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26)
“괜한 걸 보여준 것 같군. 미안하다.”
직설적인 사과에 타니안이 잠깐 놀라더니 다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제가 형제님께 눈치를 준 꼴이라 민망하군요. 괜찮습니다, 사실 교단에서도 신을 잃은 이종족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함이지, 진정으로 포교를 위해 교구를 설치한 건 아닙니다.”
“위안?”
“예. 신께서는 신도들에게 마음의 평온을 주시지 않습니까? 비록 에넨께서 이종족들의 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의 공백은 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법이지요.”
의외다. 이종족 교구라고 해서 당연히 신을 잃은 이종족들을 잡아 먹기 위해 설치한 줄 알았는데.
“이종족 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가장 먼저 지은 건 교회가 아닌 급식소와 진료소였습니다. 지금도 진료소를 교회 대용으로 쓴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납득할 수 있었다.
말이 교구지 그냥 봉사 활동 단체구나. 그 정도면 사제들 입장에서는 교구 철수가 아니라 봉사 활동 중단이겠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이종족 교구에 계시는 분들은 승품에 욕심이 없는 분들이 자청한 경우입니다.”
마치 누가 들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장난스레 속삭이는 타니안에게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어.
“복잡한 얘기는 거기까지 하고, 지금은 놀자고. 엘프들은 많이 봤으니 이제 다른 이종족들을 봐야지!”
그렇게 대충 얘기가 끝난 것 같자 류티스가 타니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주제를 돌렸다.
그래, 맞는 말이다. 여러 이종족들을 보기 위해 왔으니 다른 종족들을 눈에 담는 것도 중요하지. 어쩌다 보니 엘프들하고만 오붓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런 만큼 남은 시간을 알뜰하게 써야 한다.
“소공작님도 더 놀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류티스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소공작에게 쏠리자 두 발로 걷는 거대한 개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 소공작이 보였다.
‘개?’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금방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저것도 수인이구나. 인간 형태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동물처럼 생긴 수인도 있었네.
아무튼 시선이 쏠리자 흠칫 몸을 떤 소공작은 애써 당당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저, 저는 앞으로 이곳을 관리할 체네스 공작이에요.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훌륭한 마음 가짐이에요. 좋은 공작님이 될 수 있겠는데요?”
당당한 선포에 마르게타가 박수를 치며 칭찬해줬다. 물론 급조한 핑계라는 건 마르게타도 알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도 기특하네. 아직 어리면서 그럴듯한 핑계도 만들고. 사교계에서 중요한 건 언변과 순발력이기는 하지.
‘제발 그렇게만 자라라.’
그러면 정말 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공작이 될 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살론 공작가의 가신들이 목숨을 걸며 보필할 거야.
“저기에는 인어가 있다는군. 인어와 함께 낚시도 한다는 모양이야.”
그런 소공작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은 라테르가 호수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인어와 합동 낚시는 뭐냐. 호수 아래에서 인어가 물고기를 몰아주는 건가? 그런 거라면 나도 보고 싶기는 하네.
***
부황께서 양위를 마음 먹으신 이후, 실권은 하나둘 나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제는 황제만이 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업무를 제외하면 전부 내가 처리하는 상황.
그렇기에 크펠로펜의 드높은 황권을 상징하는 격언, 예를 들어 ‘황제께서는 제국의 모든 일을 처리하신다.’ 같은 말은 슬슬 황제가 아닌 황태자라 부르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다.
물론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다. 개인이 모든 일에 손을 대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애초에 그런 일이 없게 하는 것이 관료제 아닌가. 충성스럽고 유능한 관료들이 먼저 사건을 접하고, 관료들로서도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소수의 일이 황제나 황태자 선까지 올라온다.
그러고도 상당한 양을 자랑하는 것이 안타까우나, 제국이 그만큼 드넓은 것이니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건 또 무슨.’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비와 저녁 식사를 하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던 중, 긴급 보고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직통 연락이 날아왔다. 그것도 연관점이 없는 두 곳에서 동시에.
