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46)
지난 대토벌 전쟁에서 제국이 피를 토하며 빌빌거린 것은 사실이다. 카간에게 영혼이 탈곡당할 수준으로 시달린 것도 사실이고.
그 눈물겨운 과정 덕분에 제국은 유목민에 대한 경계도가 극에 이르렀으며, 칸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거품을 물고 25만이라는 병력을 때려 박았다.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지만 그 여정이 너무나 험난했기에 PTSD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런데 승자인 제국도 이 지경이라면, 패자인 유목민은 어느 정도일까.
‘파산 상태.’
솔직히 제국이 전쟁으로 얻은 건 없으나 가지고 있는 것은 지켰다. 대륙 최강국의 위엄, 천명의 굳건함을 보이지 않았는가. 비록 카간에게 미친 듯이 두들겨 맞았어도 아무튼 이긴 건 이긴 거다. 꼬우면 지옥에서 돌아오든가.
그러나 유목민은 명예, 희망, 실리─ 모든 것을 잃었다.
‘높이 오를수록 떨어질 때의 충격도 크지.’
10만이라는 대군이 뭉쳤다. 카간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세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결국 패배했다. 무수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패배했다.
그렇다면 제국이 유목민 공포증을 가진 것처럼, 유목민도 제국에 대한 공포를 가지기에 충분하다. 이전까지야 ‘우리가 흩어져있으니 일방적으로 털리는 건 당연하다.’ 라는 위안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카간 아래 뭉쳤음에도 패했다면 ‘우린 쓰레기였나?’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유목민들은 쓰레기가 아닌 괴물이었다. 카간을 상대하던 제국은 진지하게 패배를 눈앞에 두고, 카간국이라는 끔찍한 국가가 탄생하는 게 아닌가 패닉에 빠졌을 정도니.
‘결국 망했지만.’
제국에게는 실로 다행히, 반대로 유목민에게는 안타깝게도─ 유목민은 카간 코인이 최고점을 찍었을 때 익절하지 못했다.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승리가 눈앞이었다? 전쟁은 노력상, 참가상은커녕 2등조차 없는 승자 독식 구조다. 아무리 과정이 화려했어도 결국 패했다면 그걸로 끝. 카간 코인을 제때 팔지 못한 유목민들은 순식간에 나락에 처박혔다. 희망의 상징이던 카간이 유목민들과 함께 폭사한 절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카간의 혈육이 칸을 자칭했다.
‘개 같기는 하겠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카간은 온갖 곳에서 돈을 끌어모아 코인에 꼴아박은 후 폭사한 상태다. 졸지에 파산한 유목민 입장에서는 폭사한 놈의 자식이 와서 ‘이번에는 진짜다!’ 라고 외치는 거고.
사람이라면 ‘지랄하지 말고 꺼져.’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겠지만, 칸의 매콤 펀치가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어떻게 입을 열겠나. 입 한 번 잘못 놀려서 죽는 것보다는 개 같아도 숙이는 게 낫지.
슬프게도 유목민들이 가진 건 이제 목숨밖에 없으니까.
“대치를 유지하라. 먼저 접근할 필요는 없다.”
“예, 각하.”
생각을 정리하고 시선을 돌리니, 침묵을 깨고 현상 유지를 명하는 전승공이 보였다.
그제야 전승공의 무표정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눈치챘구나.’
이 기묘한 대치와 화려하게 폭발했던 북방. 나조차 추리한 일을 전승공이 모를 리가 없다. 전투가 아닌 일종의 과시이자 면접이라는 걸 알고 덤덤히 넘어가는 것이겠지.
‘면접이라.’
품 속에 있는 인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카이타나 부족이 미친 존재감을 뽐내든 말든 전쟁은 여전히 지속됐다. 우리는 칸과 싸우러 온 것이지, 일개 부족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전선은 조금씩 넓어졌고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유목민도 늘어났다. 거기다 단독으로 천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는 부족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자연스레 전투도 치열해졌다.
하지만 모든 부족과 멱살잡이를 하는 건 아니었다.
“차가르아 전선에서 키르기아 부족이 배회 중입니다. 규모는 2천, 아직까지 충돌은 없습니다.”
