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40)
어머니는 다시 침대에 누우셨다. 이전처럼 울다 지쳐 혼절한 것이 아닌 긴장이 풀려 잠드셨다.
‘다행이다.’
침실을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에게 말한 약초나 식사 얘기, 사실 예전에 집사장을 통해 들은 거다. 오리지널 칼의 기억에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래도 타이밍이 좋았지. 단순히 원망한 적이 없다는 말보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걸 아니까 괜찮아요.’ 같은 식으로 말했으니 어머니도 마음이 놓인 거다. 고맙다, 집사장. 덕분에 살았어.
그리고 오리지널 칼에게도 고맙다. 만약 오리지널이 어머니를 원망했다면 위로하기 힘들었겠지만, 오리지널은 어머니가 뒤에서 챙겨준 것도 몰랐으면서 원망을 품지 않았다.
‘애가 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
다행이면서도 씁쓸하다.
어머니를 달래기는 했으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하루 동안 영지에 머물렀고, 다행히 어머니가 다시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물론 전쟁에 가는 아들을 향한 걱정은 여전했으나 막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신 것 같았다. 그저 몸 조심히, 원하는 걸 이루고 돌아오라는 격려를 해주실 뿐.
“출정하기 전에도 꼭 오렴.”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영주성 정문까지 나온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더 이상 말리지 않을 테니 북방으로 가기 전에 꼭 영지에 와달라고.
“고생했다.”
그리고 마침 야근을 마치고 복귀한 가주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 줬다. 아마 어머니를 다독이고 설득한 것에 대한 격려겠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 말을 끝으로 가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미 내 저택에서 가주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보였고, 전쟁이 터지면 함께 북방으로 갈 테니까. 야근에 찌든 사람을 지금 붙잡을 필요는 없다.
그건 그렇고 제국의회 흉악하네. 아무리 야근이라도 그렇지 해가 뜨고 나서야 퇴근하냐.
‘내 미래.’
씁쓸하다. 언젠가는 나도 제국백이 될 테니 저 흉악한 제국의회에서 일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처럼 행정부 고위직으로 일하면 의원 업무는 에리히에게 넘길 수 있지만, 그건 내가 영원히 은퇴를 못한다는 의미 아닌가.
어느 쪽이든 끔찍한 미래다.
어느덧 아카데미 일정도 여름 방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곧 북방으로 떠나는 입장이라 그런지 방학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더라. 적어도 전쟁 중에 ‘개노답 새끼들 잘 지내고 있나?’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작년에는 끔찍했지.’
부원들이 귀국하지 않고 단체로 제국에 남았던 아련했던 작년 여름. 올해는 그딴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망할, 그것들 제국에 남는다는 얘기 듣고 황태자랑 장관들한테 소환돼서 조리돌림 당한 것만 생각하면─
“곧 움직이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제국을 위한 일이니 기꺼이 손을 보태야지요.”
트라우마가 떠오르려는 찰나, 빌라르의 적절한 개입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경이롭다. 단순히 떠올린 것만으로도 손님 앞에서 발작할 뻔하다니. 77년도 시즌 부원들은 전설이다…
“제가 유목민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기록된 것만 봐도 흉포하고 야만적인 것들이라는 건 압니다.”
“대체로 그렇기는 합니다. 덜 흉포한 유목민은 더 흉포한 유목민한테 먹히니 말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빌라르의 말을 슬쩍 농담으로 받아치자 빌라르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기사와 뒤틀린 운명공동체가 된지도 1년 반, 이 정도 농담은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아무리 흉포해도 제국의 위엄 앞에는 무력한 자들이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야만인들이 천명을 거스르겠습니까.”
본능적으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미 5년 전에 대차게 거스르고, 종전 3년 만에 다시 거스르기 시작한 상황에서 나올 말은 아니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제국이 전쟁 준비로 들썩이면서 제국 아카데미도 소란스러워졌고, 아카데미가 소란스러워지니 삼국 전력도 자연스레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애초에 황제가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삼국 전력이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딱히 숨길 필요는 없으나─ 졸지에 타국의 전쟁 준비를 직관하게 된 빌라르의 입장은 다소 난처해졌다. 아는 척하기에는 타국의 중대한 사안이고, 아예 모르는 척하기에는 눈과 귀가 있고.