[ 이종족 보호 구역에 속한 엘프 주거 지구에서 엘프들의 집결 확인, 세계수의 부활이 임박했다는 증언 확보. ] [ 이종족 교구 내에서 막대한 신의 기운 감지. 현장의 사제들은 에넨이 아닌 다른 신의 기운이라 판단. ]체네스 공작령과 아우스엔 대교구에서 올라온 보고. 세속과 교계에서 동시에 꽂힌 보고에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세계수?’
심지어 보고 내용에는 더욱 두통을 유발하는 단어가 속해있었다.
세계수가 무엇인지는 안다. 신화 시대에 존재한 것도 아닌, 아펠스 시절까지만 해도 대륙에 존재했던 신의 유산. 비록 에넨이 아닌 다른 신의 유산이나 여명 교단에서도 귀하게 여긴 나무.
안타깝게도 아펠스의 세 폭군 치세 때 불에 타버렸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엘프를 포함한 이종족은 격분했고, 여명 교단이 기함했으며, 대륙의 국가들도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세계수는 전 대륙적으로 상징성 넘치는 존재였다.
‘그게 부활했다고?’
놀라운 일이다. 아펠스의 천명 상실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세계수가 크펠로펜 시기에 부활했다. 이는 천명이 크펠로펜에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크펠로펜의 역대 황제들은 이종족의 맹우를 자처하고 있다. 모든 종족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제국 크펠로펜. 그 명분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는 사건이다.
단지─
[ 세계수 부활에 감찰부장이 개입된 것을 확인. ]체네스 공작령과 아우스엔 대교구의 보고에 공통적으로 끼어있는 문장. 이 문장이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아카데미가 체네스 공작령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건 알고 있다. 작년처럼 보야르가 아닌 체네스로 향한 것 자체가 부황의 의지셨으니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 갔으면 얌전히 여행이나 즐길 것이지, 일정 첫날부터 대형 사건을 선보였다.
‘언질이라도 줬으면…’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감찰부장은 이런 일을 독단적으로 저지르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지기 싫어서 바로 보고를 올렸을 테니, 이건 우발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터.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세계수의 부활은 황실과 제국에 이로운 일이다. 여명 교단에서도 세계수의 부활에 제국 관료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제국에 감사를 표할 것이다.
거기에 세계수의 부활 시점도 대략 10년 이내. 설마 10년을 최대치로 잡았으면서 1년 안에 부활할 확률은 낮으니, 내 치세에 세계수가 부활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인─
…
책상에 놓인 통신구를 잡았다.
결과가 좋다고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
이종족 보호 구역에서 신나게 놀고 소공작까지 공작성으로 돌려보낸 후, 오랜만에 온 것 같은 숙소에서 쉬고 있는 사이 통신구가 진동했다.
[ 이종족 보호 구역에서 일어난 세계수 부활 사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 ]아.
‘벌써 보고가 올라갔나.’
생각보다 빠르다. 신기한 경험을 한 소공작이 벌써 현명공에게 자랑한 건가? 아니면 체네스 공작령에서 실시간으로 보호 구역을 관찰 중이었나?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떻게 알게 됐냐는 이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으니까.
‘뭐라고 쓰지?’
도대체 뭐라고 보고서를 써야 하지? ‘내 몸에 신이 있었는데 그 신이 나무에 빌붙어서 세계수로 만들었어요.’ 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러면 보고서로 끝나지 않고 소환을 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든 되겠지.’
고민은 짧았다. 그렇다고 보고서에 허위 사실을 쓸 수는 없으니 사실대로 쓰자. 그걸 보고 황태자가 소환한다면 그때 가서 억울하다고 진상이라도 부리면 되고.
– 똑똑
“오라버니, 들어가도 될까요?”
“아, 응. 그래.”
게다가 지금은 보고서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제대로 말해야 한다.’
요정들로 인해 강제 커밍아웃 해야 했던 상처. 그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할 시간이다.
