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37)
그리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지금의 다짐이 다소 흐려질 가능성이 있다.
‘미리 챙겨놔야지.’
그래서 오랜만에 검을 손에 잡았다. 단순한 목검이나 예비용, 수련용이 아닌 북방에서 함께한 검을.
무심코 검집에서 검을 뺐다. 붉은 검날이 북방에서 흘린 피를 상징하는 것 같…
?
‘뭐야 시발.’
이거 왜 빨개.
녹이라도 슬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 어, 뭐야?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 어? 어어? 이거 뭐지? 이런 게 있었어?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는 여성의 목소리.
‘영원한 푸른 하늘?’
왜 또 네가 튀어나와.
제과 동아리실에 홀로 앉아 멍하니 창문 밖 하늘을 응시했다. 워낙 폭풍 같은 일이 연달아 터져서 그런지 머리가 복잡하고 지끈거린다. 마음 같아서는 한 사흘 내내 잠만 자고 싶을 정도로.
– 사람이 그렇게 오래 자면 몸 삭아.
심지어 머리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목소리 때문에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냥 해본 생각입니다. 그렇게 자지도 못해요.’
– 그래? 그럼 다행이고.
평온한 여성─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목소리에 슬쩍 한숨을 내뱉었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내 머리에 속삭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거주지를 내 몸에서 세계수(진급 예정)으로 옮긴 직후에도 이러지 않았나. 물론 며칠 만에 내 몸에 남은 신의 잔재가 사라지면서 대화가 끊겼고, 나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인연은 거기까지인 줄 알았다.
내 애병이 이상하게 진화한 걸 알아채기 전까지는.
‘이런 진화는 필요 없는데.’
허리춤에 매단 검을 씁쓸히 바라봤다. 튼튼하고 손에 익어서 애용하던 검이 순식간에 신물로 진화해버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납득이 가는 진화다. 예수의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찌른 창도 롱기누스의 창이니 뭐니 성물 취급을 받지 않나. 그런데 내 검은 사망 확인이 아니라 그냥 사망으로 인도한 검이다. 사도를 직접 베고, 피가 듬뿍 묻은 미친 물건.
그런 검을 아무런 정화나 조치 없이 3년이나 묵혔으니 영원한 푸른 하늘과 연관된 신물로 진화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 어? 어어? 이거 뭐지? 이런 게 있었어?
정작 신 당사자마저 모르고 있었다는 건 기묘한 일이지만. 이게 그 관측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슈뢰딩거인가 뭔가 그건가.
– 그런데 신물 준다는 거 정말이지? 정말 용무 끝나면 주는 거 맞지?
‘제가 먼저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은 안 합니다.’
그 와중에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다시 내뱉는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대충 대답했다.
애병을 넘겨주는 건 조금 아쉽지만, 카간의 피가 스며든 검이라고 생각하니 계속 가지고 있기도 찝찝하다. 게다가 신물을 영원한 푸른 하늘에 반납하면 세계수 진급 속도도 더 빨라질 것 아닌가. 가지고 있는 것보단 넘기는 게 이득이다.
대신 용무가 끝난 다음에 준다는 조건을 붙였지만, 전부 사라진 줄 알았던 신물을 공짜로 받게 된 입장에서는 그조차 감지덕지 아니겠나.
– 크흐, 미안해. 오랜만에 보는 신물이라 두근거려서.
다시금 신물 양도 확답을 받자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영원한 푸른 하늘. 나름 신이라 그런지 거슬리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저기,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어? 뭔데?
‘세계수에 있는 분이 왜 계속 저한테 말 거는 겁니까? 근처에 엘프나 요정도 있잖아요.’
얼마 전부터 품었던 근원적 의문에 영원한 푸른 하늘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기는 하잖아. 집이 없는 양반도 아니면서 왜 나한테 들러붙어. 처음에는 신물에 홀려서 질척이는가 싶었는데, 준다는 확답을 듣고도 나한테 말을 걸고 있다.
– 저쪽은 피곤해.
‘예?’
돌아오는 답은 예상 외였다.
– 떠받들어줘서 고맙지만, 너무 피곤해. 거의 1시간 단위로 안부 인사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니까 정신이 없어.
절절한 피곤이 느껴지는 말에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 특히 요정들은 쉴 새 없이 떠들더라. 콘스탄티나는 이런 애들을 어떻게 돌본 건지…
신적인 존재가 지금만큼은 조카들에게 시달리다 도망친 이모처럼 느껴졌다.
요즘 아카데미 분위기는 썩 좋지 않다. 정확히는 황제의 소집령이 있던 날부터 그렇다.
소집령에는 황자인 아인테르, 부장급 인사로 취급받는 교장도 참가하였기에 아카데미 전체에 소집령 소식이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정규 수업 시간에 황자와 교장이 급하게 자리를 비우니 모를 수가 있나.
결정적으로 황제가 귀족들의 사병과 군납금을 탈탈 털어버리기도 해서 귀족 자제들인 학생들도 개전 선언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당장 가문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는데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오라버니, 꼭 가야 돼요? 오라버니는 아카데미 일로도 바쁘잖아요. 다른, 다른 사람이 가는 건…”
그리고 그건 제과 동아리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했다. 소집령에 참석한 아인테르와 마종공, 종군이 결정된 나. 이런 가슴 웅장해지는 라인업이 버티고 있으니 이번 개전 선언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심지어 손님인 이리나마저 소집 대상자인 플란벨 백작의 딸이다. 정말 화려한 라인업이네.