그 결과가 이 안부 인사다. 천명을 거스른 적들을 상대할 제국에게 천명을 거스를 자는 없다, 라고 말하는 기묘한 격려.
‘기사는 기사네.’
노련한 정치가나 외교관이었다면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은근히 떠보거나 틈을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르는 묵묵히 지인의 안전과 승전을 빌어줬다. 투박한 기사기에 가능한 진심 어린 행동.
그러니 어쩌겠나. 이 무뚝뚝한 기사 나름의 격려니 조금 이상해도 웃으며 받아줘야지.
“…설령 거스르더라도 그 말로는 뻔하지요.”
게다가 빌라르도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빠르게 덧붙였다.
“하하, 빌라르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 빌라르에게 적당히 웃어 보이며 넘어갔다. 아무튼 격려는 잘 받았으니 됐다.
***
원정군 조직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5년 전처럼 발목을 잡는 역도들도 없고, 유목민에 대한 위기감도 이전과는 다르니 당연한 일. 심지어 제국백들을 내세워 여론을 이끌었으니 적어도 출정만큼은 무리 없이 이끌 수 있다.
“서부 방면군 소속 8군단, 11군단, 12군단이 하블렘 공작령에 도착했습니다.”
“8군단장을 원수로 삼을 터이니, 8군단과 11군단, 12군단은 8군단장의 명에 따라 움직이게 하라.”
“예, 폐하.”
전쟁성 장관에게 원수 임명장을 건네자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중부 방면군에서 차출한 병력은 수도권의 사병들과 함께 이동할 예정이니, 사실상 모든 병력들이 제자리에 도착했다.
’12개 군단.’
원정군으로 편성된 군단만 무려 12개, 그 규모는 약 15만. 귀족들의 사병이 포함되지 않은 중앙군만으로도 유목민을 두 배 이상 압도하는 수치.
그러나 방심할 수 없다. 이는 방어전이 아닌 침공전이다. 평야에서 유목민을 상대하려면 최소 3배는 있어야 할뿐더러, 이번 전쟁은 단순히 토벌이 아닌 제국의 위엄을 보이며 유목민들을 포섭하는 전쟁이다. 격차는 크면 클수록 좋다.
‘저번 토벌군 수준은 되는군.’
사병의 움직임을 보고한 서류를 살피니 얼추 10만이 넘는 병력이 북부, 혹은 제도 인근으로 이동 중이다. 중앙군 15만과 합하면 25만이 넘는 병력이 북방 정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 정도는 되는 결과다. 아직 전쟁과 계승 분쟁의 여파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제국이 이전과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움직인다. 이 자체로도 유목민에게는 압박이 될 터. 본인들은 질과 양에 타격을 입었으나, 제국은 그대로라는 인식을 심을 수 있다.
‘만약 40만이 넘었더라면.’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동부 왕국들과의 전쟁이면 모를까, 북방에 40만이나 투입하는 건 득보다 실이 압도적인 행동이다.
황제의 군대인 중앙군과 영주들의 사병인 지방군을 합하여 100만을 자랑하는 제국군. 그런 제국군이 4할 넘게 초원에 묶인다? 동부의 승냥이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황량한 초원을 얻자고 동부를 상실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기에 부질없는 망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다시 서류를 확인했다.
‘원수는 넷이면 되겠지.’
지금 중요한 건 지방군을 관리할 원수를 선정하는 것이니까.
다행히 지난 대토벌 전쟁에서 활약한 타일글레헨 백작과 전 호르펠트 백작이 이번에도 종군했다. 이 둘만 있어도 지방군 장악에는 문제없다.
나머지 둘은 서부와 북부 대영주 중에서 고르면 충분─
‘…태자에게 맡겨야겠어.’
