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41)
제국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다섯 명의 1등 공신. 공작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섯 공신의 이름을 잇는 다섯 가문만이 차지할 수 있다. 아무리 무능해도 공작은 영원히 공작이고, 반대로 아무리 유능한 후작이 있어도 영원히 공작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천명을 바로 세운 영웅들을 향한 황실의 존중이다.
하지만 후작은 그런 거 없다. 무능하면 순식간에 밀려나고, 유능하면 치고 올라갈 수 있다. 좋게 말하면 능력 위주 선발이며 솔직하게 말하면 인외마경이다. 심했을 때는 1년 사이에 후작가 넷이 바뀌었을 정도니까.
‘최근에도 하나가 밀려났지.’
손에 들린 흰색 인장을 내려다봤다. 몇 년 전에는 이 인장도 주인 있는 인장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황제가 정한 선을 과도하게 넘었고, 결국 인장을 수거당하며 제국의 후작은 13명에서 12명으로 줄고 말았다.
“대제께서 천명을 바로 세우실 때, 크펠로펜의 이름 아래 모인 자들을 존중하며 그에 걸맞은 작위를 하사하셨다. 후작위는 그중에서도 거대한 세력을 이끈 자들에게 수여됐지.”
“대제의 덕이 천하를 뒤덮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말에 본능적으로 대답했지만─ 사실 말이 좋아 존중과 하사지, 건국 초기 제국은 누더기 연합체에 불과했다.
즉 당시의 후작은 황제의 수하라기보다는 동맹이나 군벌에 가까웠다는 것.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은총을 바라는 신하에 불과하지만.
“감찰부장의 말처럼 대제의 덕은 천하를 덮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자애로움도 바다와 같이 깊었기에, 대제께서는 후작의 권위를 존중하여 그 수를 열셋에 그치셨다.”
그럴듯하게 포장했으나 실상은 후작이 많으면 골치가 아프니 열셋에 그쳤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열셋이라는 숫자는 3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전통 아닌 전통으로 남았고, 제국 후작의 인장도 열셋이 되었다. 그보다 적어서도, 많아서도 안 되는 일종의 마지노선.
“그러나 대제의 후손인 짐이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랴.”
“폐하. 폐하께옵서 후작의 인장을 거두신 건 천명과 제국을 위함이었습니다. 대제께서도 폐하의 숭고한 결단을 기쁘게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후작위가 2년 동안 공석이었다. 일시적인 공석이 아닌 무려 2년이나.
아마 능력 좋고 위세 좋은 백작들은 눈앞에 후작위가 아른거렸을 테지만, 그 공석이 애실론이 박살 나고 남은 자리라는 걸 알기에 자중했다. 황제가 처가까지 부수며 수거한 후작위를 탐내는 건 많이 역적 같잖아. 위를 노리다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감찰부장 같은 신하가 있으니 짐은 실로 복받은 황제다. 허나 대제께서 세운 열셋의 자리를 계속해서 비우는 건 짐의 부덕이 맞다.”
아무튼 황제가 후작의 인장을 꺼내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뻔하다. 2년이나 비워둔 열세 번째 자리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겠지.
일단 내가 열세 번째가 될 일은 없다. 백작위를 받은 걸로도 귀족들이 동요했는데 후작위까지 받는다? 그것도 제국백 후계자가? 아무리 황권에 눌린 귀족들이라도 발작할 가능성이 높다. 그걸 네가 왜 가져가냐며 내 멱살을 잡을 귀족들도 많을 거고.
그리고 다행히 이 열세 번째 인장은 주인이 정해져 있다.
“어쩌면 애실론의 열세 번째 자리를 북방이 채울 수도 있습니다.”
소집령 당시 장관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이 후작위는 제국 귀족이 아닌 북방을 위한 것이다. 정확히는 북방의 부족장 중 가장 유용하며 충성적인 부족장이 가져갈 것이다.
“드넓은 북방도 제국의 품에 안길 터. 그렇다면 유목민도 마땅히 제국인이 되는 것이니, 황실도 그들을 품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감찰부장.”
