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51)
“폐하께서는 북방만의 문화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계십니다. 북방의 신앙을 존중하며 품에 안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폐하의 은혜를 받은 신하로서 그 아름다운 뜻에 따라 북방에 응당 가져야 할 물건을 돌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 말에 제사장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신물 과시는 신앙적 은혜를 넘어 북방을 품고자 하는 황제의 정치적 의도까지 섞였다. 바란디가 부족이 항복해야 할 이유를 아낌없이 주고 있으니 기꺼울 수밖에.
“허나 신물을 인도하는 건, 제사장께서 정식적으로 작위를 받은 후가 될 것입니다.”
물론 작위 수여 역시 항복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이왕 분위기 좋은 김에 몰아붙여야지.
심지어 작위 수여는 원수도 웃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선물이다. 분위기가 좋은 상황에서 주면 지지 관계를 넘어 일심동체 관계까지 나아갈 수 있는 회심의 수. 실제로 미소를 짓던 제사장은 작위라는 말에 경악한 듯 그대로 굳고 말았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폐하께서는 북방의 문화를 존중하십니다. 이는 북방의 유일한 제사장인 바란디가 족장님을 중히 대하겠다는 의미지요.”
그래, 중히 대하실 거다. 제사장은 제국의 드넓은 관용을 상징할 것이며, 북방 여기저기에 흩어진 유목민들이 최소한으로 공유하는 신앙의 상징이다. 제국이 북방을 원활히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제사장은 제국의 거물이 되어야 한다.
슬쩍 품 속에 잠들어있던 인장을 꺼냈다. 갑자기 품 속에 손을 집어넣자 제사장 뒤에 있던 호위가 긴장하는 것이 보였으나, 날붙이가 아닌 인장이 나오자 자세를 풀었다.
“바란디가 후작께 내리는 폐하의 신뢰입니다.”
“…후작?”
멍한 대답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프로 앞잡이인 카이타나 백작에게는 유감이지만 후작은 바란디가가 제격이다. 후작으로 삼을 상징성도 있고, 역사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규모는 작아서 다른 부족들을 힘으로 압도하기는 불가능하다.
‘딱이지.’
만약 제일 강한 놈이 후작이 되면 무력으로 다른 백작들을 쥐어 패서 북방의 실권자가 될 수 있다. 제3의 카간이 나올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니 용납할 수 없는 일.
그러니 바란디가다. 실권을 가진 후작이 아닌 명예를 지닌 후작을 만들어야 한다.
“제국의 열세 번째 후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저보다 높은 분이 되셨군요.”
제사장─ 아니, 바란디가 후작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인장을 바라봤다.
***
폭풍 같았던 협상이 끝났다.
“전선에 계신다면 언제 전투에 휘말리실지 모릅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시고, 전쟁이 끝나면 제도로 가시지요. 폐하께서 공식적으로 작위를 수여하실 겁니다.”
협상이 끝나기 전, 사절이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개 같은 인생이었는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난 전쟁에서 유목민이 패한 이후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지랄맞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생에 광명이 찾아왔다.
‘천명이라.’
사절이 말하기를, 제국의 황제가 자비와 관용으로 유목민을 품고자 하는 건 천명을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명, 하늘의 명.
‘…하늘.’
그 단어를 떠올리자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영원한 푸른 하늘을 섬기는 제사장이 하늘의 명으로 살아남았다. 거기다 치욕적인 굴복이 아닌 부와 명예가 따르는 삶이 보장되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신은 유일하게 남은 제사장을 보고 있었던 건가.
“족장님.”
계속 낄낄거리자 호위로서 협상장에 있었던 샤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거, 정말 신물이 맞나요?”
짧은 질문이지만 샤티가 느꼈을 혼란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 초원에도 남지 않은 신물을 제국인이 가져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지.
그런 샤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해줬다.
“몰라.”
“…네?”
“나도 모른다고.”
당당한 대답에 샤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어쩌겠나. 진짜 모르겠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신물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신의 힘을 느껴본 적도 없다.
애초에 신의 응답도 받지 못한 제사장이 신물을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냐. 제사장은 만능이 아니다.
“아, 아버지! 신물인 것도 모르면서 투항을─”
삐걱삐걱 입만 달싹이다 빼액 소리치는 샤티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바로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눈에는 여전히 의혹과 불만이 가득했다.
“샤티야.”
“…왜요.”
“중요한 건 그게 신물이냐 아니냐가 아니란다.”
다시 샤티가 소리치려는 기미가 보이기에 재빨리 덧붙였다.
“그걸 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검이 신물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의 사절은 그 검을 신물이라 말했고, 황제를 거론하며 이교도 품겠다고 하였다. 황제가 그 검이 신물임을 보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진짜 신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제국의 황제가, 유일한 제사장이 그것을 신물이라 말할 테니까.
‘진실이 무슨 상관이야.’
대륙 최강국과 신앙의 당사자가 맞다고 하는데, 그깟 진실이 중요해?
설령 중요하더라도 그게 초원의 평화와 부족의 안위보다 중요할까?
‘술맛 좋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마유주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오늘은 마시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