그렇기에 나는 소집령 이후로 눈물 겨운 설득에 시달리고 있다. 회장실로 가면 마르게타에게, 동아리실에 오면 루이제와 이리나에게.
그나마 내 종군이 황제의 뜻이라는 걸 아는 마종공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그런 마종공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걱정하지 말래도. 나는 감찰관으로 합류하는 거야. 어지간하면 사령부에만 있을 테니 싸울 일도 거의 없어.”
아무튼 매번 반복되는 설득에 매번 같은 말로 진정시켰다.
매일, 그것도 하루에 여러 번이나 듣는 말이지만 귀찮지는 않았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귀찮아할 리가 있을까. 오히려 고맙고 미안할 뿐이지.
“전투 인원으로 가는 것도 아니야. 병력이 많이 모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길 테니, 가서 확인하는 역할이지.”
물론 거짓말이다. 작위와 영지까지 주며 나를 전쟁으로 보낸 황제가 고작 비전투 역할을 바랄 리가 없다. 최전선에서 싸우라는 건 아니지만, 유사시 투입될 조커 정도는 하라는 거겠지. 나도 원하는 바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전쟁터에 간다는 걸로도 기겁하고 울먹이는데, 직접 싸울 수도 있다? 그러면 혼절하거나 오열할 미래가 뻔하다.
‘하얀 거짓말.’
연인 사이에 숨기는 건 없어야 하지만 이건 연인의 멘탈을 위한 선행이다. 세상을 살면서 약간의 거짓말 정도는 필요한 법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북방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문제잖아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루이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루이제를 비롯한 다른 연인들이 나를 만류하는 건 단순히 전쟁이 위험해서가 아니다. 내가 지난 대토벌 전쟁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그래도 어쩌겠나. 루이제가 말리는 그 이유가 내가 다시 북방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인데. 이 역시 솔직하게 말할 일은 아니니 함구하는 중이지만.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내가 가기 싫었으면 순순히 간다고 했겠어?”
황자가 있는 자리에서 하기에는 역적 향기가 느껴지는 발언이지만, 루이제는 물론 가만히 듣고 있는 이리나와 마종공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말은 해야 한다.
애초에 아인테르도 루이제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침묵하는 중이고, 내가 정말 안 간다는 의미로 한 말도 아니니까.
“그리고 작위도 받았잖아. 자식한테 물려줄 게 하나 늘었─”
“오라버니!”
빼액 소리치는 루이제와 눈매가 날카로워진 이리나.
망할, 이건 사족이었나. 거의 넘어간 것 같았는데 자살골을 넣어버렸네.
그런데 물려줄 작위가 늘어난 거면 좋은 거 맞지 않나?
동아리 시간이 끝난 후, 에리히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내 실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물려준다는 얘기를 하면 전쟁에서 죽을 것 같잖아.”
“아.”
바로 납득했다. 사망 플래그는 화낼만하지.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 같은 말도 하지 마. 요즘 루이제랑 이리나, 엄청 예민해졌어.”
진심 가득한 충고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마르게타에게 결혼 얘기를 하려던 건 취소하자. 바렌티의 보물이 오열하면 철혈공과 스파링부터 하게 될 거다.
“그리고 형.”
본인 연애는 말아 먹었으면서 형에게는 귀중한 충고를 해준 에리히에게 감사를 표하려는 찰나, 에리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형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꼭 가야 된다면, 영지에 들러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에리히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꼭 가야지. 가기 전에 가주와 어머니께 인사는 하는 게 맞지.
“전쟁 전에는 꼭 갈게. 말해줘서 고맙다.”
내 대답에 에리히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 최대한 빨리 가야 할 것 같은데.”
“응?”
이상한 대답이다. 단순히 전쟁 전에 인사를 드리라는 뜻이 아니었나?
“…어머니, 쓰러지셨어.”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 그대로 굳고 말았다.
***
침실 앞을 서성이며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으로서, 영주로서 품위 없는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인이 쓰러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나.
‘충격이 컸겠지.’
저번 전쟁 때도 나와 칼이 나란히 참전했다는 소식에 기함을 했던 부인이다. 그때의 충격과 악몽이 사라지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전쟁 소식이 들려온다. 당연히 기절할 일이다.
차라리, 차라리 칼이라도 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부인도 슬퍼할지언정 어떻게든 버텼을 텐데. 제국백인 내가 전쟁에 참여하는 건 부인도 각오한 일이지만, 이제 막 행복을 찾으려는 아들이 다시 사지로 가는 건 어떤 현실도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니.
그렇게 다시 한숨을 내쉬자, 침실의 문이 열리더니 시녀장이 나왔다.
“시녀장, 부인은 어떤가?”
곧바로 달려가 부인의 상태를 묻자 시녀장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전에 깨어나셨지만, 다시 울다가 쓰러지셨습니다.”
“허어.”
절로 탄식이 나왔다. 울다가 지쳐 쓰러지고, 겨우 일어나면 전쟁에 갈 남편과 자식 생각에 다시 울고. 저러다가 부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된다.
차라리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