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2)
제 32화
눈물 젖은 시식회 – 2
빌라르의 등장은 나에게 있어 한줄기 빛과 같았다. 원수 같은 부원들이 제과 혁명을 일으킬 기세로 온갖 것들을 뽑아낸지라, 도저히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빌라르가 참전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자국 왕자의 만행을 기사가 대신 뒷수습 한다고 생각하면 딱히 미안할 것도 없고, 마침 기사라 먹는 양도 많을 테고. 일일 짬통이 되기에 부족함 없는 인재다.
물론 순전히 짬처리를 하기 위해 빌라르를 부른 것은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실례를 저지를까. 안 그래도 오늘 만나려고 했는데, 마침 이렇게 간식이 쌓여버린 것이다.
‘운이 좋군.’
빌라르에게도 운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빌라르에게 자리를 권했다. 당연히 부원들의 열정으로 가득한 결과물이 놓인 책상 앞으로. 이거 다 처리하기 전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못 나간다.
시야를 가득 채운 간식의 산에 빌라르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상 먹으라고 둔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 대량으로 권하는 경우는 처음 보겠지. 그런데 어쩌냐, 여기에 느그 왕자 지분이 좀 많은데.
“곧 박람회라 그런지, 부원들의 열의가 상당하더군요. 혼자 먹기에 아쉬워서 경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빙긋 웃으며 말하니 빌라르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높으신 분들이 만든 걸 먹을 기회를 주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 빌라르를 뒤로 하고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적어도 마실 것이 있어야 더 많이 먹을 수 있겠지. 이 개같은 부원들은 나한테 물도 안 주고 퍼먹였다. 생각할수록 진짜 식고문 당한 거 맞는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되돌려 주지?
부원들을 향한 복수 방법을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쿠키통 옆으로 뻗어지던 손이 순간 멈췄다.
‘이건 내 거고.’
급하게 손을 틀어 루이제가 준 찻잎이 아닌 예전부터 처박아 둔 찻잎을 꺼내 우렸다. 선물로 받은 걸 남한테 주기는 아깝지.
“근래 박람회 준비로 아카데미가 떠들썩합니다. 타국에서 오신 분들이 괜히 불편하시지는 않을지 걱정되는군요.”
차를 우리는 동안 적당히 화제를 던졌다. 박람회는 아카데미 내적으로는 거대한 축제이며, 외적으로는 외부 인사도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있는 날. 주요 인사 호위를 위해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삼국 전력 입장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벤트다.
“별 말씀을. 학창 시절이 떠올라 저도 덩달아 흥분되더군요.”
“그거 다행입니다.”
작게 웃으며 다기를 들고 빌라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찻잔을 내어주자 감사하다며 받는 빌라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박람회는 차를 우리는 사이 가볍게 던진 화제지만, 동시에 빌라르와 대면을 하게 된 이유기도 하다. 동아리 박람회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박람회가 시작되며 아카데미가 개방된다는 것이 골치 아픈 일이지.
‘꽤나 고민이겠지.’
동아리 박람회는 꽤 역사 깊은 아카데미의 연례행사다. 갑자기 제국이나 아카데미에서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삼국에서도 이 시기에 박람회가 열리는 것을 알고 온 입장. 그러니 서로 책임 공방을 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예견하고 준비한 상황이라도, 직접 겪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혹한기 훈련을 하는 건 알지만 직접 겪을 때가 다가오니 격렬하게 거부하고 싶은 그런 느낌. 방금도 학창 시절이 떠올라 덩달아 흥분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앞에 있는 수식어는 다 떼도 상관없다. 흥분된다는 말이 빌라르의 진심이 듬뿍 담긴 단말마나 다름없으니.
‘흥분되기야 하겠군.’
외부 인사가 대거 유입되어 혼잡하고 북적이는 아카데미. 그런 상황 속에서 혹여나 자국 주요 인사가 변이라도 당할까봐 아주 몸이 달아오를 것이다. 하여간 윗분이 움직이면 아랫놈이 노심초사 하는 게 일상이니 원.
“아무래도 올해 외부 손님은 이전보다 많을 것 같습니다.”
담담히 꺼내는 내 말에 빌라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정말 우연히 손님이 늘어날 것 같다는 정보 전달인지, 제국이 박람회를 틈타 전력을 확충하겠다는 통보인지, 어느 쪽인지 의문이겠지. 물론 전자다. 후자 같이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도리.
손님이 이전보다 늘어난 것은 학생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귀족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무 언질도 없이 쓱 오는 것은 이래저래 곤란하기에, 아카데미에서는 박람회 기간 동안 방문할 귀족들의 명단을 미리 받아둔다. 예약제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데 명단을 보니 작년이나 재작년과 비교해도 훨씬 많더라고. 올해는 이래저래 특이한 변수가 있다 보니 늘어난 것 같다.
“그동안은 제국에도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요. 이제 별일 없이 평온하니, 다음 세대를 이끌 동량을 직접 보고자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곳에 늘 머물고 있는 제 눈에도 매번 새로운 인재들이 보이는데, 외부에서 오는 분들은 얼마나 놀랄지 기대가 될 정도입니다.”
