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28)
“마음은 감사하지만! 돈을 받은 입장에서 손님들께 최선의 대우를─”
은화 몇 개를 건네줬다.
“즐거운 시간 되십쇼! 전 근처에 있을 테니 돌아가실 때 찾아주시면 됩니다!”
꼬리를 흔들며 빠르게 모래사장을 벗어나는 켄타우로스를 보니 이제는 유쾌할 정도였다.
“재밌는 분이다.”
“그러게. 다른 켄타우로스 분들도 저러려나?”
루이제와 이리나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 모든 켄타우로스가 저렇지는 않을 거다. 만약 켄타우로스 종족 자체가 저리 살가운 존재였다면 아펠스 시절에 멸종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인간에게 살가웠다가 -인간- 당한 종족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슬픈 일이다.
“셋이나 태우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이제는 우리끼리 있자.”
물론 지금은 멀쩡히 살아가는 종족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셋만의 시간을 즐기는 게 중요하지.
***
안장에서 내렸을 때는 많이 아쉬웠다. 합법적으로 오빠와 붙을 수 있는, 그것도 뒤에서 껴안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성인 셋을 태우고 열심히 뛰어다닌 분을 더 혹사시킬 수는 없으니 조용히 내렸다. 그리고 켄타우로스 분이 자리를 비켜준다면 나와 오빠, 루이제만 남는 거 아닌가. 오붓한 셋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오히려 좋아.’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오빠와 바다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작년 수학여행으로 보야르 공작령에 가기는 했지만, 그때는 바다에서─
“흐아아아아앙! 흐끅, 흐으으, 흐어어엉!”
끔찍한 기억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좋은 추억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한 명의 귀족이자 레이디, 사람으로서 남자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 심지어 아래로도… 영 좋지 않았던 기억. 나와 오빠가 바다에서 함께한 기억은 그런 기억밖에 없다.
‘덮어야 돼.’
일종의 사명감마저 들었다. 이 부끄럽고 추악한 기억을 다른 행복한 기억으로 덮지 못한다면 난 영원히 바다에 오지 못할 것이다.
물론 오빠와 데이트 중에 바다에 왔다는 것 자체로도 절반은 성공했다. 이제 모래사장에서 산책도 하고,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고, 근처에서 파는 음식도 먹으면 트라우마와는 영원히 작별할 수 있어.
‘수영복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욕심이 슬쩍 고개를 들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일이 꼬이는 법. 수영복은 다음 기회를 노리자. 어차피 오빠와 같이 보낼 여름은 많으니까.
“아, 오셨다.”
멀뚱히 상점가를 보던 루이제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음료를 들고 다가오는 오빠가 보였다.
‘어…?’
그리고 오빠의 손에 들린 음료를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아무래도 미친놈들하고 일하다 보니까 나도 미쳐버린 것 같다. 사람 새끼라면 최소한의 눈치나 이성은 챙겨야 하는데.
“그게, 내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뭐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머리 색깔에 맞는 걸로 사서…”
내가 준 음료를 쥐고 말없이 시선을 내리깐 이리나. 그런 이리나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
애석하게도 효과는 없었다.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침묵 상태에 돌입한 이리나는 어떠한 변명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친놈.’
자괴감이 들었다. 음료를 사서 돌아오니 이리나가 굳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리나에게 레몬에이드를 주는 건 끔찍한 악수였다.
단순히 음료를 주는 정도면 문제 없겠지만 하필 여기가 바다라는 점, 그리고 이리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목격한 내가 건네줬다는 점에서 이리나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을 거다.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어도 할 말이 없다.
‘어쩌지 이거.’
일단 이리나가 멀미를 하는 것 같다는 핑계로 루이제와 떨어지기는 했는데,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루이제도 의심을 시작할 터. 최대한 빠르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빨리 돌아가지…?
“오빠.”
“어, 응. 말해.”
다행히 침묵 상태였던 이리나가 다시 입을 열어줬다.
“저 괜찮아요. 레몬에이드, 맛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리나의 공허한 눈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머리에서 작년의 일을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아니, 정확히는 없던 일로 넘어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극도의 치욕과 절망에 시달리던 이리나는 결국 현실 도피를 시작한 거다.
“…응, 그렇지. 맛있지.”
덕분에 나도 애매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사과와 변명을 해봤자 이리나에게 작년의 일을 강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침묵을 넘어서 눈물을 터뜨릴 일.
‘미안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미친 트롤링이다. 이리나 입장에서는 예민하고 섬세할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가족에게도 보일 수 없는 꼴을 보인 거다. 그 치욕을 잊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다시 기억나게 만들다니,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네.
“루, 루이제가 기다리겠어요. 어서 돌아가─?”
그렇기에 사과의 의미로 이리나를 안아올렸다. 부끄러운 기억을 자극했다면 좋았던 기억으로 상쇄해야지.
“루이제한테는 멀미가 진정될 때까지만 이러고 있는다고 하자.”
그 말에 이리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도 부끄러운 꼴을 보인 직후에 있었던 일이라 트라우마일 수 있지만, 지금은 연인인 사이니 좋은 기억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이리나의 멘탈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 뻔한 사소한 소란이 있었으나, 이리나는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덕분에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계속 바다를 언급해서 미안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게 바다인 걸 어떡해.
그러니 더욱 반성하자.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 레몬에이드를 고르다니,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때 일을 떠올렸다는 의미 아닌가. 미친 새끼가 따로 없다.
“오라버니. 저도 멀미 나는 것 같아요.”
