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19)
갑자기 밝혀진 외할머니의 존재.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발언이라 놀랐지만, 그 충격은 당사자인 마종공이 더한 것 같았다.
마종공의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멍한 목소리가 그걸 증명했다.
적발 엘프의 발언으로 인해 다음 관광지는 자동으로 정해졌다. 비록 이종족들의 주거 지구라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나, 주거민들의 허락이 있다면 못 갈 것도 없다.
일반적인 관광객이라면 절대 진입하지 못하는 구역. 그 미지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거나 들뜬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인간 사회 기준 최연장자가 우울해하는데 누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겠나.
‘외할머니.’
나도 머리가 복잡했다. 물론 마종공의 모친이 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닐 테니, 마종공에게 외할머니가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마종공은 외할머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모친 생전 때도 외가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친이 보호 구역을 뛰쳐나가기 전, 외가에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거라 지레 짐작했다던데─
‘장로였다고?’
장로, 엘프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호칭. 비록 인간과 달리 장로 직함이 혈연을 통한 세습직인 건 아니지만 현직 장로의 딸이라면 귀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종공의 모친은 그 대접을 걷어차고 보호 구역에서 탈주했다. 거기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함구했다. 마종공 입장에서는 모친과 외가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아, 응, 그래. 무슨 일이니?”
푹 고개를 숙이며 걷는 마종공을 걱정스레 힐끔거리던 적발 엘프에게 다가가자, 적발 엘프는 금방 웃는 얼굴을 지으며 반겨줬다.
우호적인 반응이지만 기분이 묘하다. 아직도 작은 아가 취급하는 건가?
“베아트릭스는 모친께 외가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얼굴을 보여도 괜찮은 겁니까?”
어쨌든 타당한 질문을 건네자 적발 엘프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더 만나야 해. 장로님, 아리아드네가 나간 뒤로는 정말 우울해하셨거든.”
“예?”
이건 또 의외네. 대판 싸우고 의절 상태인 줄 알았는데.
내 반응에 다시 마종공을 쳐다본 적발 엘프는 작게 영창을 읊조리며 마법을 펼쳤다. 익숙한 영창에 익숙한 마나 흐름, 소리 차단 마법이다.
“아리아드네가 장로님과 싸우고 나간 건 맞지만, 딱히 심각하게 싸운 건 아니었어.”
한숨을 내쉰 뒤 이어지는 설명은 복잡하고도 허무했다.
현 장로는 600살이 넘었다고 한다. 크펠로펜 제국이 성립되기 300년 전부터 살아온 고인물이며, 이는 아펠스 제국의 패악질을 실시간으로 직관한 역사의 피해자라는 의미.
애초에 다양한 종류의 이종족이 제국, 그것도 공작령 하나에 세워진 보호 구역에 오밀조밀 모여사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아펠스 제국의 인간 우월주의로 인해 무수히 많은 이종족들이 참사를 당했고, 아펠스 말기에는 히틀러 같은 새끼가 연달아 세 명 즉위할 정도로 미쳐 돌아갔다. 덕분에 이종족은 멸종 가시권에 진입할 정도로 그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지금 살아있는 엘프 대다수는 제국 성립 즈음에 태어나서 인간에 대한 원한도 희미하고, 제국도 잘 대해줘서 그러려니 하지만… 장로님처럼 오래 사신 분들은 아니야.”
인간과 협력해서 지옥을 탈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당한 화를 잊지는 못했다는 말.
물론 이종족들을 탄압한 국가는 아펠스니 크펠로펜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는 인간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아 이종족 보호 구역에 틀어박혀 지낼 뿐. 그런 엘프들은 상업 지구에 발도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리아드네가 보호 구역을 나가겠다고 하니 장로님도 화가 나셨고, 말을 듣지 않으면 딸이 아닌 남이라고 생각하겠다고 하셨는데…”
“나갔군요.”
“응…”
홧김에 했을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정말 남이 되어버린 모친은 그렇다 치고, 결국 아펠스가 쏘아 올린 존나 큰 공이라는 말 아닌가. 멸망한 후로도 민폐를 끼치다니, 여러 의미로 대단한 새끼들이다.
