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31)
그렇기에 부황께서는 이번 사태를 제2의 역천자 사태로 취급하시는 거다. 한 번 뭉쳐서 반기를 든 자들이 두 번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 멍청한 짓이니.
“끊임없이 뭉치려 하는 자들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 말씀에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부황은 실권을 넘기며 양위를 준비 중인 늙은 군주가 아닌, 후계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제국의 유일무이한 지배자였다.
“단호히 응징하여 그들 역시 길고 긴 제국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함을 깨닫게 만드소서.”
한때 제국의 천명을 위협한 흉적, 제국이 개척해야 할 북방에 자리 잡은 이물질. 그러한 적들에게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과격한 대답.
물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며 최선의 방안을 모색해야 할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너무 저돌적인 방식일 수 있다. 아직 평화롭게 마무리할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짐의 뜻이 태자와 같다.”
허나 부황께서는 그러한 대답을 원하셨다.
그것이 황실의 위엄과 천명의 굳건함을 널리 알리는 길이기에.
***
참배 때 사용할 보야르 와인은 장관이 준비하기로 했다.
재작년에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가 시중에 풀린 걸 구하지 못해서 황금공에게 사정했고, 작년에는 둘 다 구하는 것에 성공해서 와인만 12병을 마련한 적이 있었으니까. 또 그 꼴을 볼 바에는 혼자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짐은 다 챙겼니?”
“몸만 가면 되는데 뭘.”
덕분에 올해는 양손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긴, 멀리서 참배 오는 사람보다는 제도에 있는 사람이 준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 녀석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게다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상관이 사는 술을 받아먹겠나. 제라드도 전쟁이 끝나면 장관 지갑 털어먹겠다고 벼르고 별렀는데, 매년 보야르 와인으로 대접받으면 소원 이루는 거지.
“오랜만에 에리를 보겠구나.”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마종공을 보니 이제는 1과장에게 경이로움까지 느껴질 정도다.
마종공을 상대로 빠르게 언니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자기를 애칭으로 부르게 만들었다. 통신구로 연락하는 게 고작일 텐데 이 정도 친밀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황태자비도 이렇게 홀린 건가.’
대충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종공도 홀렸는데 황태자비라고 못할 게 어디 있겠어.
“자, 슬슬 가자꾸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마종공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사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면 굳이 신체를 접촉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까지 이동시킬 수 있지만, 이왕이면 잡고 가는 게 좋지 않겠나. 이럴 때 조금씩 스킨십도 하면 좋은 거지.
그리고 내 손을 잡은 마종공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가, 나도 그 아이 묘에 가면─”
“괜찮아. 다음 기회에 가자.”
조심스레 입을 연 마종공에게는 미안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마종공이 말하는 그 아이는 헤카테. 나 역시 연인들이 헤카테의 묘에 갈 필요가 있다는 건 인정하나,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니다.
“참배할 때 장관도 있거든. 연인을 소개하는 자리인데 옛 상사가 있으면 이상하잖아. 다음에 좋은 날 잡아서 다 같이 가자.”
“…그래, 아가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중요한 자리를 마치 떨이를 하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다는 말. 다행히 그 마음을 이해해줬는지 마종공도 내 뜻을 존중해줬다.
‘그림이 이상하긴 하지.’
옛 상관이 있는 참배 자리에서 연인 소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한 그림이다. 거기다 그 녀석들을 위한 참배에 다른 목적을 넣는 것도 실례인 일이고.
어차피 방학 기간에는 제도에 있을 테니 그때 가면 될 거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딱 추모 시간에 맞춰 움직였다. 나 혼자였다면 감찰부에 박혀 시간이라도 보냈겠지만, 마종공과 같이 움직이는 상황이니 자제해야지. 감찰부로 가면 공작의 기습 방문을 당하는 것이고, 마탑으로 가면 수장이 오는 것이고, 내 저택에 가기에도 예비 안주인 중 하나가 오는 것이다. 가불기 미쳤네.
“왔냐? 안 오길래 죽은 줄 알았다.”
