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5)
제 35화
싱글벙글 박람회 – 2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장발은 바람과 함께 휘날렸고, 루비 같이 붉은 눈은 맑게 반짝인다.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백에 아흔아홉은 아름답다고 평할 모습이다.
그리고 아흔아홉을 제외한 마지막 하나는 나다. 난 저 껍데기 내부의 진실을 알고 있으니 절대 좋은 평가를 할 수가 없다.
‘저 새끼 왜 여기 있어.’
내가 홧병으로 죽기 직전에 유서를 쓰게 된다면 반드시 유서에 언급할 과장 트리오 중 하나이자, 웃는 얼굴로 악의 없는 트롤링을 저질러서 뒷목을 잡게 하는 존재. 여기 있으면 안되는 감찰부 1과장이 나타났다.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1과장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1과장이 내 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는 모습이 몹시 거슬린다.
“부장니이이임!”
품에 든 음식을 주섬주섬 재배치하더니 한쪽 팔을 들어 격렬히 흔든다. 해맑게 웃는 저 모습을 보니 자동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남들 쳐다보니까 소리 높이지 마, 조금 부끄럽다.
“잠깐 다녀온다.”
부원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1과장 쪽으로 다가갔다. 괜히 부스까지 오게 해서 얘기했다가 부원들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할 지 감이 안 잡히는 녀석이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예측 불가능한 트롤러다.
“오랜만이에요 부장님! 잘 지내셨어요?”
“방금 전까지 잘 지냈지.”
이제 널 보니 잘 지내지 못할 것 같기는 한데.
“헤헤, 다행이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1과장은 헤실헤실 웃고만 있다. 진짜 잘못 때렸다가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참는 거지, 가끔 한 대만 쥐어 박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참자. 1과장이 사라지면 대체 인력 찾기가 힘드니까.
그것보다 일단은 얘가 왜 여기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지. 감히 부장이 일하는 곳으로 놀러 온 건 아닐 거라 믿는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냐?”
“어? 장관님이 얘기하시지 않았어요?”
내 물음에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1과장. 장관? 그 인간이 무슨 말을 해.
‘아.’
– 행정부에서도 몇 명 찾아갈 거니 놀라지 말고.
얼마 전 화상 보고 때 장관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아니 씹, 그게 얘가 온다는 뜻이었냐고. 사교 목적으로 행정부에서 몇 명 정도 내 얼굴 보러 갈 테니 알아두라는 말인 줄 알았지.
예상 못한 상황에 내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1과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장관님이 여기 가면 제가 할 일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네가 할 일?”
1과장의 말을 듣고 잠시 머리를 굴려보니 얼추 윤곽이 잡혔다. 1과장이 여기까지 와서 할 일이면 대충 알 것 같네.
“곧 시체가 나타날 거고, 특무성에서도 사람이 갈 테니 기다리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시체가 나타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언데드 말하는 건가?”
“때가 되면 알려줄 테니 신경 꺼.”
“힝…”
언데드는 무슨 언데드. 여명 교단이 득세하고 대륙에서 언데드 씨가 마른 게 언젠데.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이는 1과장을 흘겨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카데미 부수기 하기에는 딱 좋은 때긴 하네.’
요주의 단체 중 하나인 아펠스 부흥군, 세번째 영광은 정보부장의 감정이 듬뿍 담겨 시체라는 코드명이 붙어 버렸다.
곧 시체가 나타난다는 것은 박람회 기간의 소란을 틈타 세번째 영광이 습격을 할 예정이라는 거고, 나는 이전에 정보부장이 말한 대로 특무성에서 파견할 토벌 전력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혹시나 했는데 진짜 박람회 기간을 노리네.
‘지능 상태가 참.’
뻔한 목적지, 뻔한 시기. 이렇게 뻔히 보일 정도면 오히려 역공작이 아닌가 우려스러울 정도다. 애초에 그런 지능이니 300년 전에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고 난리를 치는 거겠지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옆에서 1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부장님. 여기 제과 부스 맞죠?”