긴장감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보고서는 이상하게 쓰면 소환당했을 때 수습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루이제와 이리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수학여행에 함께 온 연인은 넷. 그중 내 상처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은 둘이고, 모르던 사람도 둘이다. 정확히 반반인 황금 밸런스.
이 황금 밸런스에 나까지 참여한다면 상처에 대해 함구한 인물이 셋이니 다수파를 형성할 수 있지만─
“오라버니의 일은 다른 사람들처럼 우연히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오라버니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어요.”
“미안하다…”
범죄자가 간수보다 많다고 우위에 설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이 자리에서는 나도, 마르게타도, 마종공도 죄인에 불과했다. 들키지 않았다면 범죄가 아니지만 들켰으니 죄인이다.
게다가 서운해하는 이유도 반박할 수 없었다. 반지까지 나눈 이상 우리는 단순한 지인이 아닌 그보다 가까운 관계다. 숨기는 일 없이 솔직해야 하는 입장이며, 남들보다 더 대우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상식. 그런데 루이제와 이리나 입장에서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대우를 받은 셈이다.
차라리 연인들 전원이 몰랐다면 모를까,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니 얼마나 서럽겠나. 심지어 알고 있던 사람이 첫 번째, 두 번째 예비 부인이라는 것도 결정적이었다.
‘누가 봐도 차별이잖아.’
중요한 연인에게는 말하고 덜 중요한 연인에게는 함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솔직히 나였어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기는 해, 망할.
“그래도 오라버니가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고, 그러니 다 설명해 주겠다고 한 거잖아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제의 말이 맞다. 부인 차별 같은 추한 이유가 아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얘기하지 못했던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적어도 오빠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이리나를 보니 안 그래도 거대했던 죄책감이 더욱 팽창하고 말았다. 이렇게 신뢰를 주는 아이들에게 나는 엿을 줬구나.
민망함과 죄책감에 눈동자를 스르륵 굴리니 나처럼 묵언 수행 중인 마르게타와 마종공이 보였다. 확실히 저 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을 터. 오히려 지금까지 함구한 나 때문에 싸잡혀 얽힌 거니 억울한 감도 있을 것이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는데, 괜찮을까?”
그런 만큼 빠르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더 시간만 끌면 답답한 사람은 더욱 답답해지고, 눈치가 보이는 사람은 고개만 숙일 테니.
“네.”
“모르는 것보단 낫죠.”
그리고 단호하고 뼈를 때리는 대답에 다시 입을 다물 뻔했다.
그러네. 내가 당연한 걸 물었네.
해명이라는 이름의 사죄쇼는 조금 수준이 아닌 많이 길었다.
우선 이 상처가 왜 생겼는지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대토벌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필수니까. 도저히 짧고 간략하게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역천자에게 부상을 입으면 회복이 불가능했거든. 지금도 부상을 치료하지 못해서 외팔로 지내는 사람도 있고.”
그렇기에 최대한 상세히 설명했다. 카간의 흉악한 무력과 더러운 회복 불가 저주, 그 카간과 싸우다 부상을 입은 수많은 피해자들, 마지막에 칼빵을 맞은 건 나였다는 슬픈 전설까지.
물론 대토벌 전쟁에 대한 설명을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6검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내기도 했으나 고맙게도 조용히 들어줬다. 사실 그 녀석들 참배가 가까워져서 조금 감정적으로 말한 것 같은데, 상처라는 주제와 걸맞지 않은 TMI임에도 들어줘서 고마울 따름.
“아물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통증도 없고 생활에도 지장이 없어. 그래서 급하게 말하기보다는, 너희가 놀라지 않을 시기에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미안해.”
어쨌든 결론은 다시 사과였다. 루이제와 이리나가 놀랄까 봐, 함부로 꺼내기 어려워서, 딱히 자랑할 것도 아니라 등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들킨 이상 이유가 아닌 핑계에 불과하다.
그러니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