“케루타 부족의 영역을 점거 중이던 비르스 부족이 물러났습니다. 후퇴 과정에서 주술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아군의 피해는 미미했습니다.”
카이타나 부족이 스타트를 끊은 뒤로, 여러 부족이 제2, 제3의 카이타나처럼 행동하고 있다. 전선에 모습만 보이고 싸우지는 않거나, 적당히 투닥이는 시늉만 하고 군을 물리는 중.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보이고 있다.
“카이타나 부족이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전선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심지어 원조는 아예 방을 뺐다. 최소한의 시늉마저 포기했다.
오죽하면 보고하는 참모도 후퇴나 퇴각이 아닌 말머리를 돌렸다고 표현하겠나. 아무리 봐도 싸우러 온 놈들이 아니다.
“또한 다른 부족과 달리 흩어지지 않고 일제히 이동 중이며, 그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립니다.”
그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타날 때도 신출귀몰하지만 퇴각할 때는 더욱 유령 같은 것들이 유목민이다.
그것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자신들의 영역뿐인데, 괜히 눈에 띄게 우르르 몰려갔다가 이동 경로를 들키면 영역에 거주 중인 노약자가 위험해진다. 그렇기에 지난 전쟁 중에 퇴각하던 부족들은 정말 이 악물고 숨어 다녔다.
그런데 카이타나 부족은 보란 듯이 이동 중이다. 제발 봐달라는 듯이, 우리는 여기서 지낸다는 것처럼.
‘이 새끼들은 대체…’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혹시 제국의 사절이 오는 걸 유도하고, 정말로 오면 담가버릴 생각인가?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고작 사절 하나 처리하자고 본인들의 영역을 판돈으로 거는 건 미친 짓이니까. 국가로 치면 수도에서 청야전술을 펼치는 꼴이다.
“…계속 주시하라. 다른 부족과 합류하여 전선에 복귀할 가능성도 좌시할 수 없다.”
전승공도 이 미친 행동에 문화 충격을 받았는지 다소 늦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해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상식이 매일 깨지고 있는데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저 다른 부족과 합류 운운하는 것도 마지막 미련일지도 모른다. 내 상식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미련.
“감찰관.”
“아, 예, 각하.”
“잠시 나가지.”
전승공의 말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보고도 소강 상태라 잠시 자리를 비울 시간은 있고, 굳이 둘이서 나가자는 걸 보면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니까.
그리고 이 타이밍에 전승공이 할 말이면 뻔하다.
“조만간 감찰관이 움직여야겠어.”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전승공은 온갖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내가 느끼는 감정도 크게 다를 것은 없으리라.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그런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답했다. 앞뒤 잘라먹은 말이지만 무슨 주제를 논하는 건지는 나도 알고 전승공도 알고 있다.
황제의 목적인 부족 포섭. 저렇게 열정적으로 포섭해달라 요청하는 부족이 등장했는데 황제의 명을 받은 감찰관으로서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전승공 입장에서도 3천을 동원할 수 있는 부족이 투항하면 더 편한 일이고.
‘벌써 접촉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벌써 포섭각이 보이는 부족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한 번 강하게 짓누른 이후에야 이탈 부족이 나올 줄 알았는데, 국경을 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탈 부족이 등장했다. 그것도 여럿이나.
탈주 성향 강한 부족들이 줄줄이 나타난 건지, 아니면 북방의 상황이 전체적으로 개판인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둘 다인가? 그건 그거대로 무섭네.
“아직까지 카이타나 부족의 영역은 찾아내지 못했으나, 곧 알게 되겠지.”
묘한 착잡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군의 정찰이 아닌 적들의 자발적인 공개로 알게 된 정보. 군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어이가 없고 허무하겠는가.
“현재까지 투항 의지를 보인 부족 중 가장 거대한 것은 카이타나 부족이며, 먼저 조짐을 보인 것도 카이타나 부족이다. 그만큼 제국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 바.”
