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59)
로판 속 공무원 359화(360/451)
대토벌 전쟁 이후로 제국의 대북방 정보력은 완전히 무너졌다. 종전부터 현재까지 정보력 재건에 힘썼어도 이전의 절반 수준을 회복할까 말까인데, 그마저도 역천자의 혈육을 추적하느라 온전히 재건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제국은 북방의 전력과 내부 상황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역천자의 혈육이 칸을 자칭했으니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미지에서 오는 공포, 그나마 참고할 수 있는 경험은 제국의 천명이 사형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 갔던 역천자의 발호. 느슨하게 대처한다면 제국과 천명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게 현실이었나.’
허나 미지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현실을 목도하니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과연 지금의 북방을 단일 세력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내부 배신자가 버젓이 행동하고, 아무도 그 배신자를 처단하지 않는 상황이 과연 정상인가.
‘연합인가?’
아니, 그보다도 아래다.차라리 연합이면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투쟁하거늘, 이것들은 목표조차 공유하지 않는다.
‘칸이라는 이름이 가벼운 것은 아닐 텐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차라리 거대 부족의 부족장이 자신과 뜻이 맞는 일부 세력을 이끌고 봉기한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나, 역천자의 혈육은 칸을 자칭했다. 단순한 유력자와 칸은 차원이 다른 권위를 지닌다.
그런 권위를 내세우며 세력을 규합한 수완가가 내부 단속에 실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부 단속조차 못하는 자가 칸을 자칭하면 제국이 나설 것도 없이 유목민 선에서 몰락한다. 감히 네놈 따위가 우리 위에 설 자격이 있냐고 묻는 다른 부족들의 손에 무너진다.
실제로 유목민의 역사를 보면 칸을 자칭한 족장은 간혹 나타났다. 그 최후가 전부 같은 유목민 손에 죽은 것이라 중히 여기지 않았을 뿐.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나 개인의 아집이 아닌 역사가 말하고 있다. 칸을 자칭한 자가 맞이할 수 있는 미래는 딱 두 가지라고.역천자처럼 모든 부족 위에 군림하여 재앙이 되거나, 자칭자들처럼 초원의 망령으로 전락하거나. 절대 지금의 칸처럼 엄격한 통제 없는 군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해할 수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다. 그렇다면 현실 부정이 아닌 대처법을 생각하는 수밖에.
칸의 통제력이 허술하다면 그 틈을 노려 제국의 영향력을 넓혀야 한다. 그리고 제국에 고개 숙인 부족이 늘어날수록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해 추리할 수 있는 정보도 늘어날 터.
‘이교의 제사장이라.’
그런 의미에서 전승공이 보고한 바란디가 부족은 최우선 포섭 대상이다. 종교는 그저 종교에서 멈추지 않고, 일상생활에 녹아내리는 법이기에 유목민의 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이교라는 것이 유일한 걸림돌이나─
‘영원한 푸른 하늘.’
문득 태자가 보고한 세계수 부활 사태가 떠올랐다.
아펠스의 만행으로 사라진 세계수가 크펠로펜 시기에 부활한 기념비적인 일이라 자세히 살펴봤었지. 그 원인이 에넨이 아닌 다른 신의 힘과 접촉한 감찰부장이라는 것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세계수 부활에 감찰부장이 얽힐 수 있나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로 대제께서 보우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북방의 신이 제국인을 통해 세계수를 부활시켰다.’
그렇다면 단순히 이교라고 탄압할 명분이 없다. 세계수는 여명 교단 입장에서도 중요한 존재이니.
결정을 내리자마자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이 순간에도 전쟁은 지속 중이고, 제국의 장병들은 낯선 타지에서 피를 흘리고 있을 터. 종전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군주의 도리.
– 폐하의 미천한 종이 폐하께─
“리시우코 추기경을 부르도록. 긴히 할 말이 있다.”
고개를 숙이는 궁내성 장관의 말을 끊으며 바로 지시를 내렸다.
리시우코 추기경, 아우스엔 대교구의 수장으로서 제국에 존재하는 여명 교단 관계자 중 가장 큰 권한을 지닌 인물.그자도 세계수 부활에 관한 전말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으니 설득은 빠를 것이다.
