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57)
로판 속 공무원 357화(358/451)
며칠 지나지 않아 카이타나 부족의 영역을 발견했다.
솔직히 이걸 발견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인지 모르겠다. 제국은 가만히 있었는데 유목민이 억지로 눈앞에 들이민 수준이었지. 이 새끼들 화약이 있었다면 불꽃놀이를 하면서까지 위치를 홍보했을 거다.
그래도 위치를 파악한 건 맞으니 곧바로 움직였다. 이미 카이타나 부족의 투항 의지도, 제국의 수용 의지도 히트라 전선에서 전부 공개했다. 이제 와서 밀당을 하며 간을 보는 건 서로 귀찮은 일이다.
“외교는 처음 해봐서 긴장되네.”
그렇게 묵광대와 함께 이동하던 중, 옆에 있던 4과장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묵광대가 든든하기는 하지만 워낙 근엄하고 진지한 애들이라 가는 길이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걸면 황송하다는 듯 반응해서 미안할 정도고. 그나마 정상적으로 받아주는 건 4과장 정도다.
“주인님이라면 어떤 일이든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봐라. 지금도 서툴게나마 평범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지 않나.
“만약 그들이 주인님을 업신여긴다면 저희가 카이타나 부족을 절멸─”
“하지 마.”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정상이라는 거지만.
4과장을 다소 씁쓸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얘가 그동안 험한 임무만 해서 그런지 일이 꼬이면 무력으로 쓸어버린다는 선택지를 가장 먼저 골라버린다. 세상은 무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과 뜨거운 진심으로도 이겨낼 수 있는 곳인데.
‘내가 계속 데리고 있어야 했어.’
이게 다 남이 키운 애들을 뜯어간 특무성 때문이다. 명령은 황실이 했지만 아무튼 특무성 잘못이다.
이 아이들이 계부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내 품으로 올 날이 올까…?
숙이는 것도 확실하게 숙이면 예술이라는 걸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귀한 손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 카이타나 부족의 영역에 진입하자마자 비무장 상태의 유목민 하나가 접근했다. 나름 복장도 화려하고 장신구도 여럿 달린 것을 보니 부족 내에서 고위직인 모양.
친히 행차한 고위직의 온화한 반응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국인에게 우호적인 유목민을 보는 건 너무 낯선 일이다.
“이리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별말씀을. 오히려 언제 오시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색함을 밀어내고 겨우 입을 열자 더욱 노골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저 애타게라는 단어에서 카이타나 부족장의 고뇌가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자,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 혼자 귀한 분들을 상대하면 족장께서 서운해하실 것 같군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무장은 어디에 반납하면 되겠습니까?”
“무장이요?”
몸을 돌려 우리를 안내하려던 유목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냥 들어오셔도 됩니다! 번거롭게 무장을 해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뭔.’
무장조차 수거하지 않는 패기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우호적인 진영에 방문하더라도 최소한의 호위를 제외하면 무장을 수거하거나 격리하는 편인데, 카이타나 부족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무장한 사절단이 와도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우리를 믿는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놈들은 아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거 참, 귀한 분들과 험한 이유로 만나게 돼서 민망하기 짝이 없군요.”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좋은 인연이 돋보이는 법이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유목민을 따라가던 도중, 너스레를 떠는 유목민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유목민이 더욱 기꺼워하는 것이 보였다. 전쟁 중에 만난 것은 유감이나, 전쟁 중이기에 투항을 원하는 카이타나 부족이 더욱 좋게 보인다는 말이니까.
“제가 귀한 분께 한 수 배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좋은 인연이 돋보인다라,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국이 카이타나 부족을 좋게 볼수록, 제국이 카이타나 부족에게 지불할 몸값은 늘어난다는 의미.
연신 웃음을 흘리던 유목민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존함을 여쭈어보지도 못했군요. 저는 크잔 베테라고 합니다. 족장이신 카이타나 크잔 다란님의 동생이지요.”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입니다.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받아 백작위를 받았습니다.”
내 이름을 들은 유목민─ 베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정말 귀한 분이 오셨군요.”
그 말에 나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협상 당사자가 아닌 안내자에게 건네줄 정보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부족장도 베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부족의 명운을 짊어진 입장이라 그런지 더한 면이 있었다.
“가아르 부족은 북방과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힌 악적입니다. 제국의 위엄으로 그 악적이 토벌되어 겨우 한숨 돌렸는데, 3년 만에 그 잔재가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고달팠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만 믿고 따르는 동포들이 많으니 참고 견뎌야지요. 다행히 제국 덕에 그 악적의 손에서 벗어날 수─”
과장된 어조와 몸짓으로 카간과 칸을 싸잡아 욕하던 부족장은 자신이 부족의 안전을 위해 눈물겨운 결단을 했다는 것도 어필했다. 어떻게든 나에게’우리 그 새끼랑 관계 없음.’ 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관계가 없기는 해. 카간 때는 제3진영으로 관망했고, 지금도 칸의 매콤 주먹 때문에 억지로 끌려 나온 상황이니까. 제국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니 책임을 물을 것도 없다.