“위치가 파악되면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빠른 대답에 전승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승공의 말처럼 카이타나 부족은 가장 먼저 탈주 의사를 보인 부족이자 현 시점에서 가장 강한 탈주 닌자. 그런 부족을 패싱하고 다른 부족과 먼저 접촉하는 건 카이타나 부족에게 불쾌감과 불안감을 줄 수 있는 일이다.
그건 곤란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3천이라는 병력을 치울 수 있는 기회를 헛되이 날릴 수는 없다.
“호위는 필요한 만큼 대동하도록.”
“예, 각하.”
나름 적진 한가운데로 가는 것이기에 호위는 든든히 하라는 배려.
물론 필요 없다. 이미 묵광대가 있는데 다른 호위까지 붙으면 과잉 전력이다.
***
카이타나 부족이 전선에서 물러났다.
“빠르기도 하군.”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 전선의 상황을 보고한 케식은 고개를 숙였다. 마치 카이타나 부족의 이탈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라. 이미 예상한 일이다.”
그런 케식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용맹히 싸운 전사에게 누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제 부족을 살릴 방법을 찾는 족장에게 누가 원망을 할 수 있을까.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면 북방의 총의를 이루지 못한 주제에 뻔뻔히 살아있는 죄인에게 있으리라.
“다른 곳은 어떻지?”
“아직 이탈한 부족은 카이타나가 유일합니다.”
“허, 참. 지난 전쟁 때 뭉그적거리던 부족이 맞나? 압도적으로 빨라.”
가벼운 농담을 건넸지만 케식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망할,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유머 감각이 줄어들었어.
‘몸값이 올라서 열정적이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케식을 내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전쟁 때도, 패전 이후에도 쥐 죽은 듯 살던 카이타나 부족이 자기 몸값을 파악하자마자 미친 듯이 남하했다. 마치 처음을 뺏길 수 없다는 것처럼.
예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괘씸하다. 그 열정의 반만이라도 진작에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망할 놈들.’
하지만 어쩌겠나. 몸값에 따라, 부족의 안위에 따라 움직이는 놈들에게 마땅한 이득과 신뢰를 주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마땅한 대가를 치르지 못한 주제에 판매자를 원망하는 건 추한 꼴이지.
‘…너무 앞서나가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그러다 문득 다른 걱정이 들었다. 이 새끼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다른 부족들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전선 이탈까지 하는 건 대체 무슨 속도인지.
이러면 다른 부족들도 급해질 수밖에 없는데, 몸값이 제대로 매겨질지 의문이다.
‘더 강하게 움직여야겠어.’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관리자가 제일 고생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이타나 부족의 영역을 발견했다.
솔직히 이걸 발견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인지 모르겠다. 제국은 가만히 있었는데 유목민이 억지로 눈앞에 들이민 수준이었지. 이 새끼들 화약이 있었다면 불꽃놀이를 하면서까지 위치를 홍보했을 거다.
그래도 위치를 파악한 건 맞으니 곧바로 움직였다. 이미 카이타나 부족의 투항 의지도, 제국의 수용 의지도 히트라 전선에서 전부 공개했다. 이제 와서 밀당을 하며 간을 보는 건 서로 귀찮은 일이다.
“외교는 처음 해봐서 긴장되네.”
그렇게 묵광대와 함께 이동하던 중, 옆에 있던 4과장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묵광대가 든든하기는 하지만 워낙 근엄하고 진지한 애들이라 가는 길이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걸면 황송하다는 듯 반응해서 미안할 정도고. 그나마 정상적으로 받아주는 건 4과장 정도다.
“주인님이라면 어떤 일이든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봐라. 지금도 서툴게나마 평범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지 않나.
“만약 그들이 주인님을 업신여긴다면 저희가 카이타나 부족을 절멸─”
“하지 마.”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정상이라는 거지만.
4과장을 다소 씁쓸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얘가 그동안 험한 임무만 해서 그런지 일이 꼬이면 무력으로 쓸어버린다는 선택지를 가장 먼저 골라버린다. 세상은 무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과 뜨거운 진심으로도 이겨낼 수 있는 곳인데.
‘내가 계속 데리고 있어야 했어.’
이게 다 남이 키운 애들을 뜯어간 특무성 때문이다. 명령은 황실이 했지만 아무튼 특무성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