카가 더 반가운 것은 당연한 일.
다행이다. 내가 신년하례식 의무 참석자라는 사실이 이렇게 기쁜 적은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국법.
“에리히도 그새 많이 컸구나. 어엿한 성인이 됐어.”
현명공에게 연속 진심 뽀뽀를 당하고 있는 에리히를 보는 사이, 외숙부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 반가워서 하는 말 같지만, 하필 처참하게 볼을 털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니 놀리는 것 같았다. 에리히가 들으면 이런 대접을 받는 성인이 어디 있냐고 통곡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