“예, 폐하.”
“경은 짐의 뜻을 대변하여 북방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깊게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후작의 인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에게 인장까지 건넸다면 이미 황제 나름의 계산이 끝났을 터. 이제 황제가 염두에 둔 부족장과 접촉하여 이 인장을 전달─
“인장의 주인은 감찰부장의 재량에 맡기겠다. 경이 보기에 합당한 자에게 넘기라.”
?
예?
‘내 재량?’
제국의 후작을 내 재량으로 정하라고? 황제가 지정하는 게 아니라?
“폐,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신의 안목은 폐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차마 그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우선 무릎을 꿇은 뒤 인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말이 진심인지, 깜짝 충성심 테스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튕겨야 한다.
차라리 숫자 제한이 없는 백작위를 맡겼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제국에 열셋뿐인 후작위다. 그걸 황제의 의지가 아닌 일개 공무원 재량에 맡긴다고? 미쳤냐.
“짐은 북방의 부족장들을 직접 보지 못한다. 아무리 보고가 올라온들 어디까지나 글자. 그들을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감찰부장이다.”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인장을 들어 올린 황제는 친히 내 손에 인장을 쥐여줬다.
“두려워 말라. 경의 안목을 믿으라. 경이 선택한 자가 곧 후작이며, 짐은 그 선택이 옳다 여길 것이니.”
그 말에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설령 후작에 어울리지 않는 놈에게 인장을 넘겨도, 황실이 그 부족장을 지원하여 후작에 걸맞은 존재로 만들 테니 안심하라는 말.
‘시발.’
더 부담스럽다. 최고 결정권자가 전폭적으로 밀어준다는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을 공무원은 없다. 신뢰도 이 정도면 무거워서 짓눌릴 정도다.
“…폐하의 크나큰 믿음에 반드시 보답하겠나이다.”
물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다면 더 이상 튕길 수는 없다.
오늘부터 난 후작 메이커다.
집무실을 나가기 직전, 괜찮은 부족장 몇 명에게 백작위도 주라는 말을 들었다. 백작위가 무슨 돌덩이도 아니고 이렇게 막 뿌려도 되는 건가.
‘돌덩이 맞구나.’
생각해 보니 황제 입장에서 백작위 정도야 뿌려도 지장 없는 작위일 거다. 돌이나 마찬가지기는 하네.
오늘부터 난 스톤 메이커다.
***
감찰부장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자리에 앉았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짧은 대면으로도 피로가 쌓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와 달리 정신은 온전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으니.
‘작위 분배는 걱정할 필요 없겠군.’
감찰부장에게 후작의 인장을 맡기고 백작위에 대한 언급을 했을 때, 감찰부장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당혹감과 부담감이었다. 어떠한 탐욕이나 계산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 손에 작위 수여의 권한이 쥐어진다면 그걸 활용할 귀족은 널리고 널렸다. 국익과 사익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놀겠지.
‘제국의 홍복이다.’
허나 감찰부장은 그렇지 않았다. 사익은 생각하지 않고 임무 그 자체에 집중했다.
어떤 임무라도 맡길 수 있는 귀족은 적고, 어떠한 사심 없이 임무에만 집중하는 귀족은 더더욱 적다. 그런 희귀한 귀족이 고작 20대라는 것이, 태자와 긴밀한 관계라는 것이 기쁠 따름이다. 감찰부장만 제대로 다뤄도 인재가 부족해서 손발이 묶일 일은 없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심복의 존재는 중요하다. 나 역시 궁내성 장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달려오지 못했을 정도로.
‘…실로 홍복이지.’
그렇게 작위 분배에 대한 걱정을 접고 서류로 손을 뻗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이러는군.’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다. 경지에 이른 무인은 나이에 비해 젊은 모습으로 장수할 수 있으나, 나는 무예와 거리가 먼 일반인에 불과하다.
게다가 썩 평온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니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조금만 버티면 된다.’
살짝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집었다.
그래, 앞으로 조금이다. 북방의 우환을 제거하고 곧 태어날 황손을 황태손으로 임명하기만 하면 나의 사명은 끝난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 있다.