***
전승공의 호출을 받고 막사에 들어가자 카이타나 백작에게 받은 다단계 지─ 아니, 북방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항복 의사가 분명한 부족들의 영역이 표시된 충성의 증표.
“감찰관. 바란디가 부족의 영역에 대해서 들은 게 있는가?”
지도를 내려다 보며 입을 여는 전승공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여러 부족이 터전을 옮겼고, 그중 바란디가 부족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카이타나가 아닌 다른 부족과 접촉해야 가능성이 있겠군.”
“예, 각하.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북방 선정 올해의 앞잡이인 카이타나 백작도 모든 부족의 위치를 꿰고 있는 건 아니다. 부족의 영역이라는 건 막말로 하루아침에 변할 수도 있는 것이라, 지속적인 교류가 없다면 타부족의 영역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카간이 힘 좀 쓴다는 부족과 함께 폭사하면서 북방에는 이주 대란이 터졌었다. 힘 좀 쓰는 부족의 영역은 북방에서도 알짜배기 영역이고, 그 알짜배기 부동산이 주인 없는 공백지로 변한 것이다.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던 부족들 입장에서는 하늘이 내린 기회겠지.
바란디가 부족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딱히 바란디가 부족과 교류를 이어가지 않았던 카이타나 백작은 그대로 바란디가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다.
“다만 바란디가 부족이 전선으로 이동 중이라는 걸 다른 부족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카이타나 백작이 전쟁 초기에 확보한 정보가 있어서 다행이지. 그 정보 덕분에 바란디가 부족이 중립이라는 걸 파악했다고 한다.
신앙이 짓밟힌 제사장 부족이라면 당연히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왔을 텐데, 기이할 정도로 이동 속도가 느리다면 바란디가 부족이 아직 전쟁을 각오하지 못했다는 의미. 그렇다고 완전히 항복이라 보기에는 제국에게 어필도 하지 않는 상황이고.
“후방에 숨은 건 아니라 다행이군.”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던 전승공은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북방 어딘가에 숨어있을 부족 찾기’와 ‘언젠가 전선에 올 부족 찾기’는 난이도가 너무 심하게 차이 나지 않나.
“폐하께서는 이교라 할지라도 제국의 품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마땅히 품으시겠다 하셨다.”
“폐하의 자비가 실로 바다와 같습니다.”
사실상 이교 신앙의 구심점인 바란디가 부족도 품겠다는 말에 본능적으로 입에서 찬양을 내뱉었다.
솔직히 국익을 중시하는 황제의 성격을 보면 이교여도 품을 거라고 짐작하기는 했으나, 에넨의 총애를 받아 천명을 받드는 크펠로펜의 황제가 이교를 거두는 건 부담이 큰 일이다. 그 부담을 기어코 감당했으니 신하로서 황제의 결단을 찬양해야 할 일.
“바란디가 부족이 전선에 출현하면 접촉하고자 하니, 감찰관도 알아두도록.”
“예, 각하.”
전승공에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바란디가 부족과 접촉한다면 카이타나 부족과 달리 난관이 많을 것이다. 일단 바란디가는 확고한 항복 의지가 없으며, 북방에 남은 최후의 제사장이니 신앙심이 출중할 터. 신앙을 화려하게 짓밟은 원흉인 나에게 썩 좋지 못한 감정을─
– 제사장? 그런 애 없는데. 다 죽었어.
아, 그건 다행이네. 그럼 신앙심 넘치는 사람은 없겠다.
…
‘예?’
뒤늦게 위화감을 느꼈다.
제사장이, 없어?
요정들을 피해 말을 걸던 영원한 푸른 하늘은 내가 북방에 진입하자 침묵 상태에 돌입했었다. 아무리 신이 인간에게 과도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지만, 자신의 신도였던 유목민들이 죽는 꼴을 가까이서 보기는 씁쓸하겠지. 애초에 영원한 푸른 하늘의 본진은 이제 세계수기도 하고.
