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21)
‘어쩌지.’
답은 정해져 있다. 눈 딱 감고 외할머니께 ‘그럼 제가 입어봐도 될까요?’ 라고 하면 크게 기뻐하실 거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분명 알고 있는데, 나도 인간 사회에서 쌓은 존엄성과 명예가 있─
“…혹시 마음에 안 드니?”
“너무 예쁩니다. 당장 입어봐도 될까요?”
생각해 보니 지금은 엘프 사회에 있다. 인간 사회에서 쌓은 것들은 잠시 포기하자.
***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말라죽을 것 같은 느낌에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사이,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대화가 끊기고 계단으로 시선이 쏠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관심과 걱정이 마종공에게 쏠려있었으니 당연한 일. 오죽하면 소공작마저 눈치를 보며 주스만 홀짝였겠는가.
그리고 3층에서 내려온 건 장로뿐이었다.
‘최악은 피했다.’
안도감이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마종공이 아직 위에 있다면 최악의 상황은 피한 거다. 외손녀를 쫓아내지 않고 평범히 대화 중이라는 의미니까.
“칼이라는 아이가 누구니?”
“아, 접니다.”
심지어 마종공의 연인인 나를 찾는 걸 보면 부정적인 상황보다 긍정적인 상황에 가깝다. 축객령이라면 누군가를 찾지도 않을 테고, 엄포를 하기 위해서라면 전원에게 했을 터.
“잠깐만 올라와보렴.”
그 말을 남기고 휙 몸을 돌리는 장로. 살가운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적대적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딱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 같은 태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인간을 증오하고 있을 존재에게 중립적인 대우를 받는 건 과분한 대접─ 아니, 첫 만남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적이나 다름없다.
“트릭시에게 들었단다.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장로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가던 중, 장로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종공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면 최악을 피한 수준을 넘어 최선의 결과가 나왔─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구나.”
도로 표정을 관리했다.
하긴, 마종공이 외손녀로 인정받았어도 외손녀사위가 인간인 건 별개의 문제지. 오히려 외손녀로 인정한 만큼 눈에 불을 키며 상대를 고르려고 할 거다.
“하지만 내가 너희 사이에 간섭할 자격은 없겠지.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고, 너는 위안이 되었으니.”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종족 감정을 떠나서 집안 어른이 손녀의 결혼에 간섭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만 보면 어지간한 인간보다도 개방적인 생각인데, 정말 인간을 증오하는 게 맞나?
“트릭시에게 위안이 되는 아이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단다.”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장로의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인간에게 고통을 받았고, 딸이 인간과 결혼했다가 슬픔을 겪었음에도 외손녀가 인간과 만나는 걸 용인한다. 그런 결단을 내린 어른에게 무엇이든 못해줄까. 설령 현명공에게 목말을 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주는 것이 맞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예쁜데, 트릭시는 부끄러워하더구나. 아무래도 네가 보기 좋다고 설득해 줘야 내려올 것 같아.”
“예?”
무슨 말이야 그건.
‘부끄러워한다고?’
뭐 엘프식 전통 화장이라도 한 건가? 아니, 그래도 마종공이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부끄러워할 일은 없는데?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 것은 분홍색 프릴 원피스를 입은 마종공을 보고 난 뒤였다.
“아, 아가, 이건, 그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딱딱히 굳어 말을 더듬거리는 마종공.
‘그렇군.’
납득했다. 한두 살 먹은 애는 아니지만 한두 살 먹은 애처럼 취급당했구나. 그럼 부끄러울만하지.
솔직히 귀엽기는 했지만 입을 열면 창문 깨고 도망칠 것 같아서 참았다.
트윈테일도 못 본 걸로 했다.
다행히 외손녀의 귀여운 모습을 자랑하고 싶던 외할머니의 마음은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엘프들만 있었다면 다들 장로의 외손녀를 우쭈쭈하며 좋아했겠지만, 당장 계단을 내려가면 인간들만 열이 넘게 있다.
“베아트릭스가 장로님과 엘프들에게는 귀여운 아이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존경받고 있습니다.”
“존경? 이 아이를? 겨우 백 조금 넘은 아이인데?”
“인간 중에서는 백 살도 못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귀여운 외손녀가 인간들 기준으로는 최연장자 고인물이라는 사실에 문화 충격을 당한 장로. 그래도 제국 건국 시절, 인간들과 협력한 경험이 사라진 건 아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납득했다. 마지못한 납득이란 느낌이 강했지만, 아무튼 외손녀의 체면을 위해서라고 하니 인정은 해주더라.
“이제 백이 겨우 넘은 아이인데… 인간으로 치면 열 살이 넘은 수준인데…”
그래도 못내 아쉬운지 장로는 중얼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이게 종족 차이.’