이 기회에 태자의 영향력을 서부와 북부에도 닿게 해야겠다. 원수의 자격이 있는 대영주를 태자가 직접 찾고 임명한다면 그들은 태자의 지지자나 다름없어질 테니.
탁자에 놓인 통신구에 손을 뻗었다. 태자에게 원수 임명을 맡기기 위해, 그리고 따로 명을 내려야 할 신하를 호출하기 위해.
***
통신구가 보랏빛으로 발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포트 마법사가 숙소 앞에 나타났다. 황태자의 소환도 아닌 황제의 소환이었으니 어찌 늦을 수 있을까.
심지어 지금은 북방 원정군을 조직 중이며, 나는 원정군의 종군 감찰관이다.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여러 의미로 위험하다.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황궁에 도착하니, 황실 기사단장이 빠르게 문을 열어줬다.
미치겠다. 최소한의 검문조차 생략하는 통과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불안할 정도다.
‘진짜 감찰 임무라도 맡기려는 건가?’
황제가 나에게 감찰이 아닌 조커 역할을 바라는 건 나도 알고 황제도 알고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의심병이 폭발해서, 정말 나한테 감찰 임무를 맡기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곤란하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싸워야 할 원정군 내부를 감찰이라는 명목으로 들쑤신다? 트롤링도 그 정도면 예술이다.
‘설마.’
불안한 생각을 빠르게 털어냈다. 그래, 아무리 의심 많은 황제여도 감찰 명령은 아닐 거다. 2황자와 애실론 가문의 트롤링 때문에 뒷목 잡은 황제가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없겠지?
황궁이 워낙 넓다 보니 정문에서 황제의 집무실까지 가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집무실 앞을 지키던 황실 기사단 부단장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최소한의 검사만 하고 통과시켜줬다. 더 늦는 건 막았으니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안도와 동시에 불안감이 더욱 증폭됐다. 아니, 황궁 정문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했는데 집무실 앞에서도 이런다고? 아무리 최소한의 검사는 했다지만, 황제와 대면하는 자리라면 아무리 철저히 해도 부족한데?
‘대체 뭘 시키려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혹시 칸 참수작전이라도 구상하는 건가? 원정군이 북방에 진입하기 전에 칸 모가지부터 따라고?
“감찰부장 왔는가.”
“황제 폐하 만세. 폐하의 은혜를 받은 종, 칼 크라시우스가 존귀하고 위대하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물론 나 홀로 머리를 굴려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 게다가 이미 집무실 안에 들어와 황제에게 인사까지 한 상황이다.
“가까이 오도록.”
“예, 폐하.”
황제의 명에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감찰부장의 업무가 결코 가볍지 않은 바, 짧게 말할 터이니 고개를 들라.”
빠르게 고개를 들자 황제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받고 말았다. 감히 황제를 기다리게 하는 건 역적이나 하는 짓이니.
‘인장?’
뒤늦게 물건을 확인하니 흰색의 인장이 보였다.
그런데 이거 묘하게 익숙한데? 내가 이걸 본 적이 있었나?
“애실론이 소유했던 후작의 인장이다. 감찰부장이 수거한 것이니 익숙하겠지.”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애실론 후작가의 강등을 통보하러 갔을 때, 당시 가주에게서 뜯어간 후작의 인장.
‘이거 원래 흰색이었구나.’
내가 챙길 때는 빨간색이라 헷갈렸다.
후작, 오등작 2위에 해당하는 귀족. 하필 바로 위가 공작이라서 미묘하게 콩라인 느낌이 있지만, 하위 귀족인 자작과 남작뿐만 아니라 백작마저 휘하로 둘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귀족이다.
게다가 오등작 1위인 공작은 제국 300년 역사 동안 오직 다섯이었기에 제국 귀족의 실질적인 승작 한계점이기도 하다. 즉 제국 귀족이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꿈의 자리라는 것.
그리고 누구나 열망한다는 건 그만큼 자리 싸움이 치열하다는 의미다.
‘공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