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20)
그렇게 다시 찾아온 침묵은 이번에도 외조모님이 깨셨다.
“그렇구나.”
덤덤한, 아니 덤덤함을 가장한 짧은 대답. 그 대답에 섞인 물기와 감정은 도저히 덤덤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 어미 품에서 도망치더니 영원히 떠나고 말았어.”
이어지는 말은 멀쩡한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외조모님이 입을 열수록, 말이 길어질수록 그 속에 담긴 감정도 폭발하듯 흘러내렸다.
“가슴에 대못을 박고 가더니, 뽑기는커녕 더한 걸 박고…”
무거웠다. 외조모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차마 외조모님처럼 고개를 들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안타까운 불행이다. 나도 어머니를 잃은 피해자이며, 그 불행에 내 잘못은 없다. 나와 외조모님은 같은 가족을 잃은 동지일 뿐이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이상하게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150년 동안 딸을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마지막 대화가 다툼이었던 외조모님에게 처음 보는 외손녀가 딸의 죽음을 전달한다는 것. 이 자체가 너무나 큰 죄악 같았다.
“…나는 인간을 싫어한단다.”
그리고 그 말에 몸이 굳고 말았다.
인간에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 외조모님, 외조모님의 만류에도 인간 세상으로 나간 어머니, 인간의 피가 흐르는 나.
“내 남편은 아펠스 시절에 변을 당했지. 내 남편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엘프들이 그때 먼 길을 떠났어.”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이종족이 아펠스 제국 시기에 무수히 많은 피해를 입은 건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외조모님도 피해를 입었다는 건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다. 설마 그 피해에 외조부님과의 사별이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우리의 신께서 내려주신 세계수도 불타오르고, 친우인 정령들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요정들은 울며 쓰러져갔지.”
이 역시 알고 있다. 엘프가 목숨처럼 여기던 세계수, 엘프의 친우인 정령과 요정. 그 모든 것이 아펠스의 손에 무너졌다.
“물론 지금의 제국이 아펠스와 다르다는 건 알지만… 한순간의 행운이 지금까지의 불행을 없던 일로 만드는 건 아니잖니.”
“…네, 맞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미약하게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하지만 외조모님의 말은 절대 웃을 수도, 평온하게 넘길 수도 없는 말이었다.
비록 크펠로펜의 덕을 봤지만 그걸로 인간에게 겪은 고통을 잊기에는 아펠스에게 시달린 시기가 너무도 길었다. 그렇기에 크펠로펜을 원망하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인간과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
“그래서 아리아드네가 인간 세상으로 나가는 걸 막았단다. 모든 인간이 악마 같은 건 아니지만, 선량한 인간만 본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리아드네에게 나와 같은 증오를 품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의지는 자식을 향한 염려로 이어졌다. 남편도 인간에게 잃었는데 딸마저 인간들에게 화를 입지는 않을까, 아니면 딸도 인간이라는 종족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그 걱정은 외조모님이 어머니를 막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딸이 아닌 남으로 취급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두 분은 그렇게 헤어졌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딸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던 모성애는 보답받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외손녀로서 외조모님을 위로해야 하나? 아니면 인간의 피가 흐르는 죄인으로서 고개를 숙여야 하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차라리 외조모님이 나를 원망하셨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 같─
“얘야.”
철없는 생각은 외조모님이 입을 열자마자 무너졌다. 막상 원망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편안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아리아드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네가 기억하는 걸로도 충분하단다.”
부드럽게 지은 미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 그 처량한 모순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외조모님의 요구는 어미로서 당연한 권리니까.
내가 기억하는 모든 걸 말했다. 어머니가 어떤 옷을 즐겨 입으셨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고, 어떤 날씨에 기뻐했고, 무슨 취미를 즐겼는지를.
가문의 사용인들에게 친절했고, 남편을 사랑했고, 딸에게 자상했고, 시어머니를 존중한 모습을.
비록 종족은 달랐지만 그것은 벽이 되지 않은 것을. 공작가와 공작령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것을.
“…그렇구나.”
그럴 때마다 외조모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다행히 이 못난 어미는 잊고 잘 살아간 것 같구나. 다행이야…”
하지만 그 말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그런 결론이 나와서는 안된다. 외조모님이 아셔야 할 건 어머니의 행복한 추억이지, 당신 없이 살아간 인생이 아니다. 스스로를 딸의 기억에서 사라진 어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정말로, 정말로 어머니와 외조모님의 마지막 추억이 막말이 오고 간 다툼이 되는 꼴이지 않나.
“아닙니다.”
그렇기에 감히 내 생각을 말했다.
“어머니는 외조모님을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보호 구역을 나가면 남으로 생각하겠다는 외조모님의 엄포. 어머니가 그 엄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연을 끊은 것은 아니라고.
“어머니는 무언가 싫어하면 싫어하는 티를 많이 내셨습니다. 불만이 생기면 아직 어렸던 저를 안고 푸념을 늘어놓으셨죠.”
사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다. 어린 아이가 들어도 알 수 없는 정치, 사교에 대한 불만을 궁시렁거리셨으니까. 그럴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러니 외조모님이 싫으셨다면 저에게 온갖 불만을 말씀하셨을 겁니다. 어머니도 외조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걸 겁니다. ”
그 말을 들은 외조모님은 눈을 잠시 크게 뜨시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셨다.
“엉망인 말이구나.”
“네?”
“나를 잊었다면 싫어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텐데, 당연히 아무 말도 안 했겠지.”
…
그런… 가?
“이리 와보렴.”
민망함과 설득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에 고개가 숙여지려는 찰나, 외조모님이 손짓을 하셨다.