“어. 맞는데 왜?”
“빵하고 쿠키 중에 뭐가 맛있어요?”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1과장 품에 안긴 음식들로 시선이 향했다. 이미 끼니로도 충분함을 넘어 과할 정도의 양인데, 먹을 걸 더 사겠다고?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1과장이 가슴을 내밀며 당당히 말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어요!”
딱히 이해가 되는 말은 아니지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빵하고 쿠키 중에 뭐가 맛있냐, 라.
“빵이 괜찮다.”
“그러면 쿠키로 살게요.”
망설임 없이 다른 선택지를 고른 1과장을 말없이 쳐다보자 히히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부장님 입맛 이상한 거 다 아는데, 빵보다 쿠키가 낫겠죠.”
그러고는 날아가듯 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저 건방진 과장은 함께 지낸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부장을 이용하는 지경에 도달했다. 부하가 상사의 머리 끝에 오르려고 하다니, 이런 말세가 어디 있을까.
‘그래봤자지.’
그래서 일부러 쿠키가 아닌 빵이 맛있다고 해줬다. 애송이, 넌 아직 멀었다. 느긋하게 부스로 걸어가니 쿠키를 입에 물고 울상을 짓는 1과장이 보였다.
역시 1과장은 웃는 모습보다 우는 모습이 예쁜 것 같다.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네.
배신감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1과장을 무시하고 부스에 들어갔다가 앞치마 하나를 들고 나왔다.
“너 할 일 없지?”
그 말에 1과장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 동아리 후배들 좀 보려고 했는데…”
“없다는 거네.”
음식을 들고 있느라 양손이 봉인된 1과장의 목에 앞치마를 걸어주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부하기는 했지만 부질없는 반항이다.
무슨 말을 할 지 모르는 이 녀석을 부스에 둬도 괜찮나 고민했지만, 잠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머물러야 하면 차라리 옆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다. 내 시야 밖에서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내가 조금 귀찮은 게 낫지.
“루이제. 손 필요하면 얘한테 시켜.”
“아, 네, 오라버니.”
루이제는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팔려온 것 마냥 울적한 표정을 짓는 1과장을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오라버니, 이 분은 누구세요?”
“내 부하니까 편하게 대해도 돼.”
“이거 폭거야…”
아가리.
투덜거리는 1과장의 어깨를 살짝 힘을 주어 붙잡자 온몸을 비틀며 주저앉았다.
***
아인테르는 칼이 부하라고 부른 여인과 투닥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고문 선생, 의외로 부하와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이었네.”
“그렇군요. 정말 의외입니다.”
옆에서 웃음기 섞인 류티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적당히 대답한 아인테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류티스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힝힝거리는 여인을 주목하느라 아인테르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보면 철부지 아가씨가 투덜거리는 걸로 보이겠지.
‘1과장인가.’
칼이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백발을 지닌 여성 부하면 1과장 밖에 없다. 여인의 정체를 1과장으로 확신한 아인테르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감찰부에 소속된 과는 공통된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각 과마다 특화된 분야가 있다. 그중 1과는 심문 특화,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고문에 특화된 과다.
1과로 잡혀갈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자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 높으며, 들어가게 되면 절대 제 발로 걸어나올 수 없다는 산송장 제조장. 심지어 1과에 속한 감찰부 관료들의 퇴직 원인 1위가 온갖 고문을 지켜보며 생긴 트라우마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정말 우스갯소리에 불과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만큼 어떤 바닥을 상상하든 그 미만의 최악이 1과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괴리감이 심하군.’
그런데 눈 앞의 저 여인이 그 1과를 이끄는 과장이란다. 현 감찰부 간부들의 평균 연령대가 굉장히 젊은 편인 것은 알지만, 사석에서 저렇게 가벼운 사람일 줄은 몰랐다.
