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47)
이 아이들이 계부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내 품으로 올 날이 올까…?
숙이는 것도 확실하게 숙이면 예술이라는 걸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귀한 손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 카이타나 부족의 영역에 진입하자마자 비무장 상태의 유목민 하나가 접근했다. 나름 복장도 화려하고 장신구도 여럿 달린 것을 보니 부족 내에서 고위직인 모양.
친히 행차한 고위직의 온화한 반응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국인에게 우호적인 유목민을 보는 건 너무 낯선 일이다.
“이리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별말씀을. 오히려 언제 오시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색함을 밀어내고 겨우 입을 열자 더욱 노골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저 애타게라는 단어에서 카이타나 부족장의 고뇌가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자,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 혼자 귀한 분들을 상대하면 족장께서 서운해하실 것 같군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무장은 어디에 반납하면 되겠습니까?”
“무장이요?”
몸을 돌려 우리를 안내하려던 유목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냥 들어오셔도 됩니다! 번거롭게 무장을 해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뭔.’
무장조차 수거하지 않는 패기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우호적인 진영에 방문하더라도 최소한의 호위를 제외하면 무장을 수거하거나 격리하는 편인데, 카이타나 부족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무장한 사절단이 와도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우리를 믿는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놈들은 아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거 참, 귀한 분들과 험한 이유로 만나게 돼서 민망하기 짝이 없군요.”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좋은 인연이 돋보이는 법이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유목민을 따라가던 도중, 너스레를 떠는 유목민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유목민이 더욱 기꺼워하는 것이 보였다. 전쟁 중에 만난 것은 유감이나, 전쟁 중이기에 투항을 원하는 카이타나 부족이 더욱 좋게 보인다는 말이니까.
“제가 귀한 분께 한 수 배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좋은 인연이 돋보인다라,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국이 카이타나 부족을 좋게 볼수록, 제국이 카이타나 부족에게 지불할 몸값은 늘어난다는 의미.
연신 웃음을 흘리던 유목민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존함을 여쭈어보지도 못했군요. 저는 크잔 베테라고 합니다. 족장이신 카이타나 크잔 다란님의 동생이지요.”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입니다.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받아 백작위를 받았습니다.”
내 이름을 들은 유목민─ 베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정말 귀한 분이 오셨군요.”
그 말에 나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협상 당사자가 아닌 안내자에게 건네줄 정보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부족장도 베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부족의 명운을 짊어진 입장이라 그런지 더한 면이 있었다.
“가아르 부족은 북방과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힌 악적입니다. 제국의 위엄으로 그 악적이 토벌되어 겨우 한숨 돌렸는데, 3년 만에 그 잔재가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고달팠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만 믿고 따르는 동포들이 많으니 참고 견뎌야지요. 다행히 제국 덕에 그 악적의 손에서 벗어날 수─”
과장된 어조와 몸짓으로 카간과 칸을 싸잡아 욕하던 부족장은 자신이 부족의 안전을 위해 눈물겨운 결단을 했다는 것도 어필했다. 어떻게든 나에게 ‘우리 그 새끼랑 관계 없음.’ 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관계가 없기는 해. 카간 때는 제3진영으로 관망했고, 지금도 칸의 매콤 주먹 때문에 억지로 끌려 나온 상황이니까. 제국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니 책임을 물을 것도 없다.
“족장 같은 분이 계시니 혼란스러운 북방에도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겠지요. 실로 천운이라 생각합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부족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죽 부대를 입에 댔다.
“크으, 귀한 손님이 오셔서 그런지 베테가 좋은 술을 가져왔군요. 평소에는 술을 줄이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던 놈이.”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고기를 먹는 부족장의 모습은 귀족의 예법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만큼 투박하고 솔직해 보였다.
나 역시 부족장처럼 술을 몇 모금 마셨다. 애초에 카이타나 부족이 계략을 꾸미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음식까지 제공받았다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 유목민이 접대의 관습을 어기면 죽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괜히 걱정했나.’
아까 외교는 처음이니 뭐니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쉬울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쉬울 줄은 몰랐지. 자동문도 너희보다는 느리게 열리겠다.
“폐하께서는 북방의 혼란을 안타깝게 여기고 계십니다.”
“하늘과도 같은 자비로군요. 저희 같은 천한 것들도 염려해 주시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슬슬 대화를 끝내기 위해 황제를 언급하니 부족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제국을 대표하여 온 사절이 황제를 입에 담았다는 건 용건을 말하겠다는 뜻이니.
“폐하의 자비는 그저 염려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북방을 품에 안아, 평화를 갈망하는 선량한 신민들을 보살피시고자 하십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군요.”
그렇게 말한 부족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황제가 북방에 어느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지, 북방에 유입될 물자는 얼마나 될지, 가장 먼저 항복한 카이타나 부족은 얼마나 많은 이권과 안전을 보장받을지 계산 중일 터.
굳이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말해줄 거니까.
“허나 북방에는 북방의 방식이 있는 법. 폐하께서는 기존 질서를 존중하고자 하십니다. 이미 북방의 질서를 위해 악적과 거리를 두는 자들이 있는데, 어찌 폐하께서 그런 자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부족장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제국이 기존 질서를 존중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부족장이라는 직함과 카이타나 부족의 영향력은 건재하다는 것이니. 그것만 지켜도 부족장 입장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물론 카이타나 백작께서도 그중 한 분이고요.”
“과분한 평가라 민망…?”