“베아트릭스라고 했니?”
“네, 네…”
그러자 외조모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벌써 300년 정도 전이구나. 아직 아리아드네가 어릴 때, 아리아드네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를 읽어주고는 했지.”
그렇게 말한 외조모님은 가까이 다가온 내 어깨를 잡더니 당신의 무릎에 앉히셨다.
“크펠로펜이 아펠스를 몰아낸 즈음에 만들어진 동화니, 엘프와 인간의 우정에 대해 적은 동화였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리아드네가 유독 그 이야기를 좋아했으니 어쩌겠니. 읽어줘야지.”
그때부터 싹수가 보였다며 외조모님은 작게 웃으셨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민망하다. 내 나이에 남의 무릎에 앉다니. 이건 아가가 해줘도 부끄러울 지경인데, 심지어 외조모님 무릎이라니.
“왜 좋아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단다. 급하게 만들어져서 내용도 엉망, 재미도 별로, 개연성도 썩 좋지 못했지. 그래서 지금은 잊힌 지 오래인 동화야.”
이제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외조모님 덕에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마음에는 영원히 남은 동화가 됐구나.”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내 몸을 끌어안는 가녀린 두 팔이 느껴졌다.
“…나와 달리, 동화처럼, 인간에게서 사랑을 배웠어…”
팔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 팔뿐만이 아니라 나를 끌어안은 몸 전체가 떨렸다.
나 역시 조심스레 팔을 뻗어 외조모님을 끌어안았다. 지금은 어떤 말보다도 이런 행동이 좋을 테니까.
“그 동화처럼… 보물을 남겼어…”
그리고 외조모님은 다시 입을 다무셨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침묵은 어색하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던 외조모님은 작은 헛기침과 함께 포옹을 푸셨다. 아무리 외손녀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격한 감정을 보인 것이 부끄러우신 것 같다.
“미안하구나. 늙었더니 눈물만 많아져서…”
“아, 아뇨. 괜찮습니다.”
외조모님의 사과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식 잃은 어미의 눈물을 매도하지 않을 것이고, 외조모님의 눈물은 딸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외손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외조모님의 품에 안긴 내가 그 눈물을 부정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오히려 내 앞에서 솔직한 감정을 보여주신 외조모님께 감사하다. 인간에 대한 증오로 인간 혼혈인 나를 밀어낸 것이 아닌, 딸의 피가 흐르는 엘프 혼혈에 주목해주셨으니까.
“어미는 나이를 먹어도 천방지축이었는데 딸은 어린 나이에도 의젓하구나. 아무래도 성격은 아비를 닮은 모양이야.”
그래도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말씀하시는 것에는 적응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다른 동족들에게 애 취급을 당하기는 했지만, 주름까지 있는 분에게 따뜻한 시선을 받으니 정말 애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건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겪는다.
외조모님 입장에서는 500살 정도 아래인 외손녀는 애가 맞긴 하겠지만.
“저기, 얘야.”
그렇게 외조모님 무릎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외조모님이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혹시 트릭시라고 불러도 되겠니?”
그 말에 몸이 굳고 말았다. 트릭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 오직 가족만이 불러주던 내 애칭.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지만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내 애칭을 불러주는 가족이 생긴다는 건 기쁜 일이지 않나. 결코 눈물을 보일 일이 아니다.
“네, 외조모님.”
“너도 나를 외할머니라고 불러주렴.”
“그렇게 하겠습니다, 외할머니.”
내 대답에 외할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아마 나도 같은 표정이겠지.
나는 121년 만에 외할머니를 찾았고, 외할머니는 외손녀를 얻을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외할머니 눈에는 내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아기 정도로 보이는 건가?
“아리아드네가 200살이 될 즈음부터 손주를 기대했단다. 손주가 태어나면 무슨 이름을 붙일지, 어떤 옷을 입힐지, 어떻게 가르칠지. 그런 생각만 하면 한 달이 금방 지나갔었지.”
정말 감사하고도 감동적인 말씀이지만 지금만큼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예쁜 이름도 있고, 예의 바르게 자란 것 같으니 불만은 없지만 이것만큼은 아쉽구나.”
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는 눈에 모든 여력이 쏠렸으니까.
외할머니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 올린 옷. 내 시선을 강탈한 비범한 옷. 외할머니가 손주에게 입히고자 직접 만든 꼬까옷.
사실 꼬까옷 정도야 웃으며 볼 수 있다. 작은 아이가 입는 옷은 필연적으로 작은 법이고, 누구도 입을 수 없는 작은 옷은 그저 귀여움만 유발하는 법이다. 저 예쁜 옷을 작은 아기가 입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요즘 젊은 애들에게 늙은이가 간섭할 필요는 없어서 옷만 만들었더니, 이렇게 쌓였지 뭐니.”
문제는 외할머니의 애정이 가득 담긴 꼬까옷의 사이즈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 평범한 아기가 입는 옷부터 막 걸어 다닐 아이가 입을 옷, 심지어 성장이 끝난 성인이 입을 정도의 옷도 있었다.
그래, 성장이 끝난 성인이 입을 수 있는 꼬까옷이 외할머니 손에 들려있었다.
‘세상에.’
머리가 어지럽다. 프릴이 가득 달린 분홍색 원피스라니. 성인까지 갈 것도 없이 사춘기만 와도 기겁을 하며 사양할 옷이다.
“손주가 여자 아이라면 예쁠 것 같아 신경 써서 만든 옷이기도 하고.”
하지만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외할머니를 보고 직감했다. 아무래도 내가 저 옷을 입어야 될 것 같다고.
미칠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