마녀, 피로 목욕을 즐기는 요부, 혹은 심심하면 직접 고문을 가하며 죄수의 비명을 듣는 것이 취미인 여자. 그것이 감찰부 1과장인 에르제베트 마살로에 대한 세간의 소문이었다.
물론 감찰부의 악명과 평시에는 만날 일이 극히 드물다는 특성으로 인해, 감찰부 간부들에게는 온갖 기괴한 소문이 붙으니 걸러 들어야 하기는 하지만.
“부장님! 그거 제가 사온 건데!”
“고맙다. 과장을 잘 두니 입이 편하네.”
“아아아! 먹지 마세요!”
“루이제 너도 먹을래?”
“아아아앙!”
아무리 그래도 저 모습은 정말 예상 외다. 소문을 전부 쳐낸다고 해도, 1과가 고문에 특화된 과라는 건 사실이다. 수십년 전 일이지만 한때는 수석 1과라고 불리며 다른 과들에 비해 우위에 섰던 적도 있었다.
‘요즘은 달라졌나.’
감찰부에 대한 소식은 최신화가 느릴 수밖에 없다. 워낙 꽁꽁 싸매고 있는 부서니까. 막말로 이제는 고문이 아닌 다른 업무를 맡는다고 해도, 감찰부에서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특히 실권 없는 황자인 자신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까지 뻗은 아인테르와 1과장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아니었네.’
달라지기는 무슨.
루비가 연상되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아름다운 붉은색은 순식간에 질척한 핏빛으로 보였다.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는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게 아인테르를 훑은 1과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아인테르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감찰부가 이전 악명에 비해 달라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방금 1과장의 눈빛은 아인테르에게 굉장히 익숙하고도 끔찍한 눈빛이었으니.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눈빛.’
계승 분쟁에서 승리한 황태자에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전성기 시절의 2황자에게, 그리고 2년 전 칼에게 받았던 그 눈빛.
어쩌면 1과장이 아카데미에 온 것은 자신과 연관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아인테르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
“부장님, 부장님.”
“왜.”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칭얼거리던 1과장이 갑자기 귓속말을 건넸다.
“혹시 3황자 전하, 처리할 생각이세요?”
그 말에 내가 다급히 1과장의 귀를 잡아 끌었다.
“아, 아파요!”
“절대 아니니까 어디 가서 그런 분위기 풍기지 마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1과장이 그딴 얘기를 하니 소름이 끼친다. 1과장은 2년 전에도 ‘2황자는 언제 처리하실 건가요?’ 라는 말을 하며 은근슬쩍 2황자를 건드리고 싶은 티를 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점점 노골적으로 언급을 해서 내가 기겁을 했었지. 황자가 고문 당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기 전에 급하게 2황자 암살(아무튼 목격 신고 없음)을 실행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얌전히 있어.”
“네에에…”
귓속말을 끝내고 놓아주자 귀를 매만지는 모습. 얘가 진짜 겉으로만 보면 멀쩡한 애인데.
얘를 데리고, 박람회 기간 동안 있어야 한다고? 사방이 뚫리고 인파가 몰린 아카데미에서?
‘돌아버리겠네.’
어차피 과장이 올 거면 차라리 5과장이 오는 게 제일인데, 하필 고문은 1과장이 제일 잘하고.
보고 싶다, 5과장…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처음으로 자정에 맞춰 올린 기쁜 날입니다. 앞으로도 자정 연재가 가능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시점 관련으로 2차 수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에 나와있습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이 작가… 어제 괜히 포켓몬 드립을 썼다가 극심한 내상만 입고 말았습니다. 포켓몬스터 금을 즐긴 세대는 나이가 좀 있는 세대 취급을 받다니, 충격입니다.
심지어 따로 골드라는 리메이크 버전이 있어서 골드가 아닌 금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리메이크 언제 한 거지.
특히 포켓몬 게임을 4세대로 입문 하셨다는 말씀은 더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전 오히려 마지막으로 한 게임이 4세대였습니다. 저 분명 나이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닌데 왜…?
아무튼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