“좀 봐줘. 두 명은 무리야.”
그 와중에 이리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루이제가 농담 섞인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농담으로만 끝났다. 오히려 안긴 상태로 돌아온 이리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지.
루이제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멀미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멘탈 붕괴라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이건 평생 함구해야 할 일이다.
“오, 오빠. 이제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앉을만한 곳 찾기 전까지는 이러고 있자. 무리해서 걸으면 더 안 좋아.”
그리고 그 미안함은 이리나도 마찬가지인지 먼저 내려달라는 말까지 꺼냈다. 당연히 들어주지는 않았다.
‘내 양심이 아파.’
가만히 있던 이리나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먼저 안아올렸으면서 눈치가 보인다고 내린다? 너무 제멋대로인 행동이다. 지금은 이렇게 붙어있는 게 정답이지 않겠나.
순간 괜히 바다로 왔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미 왔으니 무를 수는 없는 일. 차라리 오늘 좋은 추억만 만들어서 이리나의 흑역사를 지워버리자.
“아, 저기 오징어도 파네요?”
아무런 악의가 없을 루이제의 말에 이리나가 흠칫 떠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지우는 건 힘들겠지만 최대한 노력하자.
기껏 바다까지 왔으나 수영복을 준비하지 못해 물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바다는 모래사장을 거닐며 구경하는 걸로도 운치가 있는 법이니 아쉽지는 않았다.
사실 이 미묘하게 발전한 세계관을 생각하면 근처에서 수영복을 대여해도 이상할 건 없다. 실제로 근처를 보니 몇 군데에서 대여하는 것 같았는데─
“귀족이 평민들도 사용하는 물건을 공유하면 곤란해져요. 품위가 상한다고 생각하는 귀족도 있고, 귀족 다음으로 쓸 평민들도 괜히 눈치를 보거든요.”
부드럽게 거절하는 루이제를 보니 더 권할 수도 없었다. 루이제가 까탈스럽거나 권위적인 편도 아닌데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단순히 체면 문제가 아닌 상식 문제에 가까운 것 같으니까.
이럴 때마다 내가 빙의자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잊을만하면 상식 차이를 실감하니 원.
“애초에 남의 물건을 대여하지 않으면 상관 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는 귀족들도 많지만요.”
“그것도 그렇겠네.”
머쓱해하는 나를 보며 루이제가 빙긋 웃어줬다.
고맙다, 위로도 다 해주고…
“그래도 조금은 아쉽네. 이왕 바다까지 왔는데 구경만 하고.”
“물에 들어가실 생각은 있고요?”
키득거리는 루이제의 말에 무심코 상처 부위를 쓰다듬고 말았다. 아직 잔재가 사라지지 않아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 상처.
납득했다. 확실히 수영복이 있었어도 나는 구경만 했겠네.
“게다가 너무 즐겁게 놀면 좀 죄송하기도 해요.”
“응?”
슬쩍 덧붙이는 이리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다니, 오늘은 마르게타와 마종공이 사과의 의미로 양보한 시간 아닌가? 그 시간을 즐기는 게 뭐가 문제라고.
“저랑 루이제는, 그으, 다른 분들에 비하면 끼어든 느낌이 있잖아요? 오빠랑 만난 기간도 적고, 추억도 적고…”
애써 웃으며 말하는 이리나였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루이제마저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심스레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는 것에, 동시에 저런 생각을 할 때까지 방치했다는 것에.
물론 이리나의 말처럼 둘을 처음 만난 건 작년의 일이다. 대토벌 전쟁 직후에 만난 마종공과 과장들, 2년 전에 만난 마르게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늦은 만남이기는 하다. 늦게 만났으니 필연적으로 추억이 적은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늦게 만난 것과 ‘늦게 만났으니 눈치를 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이건 자존감과 서열이 걸린 문제니까.
‘소홀했구나.’
착잡하다. 과분한 인연인 만큼, 그런 인연들이 사이좋게 양보하며 나와 함께해 주기를 결정한 만큼, 나 역시 여섯에게 부족함 없고 서운함 없이 대하자고 다짐했다. 부인들은 문제가 없는데 남편이 헛짓거리를 해서 불화가 생기면 무슨 염치로 고개를 들겠나.
‘최대한 공평히 대하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저 노력에 불과했던 것 같다. 고작 상처에 대한 정보조차 공평하게 알리지 못해 루이제와 이리나가 기겁을 했고, 그 이전에도 내가 인식하지 못한 일들이 겹치며 둘에게 은근한 위축을 줬을 확률이 높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늦게 만난 둘에게 안심을 주려면 보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하는데, 기계적인 공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50과 10에서 10씩 분배해 봤자 40이라는 격차는 절대 메울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애초에 내가 기계적인 공평이라도 보여줬나? 루이제와 이리나뿐만 아니라 연인들이 안심할 사랑을 표한 적이 있었나?
“기껏 좋은 마음으로 양보를 해준 건데 너무 저희끼리만 좋으면─”
이리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루이제와 이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침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어서 딱 편한 위치.
“흐잇!”
“오, 오빠!?”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각기 다른 반응이 돌아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보라고 생각하지 마. 오늘은 마르랑 베아트릭스가 실수해서 정당하게 가진 시간이야.”
둘의 속내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방금도 추억이 적어서 끼어든 느낌이라고 했으면서, 정작 우리끼리 추억을 쌓는 것을 망설이고 미안해한다. 말도 안 되는 모순이지만 그만큼 기가 죽었다는 의미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