“이거 참, 듣는 제가 괜히 뿌듯해지는군요.”
제국 귀족 입장에서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이런저런 일’을 언급하자 빌라르의 표정이 급격히 온화해졌다. 내가 딱히 유쾌하지 않은 일까지 언급하며, 외부 손님 증가는 다른 의도 없이 우연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니까.
“사실, 제가 빌라르 경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빌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표정이 더욱 편안해지겠지.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배려를 베푸는 편은 아닌데, 빌라르를 보면 공무원의 애환을 응집한 결정체 같아서 특별히 해주는 거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박람회 인파는 상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 동아리 부스에도 사람이 꽤 몰릴 가능성이 높고요.”
그 말에 빌라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 사람이 몰릴 부스 속에서 주요 인사들을 지켜야 하는 게 빌라르의 임무다.
이미 외부 손님이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짐작했겠지만,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과 면전에서 ‘님 좀 개같이 구를 듯.’ 이라는 말을 듣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래서 빌라르 경과… 가능하다면 삼국의 다른 분들께서 손을 좀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손을, 말입니까?”
“예, 부스 내 인력은 많을수록 좋으니 말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할 것이다. 아니, 만약 불가능 하더라도 어떻게든 인력을 쥐어짜서 달려 올 것이다. 이 제안을 내가 아닌 삼국 측이 먼저 했다면, 정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가며 했어야 할 부탁이니.
본래라면 삼국 전력은 호위 전력의 입장으로 부스 근처를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 그 귀족들을 호위하는 병력과 기싸움을 해야겠지.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내 제안을 수락한다면 동아리 박람회에 참가하는 사람으로서 부스에 머무를 수 있다. 괜한 기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지켜야 할 주요 인사도 바로 코앞에 있지. 명분이 충분한 밀착 경호가 가능한데 거절하는 게 이상하다.
봐라, 굳어져 있던 빌라르의 눈빛이 빛나고 있지 않냐.
“저희가 감찰관님께 신세를 지는 것이 많은데, 어찌 작은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박람회 때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마음이 놓이는군요.”
서로 만족스러운 거래가 끝났다. 삼국 전력은 제국과의 충돌 우려가 한없이 0에 가까운 합법 호위가 가능해졌고, 나는 나 대신 개노답 부원들을 감시할 인력을 구했다. 사실 이것들이 부스 밖을 배회하다가 다른 귀족과 충돌이 생기면 내가 수습해야 된다. 그 꼴은 못 보지.
게다가 이렇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삼국 측에서도 내가 필요할 때 양보나 협조를 해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차피 손해가 없다면 이렇게 양보 스택을 쌓아두는 게 좋으니까.
마음이 놓였는지 빌라르가 책상에 쌓인 간식 중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루이제의 쿠키다.
“…독특한 풍미로군요.”
몇 번 씹자마자 잠시 말이 없던 빌라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과연, 기사라 그런지 곱게 자란 부원들에 비하면 얌전한 반응이다. 그것들은 본인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걸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었지.
하지만 빌라르가 그런 티를 냈다가 ‘그거 류티스가 만든 건데요.’ 라는 말을 들으면 극강의 탈룰라를 당해버리는 거다. 안타까운 입장이다.
“그렇지요?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맛입니다.”
물론 어떤 게 누가 만든 것인지는 말할 생각이 없다. 그래야 빌라르가 골고루 다 먹어줄 테니.
빙긋 웃는 내 모습에 빌라르도 작게 미소를 짓고는 조용히 쿠키를 마저 입에 넣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거 다 처리하기 전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못 나간다.
일일 짬통의 성능은 만족스러웠다. 역시 기사라 기초대사량이 높은 건지 잘 먹더라고. 내일도 부원들이 만든 것을 삼국 측에 보내주겠다고 하니, 빌라르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맛있는 간식들을 부하들과 나눠 먹을 생각에 기쁜 것이겠지.
뭐, 아니면 어쩔 건데. 부스 안에서 일하고 싶으면 주는 대로 먹어야지. 짬통은 음식을 가릴 자격이 없다.
“먹을 사람은 더 있으니, 마음껏 만들어도 괜찮다.”
그렇기에 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히 말했다. 이제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처리할 방법이 생겼으니 망설일 것이 없다. 남으면 그대로 삼국 측에 보내면 되니까. 거기 있는 입이 몇인데 고작 여섯이 만든 간식을 감당하지 못할까.
– 감찰관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만, 이리 과분할 정도로 챙겨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못하더라. 이 미친 새끼들, 진짜 공장에서 찍어내는 수준으로 만들었어.
통신구를 통해 보이는 빌라르의 눈은 암울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또 다시 낮은 확률로 오전에 올려버린 작가입니다. 독자님들과 신뢰를 쌓아도 모자른 판국에, 스스로 후기를 어기며 신뢰도를 깎는 작가는 드물 겁니다. 일단 제가 그 드문 작가라는 건 많이 유감스럽군요…
제가 제 예상보다 술에 덜 취해서 가능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제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텐데, 요즘 너무 마셔서 단련이 된 건가 싶기도 합니다.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