“직접 잡아오자니 장로님은 종족을 책임져야 하는 분이고, 그렇다고 자기 딸 잡자고 다른 동포들을 인간 세상으로 밀어낼 정도로 냉혹한 분도 아니셔서 지금까지 속앓이만 하셨지.”
그러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는 적발 엘프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속앓이를 한 장로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야 하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나.
아무튼 대략적인 이유는 알았으니 적발 엘프에게 감사를 표하고 마종공에게 다가갔다. 적발 엘프는 내가 마종공에게 잘 설명해줄 거라 기대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대.”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짧은 한마디에 마종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보호 구역의 엘프들은 모르겠지만 마종공 앞에서는 마법을 써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실 엘프들 입장에서 집 나간 친구가 남긴 작은 꼬마가 마법 끝판왕이라는 발상을 어떻게 하겠나.
“장로라는 분도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딸이 떠났다는 소식까지 들으면 충격이 크실 거야.”
“그렇, 겠지.”
덧붙인 설명에 마종공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안타깝다. 처음으로 보는 외조모에게 모친의 죽음을 알려야 하는 외손녀는 어떤 기분일까.
“베아트릭스, 그, 무리한 말인 건 알지만, 그 장로라는 분한테─”
“말하지 않아도 안단다. 외손녀로서 살갑게 굴어야겠지.”
최대한 조심스레 말하려고 했지만 마종공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적어도 그 딸이 남긴 손녀로서 장로를 위로해야 한다. 그것이 마종공의 최선.
‘환장하겠네.’
그런 마종공을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다행히 상업 지구에서 본 엘프들은 인간에 대한 적대심도 없어서 혼혈인 마종공도 살갑게 대해줬지만, 인간에 대한 반감이 가득할 장로는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흔히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혼혈인 마종공을 잡종 취급할 수도, 아니면 모친을 잡아먹은 역병으로 취급할 수도 있는 노릇.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다.
엘프들의 주거 지구에 진입하자 상업 지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엘프들이 보였다. 그리고 상업 지구에 있어야 할 인간이 주거 지구까지 방문하자 시선이 꽂힌 것은 당연한 일.
“인간? 관광객이 길을 잃은 건가?”
“여기가 길을 잃는다고 올 수 있는 곳이냐. 애초에 클라리스가 데려온 거잖아.”
“그런데 저거, 아리아드네 아니야?”
그리고 덤덤한 시선은 순식간에 관심과 소란으로 돌변했다. 집 나간 장로의 딸과 판박이인 엘프가 등장했으니 이 역시 당연한 일일 터.
“다들 비켜. 장로님부터 만나야 해.”
그래도 적발 엘프, 클라리스 덕분에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지도자를 만나야 한다고 하니 호기심에 가득 찬 엘프들도 물러나더라.
다행이다. 만약 이 정도 되는 엘프들에게 붙잡혔다면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장로를 만났─
‘뭐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모세의 기적을 목도했다. 우리 앞에 있던 인파가 순식간에 좌우로 갈라지는 기적. 혹시 가기 편하라고 비켜주는 건가? 엘프들 배려 대단하네.
“아리아드네가 왔다고?”
물론 갈라진 인파 끝에 있는 엘프를 보자마자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소란스러웠던 엘프들이 고개를 숙이며 맞이하는 존재, 마종공과 같은 백발이지만 평범하게 허리까지 기른 장발의 여인. 다소 주름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주름 덕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 엘프가 장로.’
그 와중에 600살 넘은 존재의 노화가 주름 몇 개 생기고 끝이라는 거에 놀랐다. 장수종 대단하네.
“그 철없는 녀석이 드디어 왔구나.”
살포시 인상을 찡그리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장로. 아무래도 근처에 있다가 소란을 눈치채고 먼저 찾아온 것 같다.
‘망할.’
하지만 영 좋지 못한 방문이라 식은땀이 흘렀다. 순서가 이렇게 되면 안 된다.