아찔하다. 마종공에게도 가끔 종족 차이를 느꼈는데, 혼혈이 아닌 순혈 엘프를 상대하면 이 정도의 격차가 느껴지는구나.
앞으로는 마종공이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이게 그 충격요법인가 하는 그런 건가?
“아니란다.”
“어?”
그 와중에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젓는 마종공. 난데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 혼란만 가중됐다.
“열 살을 넘은 게 아니라 스물은 넘었단다. 난 혼혈이니까, 10%가 아닌 20% 정도야.”
“…….”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애처로운 표정을 보니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 아니다. 게다가 바로 반박이 나오는 걸 보면 즉흥적인 변명도 아니다. 평소부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그렇구나. 마종공은 스스로를 스물네 살이라고 생각했구나.
“10%였으면 위험할 뻔했네.”
고심 끝에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예비 부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
트릭시와 칼이라는 아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갔다. 도중에 1층에 있던 인간들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동족이 초대한 손님이자 트릭시의 친구들. 야박하게 대할 수는 없으니 편히 있다 가라고 했다.
‘외손녀라.’
바람을 쐬니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가출한 딸의 부고, 상상도 못했던 외손녀의 등장. 하루 사이에 겪기에는 너무 충격적인 일들이다.
‘…세상이 바뀌려는 건가.’
그리고 외손녀에게 인간의 피가 흐른다는 것, 그 외손녀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에 픽 웃음이 나왔다.
인간에게 고통받던 엘프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다니. 정말 동화 같은 일이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늘을 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우리 엘프의 어머니시자 세계수를 내려주신 위대한 신. 그리고 그런 어머니와 소통할 수 있던 유일한 수단인 세계수.
평소에도 그리웠던 어머니와 세계수지만, 오늘처럼 절실하게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아줌마, 아줌마.”
“울어? 울어?”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니 나무에 숨어있던 요정 몇이 날아와 근처를 맴돌았다.
이 아이들에게도 걱정을 끼치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오지 말라고 했잖니.”
그래도 혼낼 건 혼내야 한다. 세계수가 불탄 뒤로 숫자도 줄어든 아이들인데 괜히 모습을 보였다가 봉변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치만, 그치만.”
“저기, 저기, 신의 힘, 느껴져.”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잠시 밖에 나갔던 장로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정체불명의 비행체들과 함께.
‘뭐야 저거.’
처음에는 집 옆에 큼지막한 나무가 있길래 벌레도 큰 줄 알았다. 식물 근처에 날벌레가 있는 건 평범한 일이니까.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엄지손가락 정도의 크기에 날개까지 달렸지만 외견은 사람과 흡사한 생물. 한순간이나마 벌레로 착각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뭔가 날아다니길래 당연히 벌레인 줄 알았지.
“여기─”
“신, 신.”
“저기야, 저기야.”
열이 넘는 비행체를 끌고 온 장로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장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행체들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정확히는 타니안을 향해 날아와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하하, 특이한 분들이군요.”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타니안도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 미소를 지었다. 그야 엄지손가락 크기의 어린아이들이 머리카락이나 어깨에 매달리는 경험을 어디서 할 수 있겠나. 동화에서나 나올 이야기다.
그래서 얘네 뭔데. 적의는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두고 있지만, 뭐 하는 애들인지는 알아야지.
“손님에게 무례하게 무슨 짓이니. 어서 떨어지렴.”
“싫어, 싫어.”
“에넨 아저씨 기운, 오랜만, 그리웠어.”
그 광경을 보던 장로가 한숨을 내쉬며 비행체들을 타일렀지만, 장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비행체들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타니안에게 달라붙었다. 아까까지는 매달린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머리카락이나 옷을 방패 삼아 파고든 수준.
“저는 괜찮습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즐거운 일이지요.”
졸지에 둘 사이에 껴서 난처한 웃음을 흘리던 타니안이 부드럽게 말하자, 장로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저 쪼그만 애들을 힘으로 뗄 수도 없고, 당사자도 괜찮다고 하면 넘어가는 수밖에.
“헌데 이 아이들은 누굽니까? 에넨 아저씨, 라고 하는 걸 보면 평범한 아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타니안이 우리가 가진 의문을 대신 언급했다. 압도적으로 작은 크기, 날개, 졸지에 아저씨가 된 에넨. 일단 다른 걸 무시하더라도 타니안 입장에서는 에넨 아저씨라는 말에 움찔했을 터.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종족 같기는 한데 이런 이종족은 들어본 적이 없고, 인간보다 작다는 드워프조차 손가락 크기는 아니다. 애초에 드워프는 날개도 없고 귀엽지도 않지만.
“요정이라고 들어봤니?”
장로의 말에 타니안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오.’
나 쟤가 저렇게 놀라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에넨의 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