그러니 버텨야 한다. 천명을 위해, 황실을 위해.
제국과 신민을 위해.
***
황제의 깜짝 선물을 받은 뒤로 다시 며칠이 흘렀다.
처음에는 품 속에 고이 잠든 인장을 볼 때마다 착잡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더라. 이러다 감찰부장 직인을 찍어야 할 때 후작 인장을 잘못 꺼내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그냥 미친 척 찍어버릴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냅다 후작 인장을 써버리면 황제가 다시 가져가지 않을까?
내 머리도 같이 가져갈 것 같다는 게 문제지만.
‘망할.’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익숙해지지 않았다. 자기 권한을 아득히 넘어가는 물건이 손에 있는데 익숙해질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내 마음 속 마지노선은 백작 인장이다.
그런데 백작 인장을 받아서 주머니가 무거운 사람에게 후작 인장까지 주다니. 황제의 무거운 신뢰에 눈물이 나올 정도다.
‘내 재량이라.’
그렇기에 다짐했다. 어느 새끼가 내 눈에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 싶으면 바로 인장을 던질 거다. 제국 최초의 유목민 귀족 겸 유목민 후작으로 만들 것이다.
그 새끼가 선택하지 않은 작위지만 헌신과 의무로 버텨야 할 거다.
‘…백작위는 또 누구한테 주지.’
후작은 그나마 1명이지만 백작은 못해도 6명은 임명해야 할 텐데.
환장하겠네 진짜.
1학기 마지막 날. 아직 방학식을 하기도 전인 이른 아침부터 교장과 면담을 하게 됐다.
“며칠 후면 출정식이더군요.”
“예, 이제 폐하의 명만 남았습니다.”
덤덤한 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북부 방면군은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채 집결하였고, 서부 방면군에서도 3개 군단이 하블렘 공작령에 도착했다. 중부 방면군 소속 군단과 각지의 사병도 황제가 지정한 집결지에 모였으니 이제 정식으로 출정할 일만 남았다.
“지난 전쟁의 상처가 전부 가시기도 전에 다시 전쟁이라. 안타까운 일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교장은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카데미에만 머무르는 교장이니 이번 전쟁과 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교장은 한때 군부에서 활약한 대마법사이자 무수한 학생들을 가르친 교육자. 자신의 후배, 혹은 제자들이 전쟁에 참전할 테니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다시 군문에 복귀하고 싶더군요. 이 늙은이가 조금이라도 활약해야 젊은 친구들이 하나라도 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교장은 소집령이 터지고 얼마 뒤, 교육성 장관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본인이 한 말처럼 늙은이가 나서야 젊은이들의 희생이 준다는 이유로.
당연히 교장의 사직서는 기각됐다고 들었다. 이미 젊은 시절을 제국을 위해 헌신한 자를, 그리고 지금은 제국의 미래를 키우는 자를 냅다 전쟁에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게다가 이미 군문에서 물러난 노인이 전쟁에 참여하는 건 제국의 체면에 지장이 가는 일이기도 하고.
“군부에는 젊은 장병들을 이끌 노련한 장군들이 많습니다. 지난 전쟁을 겪은 자들도 많고요. 걱정은 알겠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십시오.”
그런 교장에게 적당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난 대토벌 전쟁에서 많은 후배와 제자들을 잃었을 교장의 마음은 알지만 교장의 역할은 교육자다. 그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건 서로 피곤하고 골치만 아파지는 일.
“예, 그렇겠지요. 감찰부장의 말이 맞습니다.”
내 말에 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답답한 심정에 한 말일 테니 적당히 수긍하고 넘어가는 것이겠지. 사실 사직서까지 기각당한 상황에서 교장이 이런 하소연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저 긴 세월을 살며 만난 인연들이 허무하게 쓰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
“감찰부장도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감찰부장이 다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전쟁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니.”
“충고 감사드립니다.”
교장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교장이 만난 인연 중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 1년 반이나 직장에서 함께 한 인물이니 결코 작은 인연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