“족장 같은 분이 계시니 혼란스러운 북방에도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겠지요. 실로 천운이라 생각합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부족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죽 부대를 입에 댔다.
“크으, 귀한 손님이 오셔서 그런지 베테가 좋은 술을 가져왔군요. 평소에는 술을 줄이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던 놈이.”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고기를 먹는 부족장의 모습은 귀족의 예법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만큼 투박하고 솔직해 보였다.
나 역시 부족장처럼 술을 몇 모금 마셨다. 애초에 카이타나 부족이 계략을 꾸미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음식까지 제공받았다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 유목민이 접대의 관습을 어기면 죽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괜히 걱정했나.’
아까 외교는 처음이니 뭐니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쉬울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쉬울 줄은 몰랐지. 자동문도 너희보다는 느리게 열리겠다.
“폐하께서는 북방의 혼란을 안타깝게 여기고 계십니다.”
“하늘과도 같은 자비로군요. 저희 같은 천한 것들도 염려해 주시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슬슬 대화를 끝내기 위해 황제를 언급하니 부족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제국을 대표하여 온 사절이 황제를 입에 담았다는 건 용건을 말하겠다는 뜻이니.
“폐하의 자비는 그저 염려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북방을 품에 안아, 평화를 갈망하는 선량한 신민들을 보살피시고자 하십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군요.”
그렇게 말한 부족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황제가 북방에 어느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지, 북방에 유입될 물자는 얼마나 될지, 가장 먼저 항복한 카이타나 부족은 얼마나 많은 이권과 안전을 보장받을지 계산 중일 터.
굳이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말해줄 거니까.
“허나 북방에는 북방의 방식이 있는 법. 폐하께서는 기존 질서를 존중하고자 하십니다. 이미 북방의 질서를 위해 악적과 거리를 두는 자들이 있는데, 어찌 폐하께서 그런 자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부족장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제국이 기존 질서를 존중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부족장이라는 직함과 카이타나 부족의 영향력은 건재하다는 것이니. 그것만 지켜도 부족장 입장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물론 카이타나 백작께서도 그중 한 분이고요.”
“과분한 평가라 민망…?”
반사적으로 겸양을 표하던 족장은 뒤늦게 위화감을 눈치챘는지 딱딱히 굳었다. 그러면서 눈동자만 겨우 굴리며 내 안색을 살피는 것이,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오늘부터 넌 백작이다.
‘후작을 가볍게 던질 수는 없지.’
처음에는 카이타나에게 후작위를 던질까 싶었지만, 아직 접촉하지 못한 부족이 많다. 괜히 성급히 행동했다가 더 괜찮은 부족을 만나면 곤란한 일 아니겠나.
그러니 일단 백작이라고 하자. 백작인 줄 알았는데 후작으로 올려주면 기뻐하겠지. 그 반대라면 끔찍하겠지만.
***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흥분과 혼란 속에서 딱 한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백작.’
내가, 내가 백작. 일개 부족장인 내가 제국의 귀족.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탁자 아래로 내렸다.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슬쩍 혀로 훑었다.
‘유목민이, 귀족?’
믿을 수가 없다. 고작 토벌 대상에 불과한, 그게 아니더라도 제국이 선심 쓰듯 던져주는 물자를 먹고사는 유목민이 제국의 귀족이 된다고? 그것도 자작, 남작이 아닌 백작 같은 고위 귀족이?
기존 질서를 존중한다길래 그저 물자를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우리를 앞세워 다른 부족들을 통제하려는 줄 알았다. 그게 지금까지 제국이 썼던 방식이니까. 그 이상은 감히 바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제국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한 보물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유목민을 제국의 지배층에 포함하겠다는 매력적인 보물을.
‘거짓말은 아니겠지.’
사절이 대놓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말을 빙빙 돌려서 책임을 피할지언정, 거짓은 말하지 않는 게 사절 아니던가. 그 정도는 유목민인 나도 안다.
심지어 사절로 온 자도 거물이다. 그런 거물을 동원해서 한다는 것이 거짓말? 너무 인력 낭비다.
‘나만 받을 제안은 아닐 거다.’
그렇게 제국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두고 머리를 굴리자 다른 쪽으로 생각이 뻗었다.
이 드넓은 북방에 고작 귀족을 하나만 꽂을 리는 없다. 나처럼 투항하는 부족들에게는 적당한 작위를 뿌릴 터. 무수히 많은 유목민 귀족이 생길 터.
‘지금의 판도와는 달라진다.’
이제 북방의 서열은 부족의 강성함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작위가 높고 낮음에 따라 정해진다.
물론 부족이 강하다면 높은 작위를 받겠지만, 강성함의 차이는 다른 것으로 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적극적인 협조, 적극적인 충성.
더욱 노골적으로 말하면 제국─ 황실의 총애.
‘…이거 참.’
이런 보물을 던지면 맛이 들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늦게 합류하면 변절자지만, 빠르게 합류하면 공신이다.’
오늘부터 난 공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