반사적으로 겸양을 표하던 족장은 뒤늦게 위화감을 눈치챘는지 딱딱히 굳었다. 그러면서 눈동자만 겨우 굴리며 내 안색을 살피는 것이,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오늘부터 넌 백작이다.
‘후작을 가볍게 던질 수는 없지.’
처음에는 카이타나에게 후작위를 던질까 싶었지만, 아직 접촉하지 못한 부족이 많다. 괜히 성급히 행동했다가 더 괜찮은 부족을 만나면 곤란한 일 아니겠나.
그러니 일단 백작이라고 하자. 백작인 줄 알았는데 후작으로 올려주면 기뻐하겠지. 그 반대라면 끔찍하겠지만.
***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흥분과 혼란 속에서 딱 한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백작.’
내가, 내가 백작. 일개 부족장인 내가 제국의 귀족.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탁자 아래로 내렸다.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슬쩍 혀로 훑었다.
‘유목민이, 귀족?’
믿을 수가 없다. 고작 토벌 대상에 불과한, 그게 아니더라도 제국이 선심 쓰듯 던져주는 물자를 먹고사는 유목민이 제국의 귀족이 된다고? 그것도 자작, 남작이 아닌 백작 같은 고위 귀족이?
기존 질서를 존중한다길래 그저 물자를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우리를 앞세워 다른 부족들을 통제하려는 줄 알았다. 그게 지금까지 제국이 썼던 방식이니까. 그 이상은 감히 바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제국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한 보물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유목민을 제국의 지배층에 포함하겠다는 매력적인 보물을.
‘거짓말은 아니겠지.’
사절이 대놓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말을 빙빙 돌려서 책임을 피할지언정, 거짓은 말하지 않는 게 사절 아니던가. 그 정도는 유목민인 나도 안다.
심지어 사절로 온 자도 거물이다. 그런 거물을 동원해서 한다는 것이 거짓말? 너무 인력 낭비다.
‘나만 받을 제안은 아닐 거다.’
그렇게 제국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두고 머리를 굴리자 다른 쪽으로 생각이 뻗었다.
이 드넓은 북방에 고작 귀족을 하나만 꽂을 리는 없다. 나처럼 투항하는 부족들에게는 적당한 작위를 뿌릴 터. 무수히 많은 유목민 귀족이 생길 터.
‘지금의 판도와는 달라진다.’
이제 북방의 서열은 부족의 강성함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작위가 높고 낮음에 따라 정해진다.
물론 부족이 강하다면 높은 작위를 받겠지만, 강성함의 차이는 다른 것으로 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적극적인 협조, 적극적인 충성.
더욱 노골적으로 말하면 제국─ 황실의 총애.
‘…이거 참.’
이런 보물을 던지면 맛이 들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늦게 합류하면 변절자지만, 빠르게 합류하면 공신이다.’
오늘부터 난 공신이 된다.
빙의 전 세계에 있던 일화 중 그런 일화가 있었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영 미덥지 못하여 외부에서 새로운 주군을 영입하려던 모 책사의 이야기. 그 책사는 자신의 이상에 맞는 주군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주군을 위해 지도를 바쳤다고 한다. 이게 정사인지 야사인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그런 일화가 있었다.
아무튼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지도의 중요성? 난세에서는 주군을 갈아타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
맞긴 하지만 아니다. 진짜 교훈은 따로 있다.
“이곳, 이곳, 마지막으로 이곳에 거주하는 부족들도 악적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과연, 그렇군요.”
바로 팔아먹을 거면 화끈하게 팔아먹어야 공신이 된다는 교훈이다. 마지막에 합류하면 밑바닥이지만, 가장 먼저 양손 무겁게 합류하면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끌어들이면 등급이 올라간다.
카이타나 부족장─ 아니, 카이타나 백작은 북방을 배경으로 다단계 사업을 펼치고 있는 거다.
‘될 놈이다.’
그런 카이타나 백작을 보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 인간은 아무리 봐도 될 놈이다. 황제가 포섭이 아닌 절멸을 택했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만약 지난 전쟁에서 카간이 승리했어도 어떻게든 입지를 마련했을 양반이다.
골치 아프지만 조건만 맞으면 편한 유형이기도 하다. 이 사람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면 온갖 물건을 들고 탈주하겠지만, 반대로 욕망을 채워줄 수 있으면 누구보다 충직하고 현명한 조력자가 된다. 그 욕망을 평생 충족하기 위해 고용주를 지키려 할 테니.
‘좋은데?’
단일 세력으로 3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부족의 수장, 누구보다 먼저 제국에 숙인 족장. 제법 수완이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건 생각 이상이다.
아무래도 열세 번째 후작에 제일 근접한 사람은 카이타나 백작이 될 것 같다. 아직 접촉한 부족이 카이타나밖에 없기는 하다만, 이 인간을 능가할 사람이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이런 사람이 한 시대에 여럿이 있는 세계는 조금 슬프지 않나. 앞잡이 배틀도 아니고.
‘우리 앞잡이라 다행이다.’
남의 앞잡이였으면 뒷목 잡았을 거야.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위리디아 백작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 예. 편히 말씀하십시오.”
한창 지도를 짚으며 설명하던 카이타나 백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국의 백작은 너무나 영광된 자리라 그 가신들도 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카이타나 백작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예, 맞습니다. 보통 백작이 자신을 충실히 섬길 것 같은 가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최종적으로 폐하께서 승인하는 형태입니다.”
그렇기에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자 카이타나 백작은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말에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굳이 제 부족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합의만 있다면 된다는 거군요.”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