덕분에 추모 자리에서 장관과 마주치자마자 생존 확인 인사를 듣게 됐다.
“그런 것치고는 연락 하나 안 하시던데요.”
“어련히 부활할 거라 생각했지.”
이상한 농담을 뱉으며 픽 웃던 장관은 내 옆에 있던 마종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브리아드 백작가의 가주, 제국 재무성 장관 데베르 브리아드 오브 블로첸이 존귀하신 마종공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입니다, 장관. 건강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각하께서 염려해주신 덕입니다.”
일개 백작에게 정중히 답하는 마종공의 모습에 장관이 흠칫 몸을 떨었지만, 금방 마음을 다스렸는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현명한 대처였다. 마종공은 장관이 내 직속 상관이기에 정중히 대한 것인데, 그 상황에서 장관이 난색을 보였다면 오히려 상처를 입었겠지. 역시 전장에서 보이던 순발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전승공 각하는 앞줄에 계십니다. 저와 감찰부장도 앞줄이니, 같이 가시지요.”
공작이기에 마땅히 앞에 서야 한다는 말에 마종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공작이 뒷줄에 서있으면 모양새가 나쁘긴 하지.
‘작년보다 화려하네.’
그리고 앞줄로 걸어가며 추모 자리에 모인 인사들을 확인했다. 행정부에서 궁내성 장관, 전쟁성 장관이 참여한 건 작년과 같았지만, 의회에서는 의장인 바르돈 백작이 직접 왔다. 심지어 군부에서도 고위직이 여럿 보일 정도.
해가 지날수록 웅장한 라인업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적어도 그 녀석들이 잊힌 영웅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웅성거렸던 추모 자리는 궁내성 장관이 추도사를 대독하기 시작하자 조용해졌다. 정숙을 지켜야 할 자리이자 황제의 글을 대독하는 자리에서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제국은 하루아침에, 한 사람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영웅들이 피로서 적은 역사가 있기에 오늘날 제국이 있는 것이다.”
추도사 내용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웅들을 위한 애도, 그 영웅들이 있었기에 제국도 있다는 극상의 찬사.
사실 이미 끝난 일을 언급하는데 매번 내용이 달라지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하다. 황실이 대토벌 전쟁 자체를 흑역사로 취급하여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언제나 이런 내용이겠지.
“선대로부터 흘린 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그 영광과 희생을 후대에 넘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피를 경계하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했었다.
“제국의 역사는 헌신과 의무, 영광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우리 역시 역사의 일부이며, 그 역사를 우리 대에 끊는 것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악이다.”
강도 높은 발언에 침묵을 유지하던 귀족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퍼졌다. 피, 유산, 희생. 그리고 그것들을 후대에 넘기기 위해 피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 그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뻔하니까.
물론 예외는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추도사를 대독하는 궁내성 장관,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전승공. 황제의 최측근과 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거물들은 그저 자리를 지키며 제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머리가 있다면 누구나 이상 사태를 떠올릴 수 있는 조합. 과연 이 조합이 어디까지인가 확인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미간을 찌푸린 장관과 복잡한 표정을 짓는 마종공이 보였다.
‘저 둘이 끝이다.’
행정부 서열 2위인 장관, 현직 공작도 모를 정도면 그 아래는 말할 것도 없다. 철저히 두 명과 상의한 후 터뜨린 발언이라는 것이다. 더 넓혀봐야 황태자나 특무성 장관 정도일 터.
그리고 행정부, 제국의회, 군부의 고위직이 모인 자리에서 터뜨렸다는 건 빠른 시일 내에 공론화하겠다는 것.
“─영웅들의 희생과 의지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후대까지 이어지리라.”
동요 속에서 대독이 끝났고, 이후 기계적인 묵념이 이어졌다.
나조차 머리가 복잡한 묵념이었다.
1년─ 아니, 반년 정도 만에 다시 찾은 묘비였으나 보야르 와인만 빠르게 먹여주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묘비 앞에 있어봤자 다른 생각만 가득할 것 같으니, 차라리 다음에 인사하러 오는 게 낫겠지.
“부장님.”
“왜.”