그런 영원한 푸른 하늘이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말을 걸었다.
– 제사장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영락하지는 않았겠지. 신전도 제사장도 없으니까 네 몸에서 지냈던 거야.
몹시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생각해 보면 영원한 푸른 하늘과 처음 만났을 때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것 같기는 하다.망할, 왜 잊고 있었지? 신을 만났다는 충격에 기억력이 맛이 갔었나?
‘제사장이 전멸.’
아무튼 새로운 정보가 갱신되었으니 다시 머리를 굴렸다. 카간을 따르지 않았던 바란디가 부족의 제사장마저 죽었다면, 제국이 이교 신앙을 짓밟기 위해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제사장까지 기어코 죽였다는 의미다.
이러면 협상 난이도가 급등한다. 가만히 있던 자신들을 습격한 제국을 어떻게 믿─
– 아, 마지막 제사장은 자연사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편하게 늙어 죽었어.
‘…….’
정보가 다시 갱신됐다.
– 아들이 족장 자리랑 제사장 자리도 계승했는데… 계승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제사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더라.
신전이 박살 나서 그런가? 라고 중얼거리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환장하겠네.’
어째 요즘 들어 머리를 굴리는 족족 현실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
부족들의 당당한 탈주, 카이타나 백작의 화려한 앞잡이, 편히 살다가 명맥이 끊긴 마지막 제사장까지.
‘망할.’
북방은 진짜 마가 낀 건가, 사소한 거 하나하나까지 예측을 할 수가 없다.
***
어제 저녁은 양고기를 먹었으니, 오늘은 말고기가 좋을까?
“족장님, 이제 며칠 후면 전선에 도착합니다. 제국과 충돌할 수도 있다고요.”
그 와중에 술은 매일 마유주만 마시니 지겹기 짝이 없다. 제국에서 올라온 술은 귀하니 함부로 마실 수가 있어야지.
“어서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제사장으로서 이교와 맞설 것인지, 아니면 대세를 따를 것인지!”
그래도 가끔은 귀한 걸 마셔도 좋지 않을까 싶다. 술은 마시라고 있는 거지, 장식품이 아니니─
“아버지!”
“듣고 있다.”
빼액 소리 치는 샤티를 향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나뿐인 딸이 파들파들 떠는 걸 보면 조금 미안하지만, 애석하게도 샤티는 제사장이라는 이름에 너무 과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사장은 개뿔.’
신전도, 신물도, 희망도, 미래도 잃은 신앙에 제사장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지난 전쟁에서 우리 부족은 아버지의 연로함을 이유로 중립을 지켰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끈 것은 아니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사도이자 대제사장, 그리고 유목민을 최초로 통합한 카간. 그런 존재가 제국을 밀어붙이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도는 신의 곁으로 갔다. 대제사장은 더 이상 이 땅에 신앙을 퍼뜨리지 못하고, 카간은 제국의 칼 앞에 무너졌다.
우리는 끝났다. 우리의 믿음, 신앙은 그날 무너진 것이다. 그러니 제사장이고 뭐고 부질없는 이름이지. 그런 상황에서 다른 놈들은 나를 제사장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기대의 눈빛으로 보고 있다.
‘제사장은 목이 잘려도 부활하는 줄 아나.’
제국이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이라는 직함을 포기할 수도 있으나, 애석하게도 우리 부족을 묶는 가장 큰 요소 역시 제사장이라는 이름이다. 덕분에 이 애물단지를 몇 년이나 달고 있었고.
그래서 미칠 노릇이다. 샤티의 말처럼 대세에 따르기에는 이 애물단지에 너무 매몰되었고, 다 죽은 신앙을 따르기에는 목숨이 아깝다.
‘인생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 난다. 우리 부족 사람들이야 제사장이라는 권위로 뭉친 부족이니 이해할 수 있는데, 다른 부족 놈들은 왜 나한테 기대를 걸고 지랄이지? 내가 제사장이라고 어디 말 한 마리, 땅 한 뼘이라도 바치기를 했나?
‘카간이 살아 있었다면 입도 뻥긋 못했을 것들이.’
하여간 개 같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