가만히 있다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충격이 클 텐데, 가출한 딸이 돌아왔다는 가짜 뉴스를 먼저 듣고 ‘사실 죽었어요.’ 같은 말을 접하면 얼마나 절망적이겠나.
“결국 돌아올 거면 뭐하러 나간─?”
노여움 반 안도 반인 표정으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던 장로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누구니?”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살짝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딸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챌 정도의 모성이 있는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충격이 덜할까.
엘프 주거 지구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 그 나무 옆에 위치한 3층 건물 하나. 다른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반면 홀로 동떨어진 3층 건물은 장로가 거주하는 집이자 엘프의 회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그 상징성으로 인해 같은 엘프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중요한 건물.
그런 귀한 건물에 인간 관광객이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나, 누구도 들뜬 기색이나 호기심을 보일 수 없었다.
‘잘 풀려야 할 텐데.’
소파에 앉은 채 씁쓸히 계단만 응시했다. 다른 일행들이 1층에 멍하니 있는 반면, 마종공은 장로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갔으니까.
길가에서 장로와 만난 뒤, 마종공이 외손녀라는 걸 알게 된 장로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아직 딸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상대는 6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인물. 딸 없이 홀로 온 외손녀, 어두운 클라리스의 안색을 통해 대충은 짐작한 것 같았다.
물론 어미로서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얼굴에 드러났지만.
“괜찮을까요?”
이미 비어버린 찻잔을 연신 매만지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떨리는 눈동자와 굳은 얼굴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몰렸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루이제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애써 무난한 답을 했다. 루이제에게 있어 마종공은 같은 예비 남편을 둔 상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마법을 알려준 소중한 스승이다. 어린 나이에 언니를 잃고 실의에 빠진 루이제에게 마법이라는 길을 보여준 은인이다.
그런데 은인이자 소중한 스승이 외조모에게 모친의 부고 소식을 알려야 한다. 그것도 자신을 미워할 수도 있는 외조모에게. 제자로서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
“맞아. 다른 사람도 아닌 마종공이잖아. 분명 괜찮으실 거야.”
루이제 옆에 앉아있던 이리나도 루이제의 손을 잡으며 위로를 건넸다. 제국의 공작, 마법의 정점에 이른 인물이니 어떤 난관도 이겨낼 거라고.
마르게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나의 말에 힘을 싣자, 그제야 루이제는 다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쩌면 남들의 위로에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걸 수도 있다.
‘아무 일 없기를.’
사실 나도 불안하다. 인간 사회에서의 마종공은 무적이나, 지금은 그저 외손녀 베아트릭스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그저 일이 잘 풀리기를 기도할 수밖에.
***
3층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아마 외조모님이 집무실로 사용하는 것 같은 방에서 외조모님과 독대를 하게 됐다.
다행히 손님으로서 인정 받았으니 어서 말해야 한다.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저 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방에 오기까지 외조모님의 표정을 보고 말았으니까. 절망으로 딱딱히 굳었지만 동시에 간절한 희망이 깃든, 이성은 끔찍한 재앙을 속삭이지만 가슴이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모순을 겪는 자의 표정을 보고 말았으니까.
‘어머니.’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찻잔을 매만지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지금은 어머니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왜 나에게 외가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신 걸까. 왜 외조모님과 싸우고 관계를 끊으신 걸까. 조금은, 조금은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까?
“내 외손녀라고?”
그러던 중 외조모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네, 베아트릭스라고 합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내가 당신의 외손녀라는 걸 확인했다면 이 자리에 없는 딸에 대해 물어야 하는데, 물었다가 돌아올 대답은 너무나 뻔하다.
그러니 감히 어떻게 입을 열 수 있을까. 괜히 물었다가 딸이 죽었다는 추측이 현실이 되면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니?”
그러나 외조모님은 그 끔찍한 질문을 입에 담으셨다. 어미로서 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인지, 아니면 딸이 사정이 있어 오지 못했다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질문.
애석하게도 나는 그 용기에 절망으로 보답해야 했다.
“101년 전에, 에넨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하자마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도저히 내 대답을 들은 외조모님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고, 외조모님의 원망을 들을 용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