장관이 참배를 마치자마자 급하게 자리를 뜬 직후, 2과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정보 통제도 풀렸을 겁니다.”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추모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터뜨렸으니 정보도 하나둘 풀리기 시작할 터. 2과장이 바로 움직이면 제법 유용한 정보들을 물고 올 거다.
“가 봐. 필요한 거 있으면 먼저 쓴 다음에 보고 하고.”
“예.”
허리를 숙였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2과장. 그런 2과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여러 의미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날인데, 이제는 머리까지 복잡하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게 마른 세수를 몇 번 하다가 아직 남아있는 간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들도 황제의 추도사를 들었으니 골치 꽤나 아프겠지. 더 붙잡고 있기보다는 2과장처럼 보내주는 게 옳다.
“너희도 먼저 가. 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
“알겠습니다.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대표로 입을 연 차장을 따라 다른 간부들도 줄줄이 사라졌다.
1과장만 빼고.
“부장님, 어디 앉았다 갈래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됐어. 밖에 베아트릭스도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가야지.”
그런 1과장을 향해 작게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참배도 빨리 끝낸 상황 아닌가. 계속 묘지에 머물러봤자 좋을 것도 없다.
애초에 딱히 앉을만한 곳도 없고. 묘비에 앉는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잖아.
“저기, 부장님. 동아리 시간 전까지는 제도에 있으실래요?”
그 말에 다시 1과장을 쳐다봤다. 다른 때에 이랬으면 얘 또 혼자 있기 심심해서 조르는 거라 생각했을 텐데.
‘그게 좋긴 하겠지.’
애석하게도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1과장의 말대로 하는 게 좋다. 2과장은 정보 통제가 풀려서 미친 듯이 쏟아질 정보를 긁어모을 테고, 차장도 나름의 방법으로 특이사항을 찾아낼 거다.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아카데미로 가버리면 무수한 정보를 대면이 아닌 통신구로 접해야 한다. 하루 종일 제도에 있는 건 무리지만, 적어도 동아리 시간 전까지는 있어야겠지. 어차피 마종공이 있으니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사실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1과장과 놀아줘야 하니 남아있었겠지만.
“…셋이서 식사라도 하자. 괜찮지?”
“네!”
일단 감찰부는 피하자. 한창 구르는 중에 부장이 버티고 있으면 눈치만 보이겠지.
***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는 부장님을 보다가 슬쩍 베아트릭스 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니도 머리가 복잡한지 느릿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오랜만에 부장님과 언니를 보는 거지만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그렇다고 억지로 띄우기에는 그게 가능한 사안도 아니고.
‘하필 이런 날에.’
분위기 때문에 참고 있지만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다. 전사자들을 위로해야 할 날에 전쟁이 언급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아니, 물론 다른 날도 아닌 대토벌 전쟁 종전 기념일이니 더욱 북방의 안정을 강조할 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적이다.
‘나도 이런데 부장님은…’
부장님이랑 같이 참배는 오지만, 사실 6검분들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과도 다르고 활동 지역도 달랐으니 대토벌 전쟁 전에는 이름도 모르고 있었지. 그저 종전 이후에야 감찰부 4과 소속 팀장들이 맹활약을 했다는 걸 들었고, 그 팀장들이 부장님의 절친한 친우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기에 부장님이 걱정된다. 이름만 아는 나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부장님은 오죽하겠나. 6검분들을 위한 날이 소란으로 뒤덮였다는 불쾌감, 동시에 그런 소란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이변에 대한 걱정. 그 감정으로 인해 속이 타들어갈 거다.
입 밖으로 복잡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누나는 다 안다. 내가 부장님을 몇 년이나 봤는데.
“언니, 여기 와인 중에 세르베트에서 만든 와인도 있더라고요.”
“아, 그래. 보야르 와인 수준은 아니지만 세르베트의 와인도 괜찮지. 그래서 수도권에서는 제법 팔린단다.”
부장님의 안색을 살피다가 슬쩍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은 언니의 기분을 푼 다음에 둘이서 부장님을 달래야 할 것 같으니.
다행히 언니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받아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