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1)
로판 속 공무원 361화(362/451)
바란디가 부족이 원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란디가 부족장의 속내가 어떻든 부족장은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다.
제사장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에도 다른 부족들은 바란디가 부족장을 제사장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부친께서 돌아가셨지만 나도 제사장임.’ 이라고 열렬히 홍보 중이라는 거겠지. 물론 그 이유 역시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다.
그거면 충분하다. 바란디가 부족장이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그 이름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흔을 받고, 신물을 보유한 자가 왔으니 제사장은 손님으로서 맞이해주십시오!”
그래서 바란디가 부족의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당당히 외쳤다.
나는 네가 모시는 신의 성흔을 받고 그 신의 신물조차 가지고 있다고.네가 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제사장이라면 차마 문전박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 너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머릿속에 울리는 중얼거림에 조금 머쓱해졌다. 영원한 푸른 하늘을 모시는 신앙을 개박살 낸 사람으로서 당당히 외칠 말은 아니었으니.
그래도 애써 당당함을 연기할 수 있었다. 내가 나만의 사리사욕을 위해 영원한 푸른 하늘을 팔아먹는 거면 개새끼가 맞지만, 이건 둘 다 이로운 일이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니 봐주십쇼.’
– 그래, 뭐, 나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영원한 푸른 하늘은 다시 조용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목민 몇 명이 급하게 달려왔다.
무기가 없는걸 보면 일단 손님으로 맞이할 생각이기는 한 것 같다.
주둔지 중심에 있는 게르에 도착하자 한 중년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수염도 단정한 것이 제법 외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만, 짜증과 피로가 뒤섞인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걸 보면 연이은 실패로 좌절한 백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흔과 신물이라.”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남성은 가죽 부대를 입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제사장도 보지 못한 것을 제국인이 가지고 있다니, 흥미로운 말이오.”
그러나 말과 달리 아무런 흥미도 없는 표정을 한 남성은 손을 뻗으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는 것처럼.
예상대로 일방적인 축객령이나 공격 시도는 없었다. 아직 접대를 받지 못해 아슬아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스타트다.
“초원의 유일한 제사장인 바란디가 구르트 바탈이오. 이 바란디가 부족의 족장이기도 하지.”
“황제 폐하의 은혜로 백작위를 받은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입니다.”
늘어지듯 의자에 앉아있던 제사장은 내 이름을 듣고 움찔하더니 서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칼 크라시우스?”
그리고 이전의 권태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제사장의 눈에 깃들었다.
“하늘을 섬기는 대제사장과 그분의 집을 파괴한 이교도로군.”
어느새 위압감이 섞인 발언이나 상정한 범위 내다. 내가 제사장에게 성흔과 신물을 들먹이며 신앙적으로 접근한 이상, 제사장은 제국인이자 이교도인 나에게 북방의 신앙을 내세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 만남이 성사된 것은 제국 사절이 바란디가 부족장에게 만남을 청해서가 아닌, 성흔과 신물의 소유자가 제사장을 만나기를 청했기 때문이니.
하지만 상관없다. 거부할 수 없는 만남이 성사된 시점부터 협상은 진행 중이니까.
“신앙의 적이 성흔과 신물을 가지고 있다니, 지독한 농담이야.”
“대적자도 신화의 일부.”
난데없는 말에 제사장의 눈가가 찌푸려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신화의 일부인 대적자이기에 신과 얽히기도 합니다.”
그 말과 함께 4과장에게 손짓을 하자 4과장은 품에 들고 있던 내 검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카이타나 부족과 달리 호위와 무장이 제한되어 어쩔 수 없는 조치.
…아니, 사실 이게 정상이고 카이타나가 이상한 거였지.
“여명 교단의 초대 교황은 이교도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을 찌른 단검은 신성한 피를 머금어 신물이 되고, 교황을 해한 신앙의 적은 회개하여 신앙을 퍼뜨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뜬구름 잡는 말이지만 제사장은 무언가 눈치챈 듯 탁자에 놓인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다. 눈치가 제법 빠른 양반이구나.
“그렇기에 대제사장을 죽인 검이 신물이 되고, 신전을 파괴한 이교도가 성흔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대충 요약하면 ‘내가 너네 대제사장도 죽이고 신전도 부쉈지만 아무튼 신물과 성흔은 진짜다.’ 라는 말.
순간 옷을 벗어서 성흔까지 보여줘야 하나 싶었지만,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제사장은 픽 웃음을 흘리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는 없는 법이지. 귀한 걸 가지고 오셨구려.”
그렇게 말한 제사장은 뒤에 서있던 호위에게 말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상을 차려와라.”
“예, 족장님.”
완전히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일이 틀어졌으면 신앙의 구심점인 부족에서 칼춤을 춘 다음에 탈출했어야 하니까.
그건 그렇고 검을 보기만 하고 납득하다니, 나름 제사장이긴 한 건가? 신의 힘을 느끼기는 하는 것 같다.
제사장의 반응은 제법 온화했다. 제사장으로서는 무너져가는 신앙의 신물을 가져온 자를 상대하는 것이고, 부족장으로서도 부족을 살릴 수 있는 사절이 온 것이니 당연한 일.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렇게 온화하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항복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신물은커녕 우리의 주를 섬길 신전조차 없던 상황에서 제사장을 자처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노고가 많으셨겠습니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바란디가 부족은 신앙으로 뭉친 부족인데, 제사장인 저조차 어둠을 헤매는 기분이니 다른 동포들은 오죽했겠습니까.헌데 제국이 주의 힘이 담긴 신물을 보여주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였으니, 감사하다는 말조차 부족합니다.”
어느새 존대로 돌변한 제사장의 말을 듣고 나니 납득할 수 있었다.제사장은 항복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거다. 부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고 싶지만 제사장이라는 직함 때문에,그렇다고 제사장임을 포기하기에는 살리고자 하는 부족이 무너질 것 같기에.
그 미칠 것 같은 딜레마 속에서 내가 활로를 열어줬으니 제사장도 망설일 것이 없었겠지. 굳이 내가 아닌 제국이 새로운 길로 인도했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이제 제사장의 투항은 그저 살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몰락해가는 신앙에 빛을 선사해 준, 신앙적으로 은혜를 베푼 제국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폐하께서는 북방만의 문화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계십니다. 북방의 신앙을 존중하며 품에 안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폐하의 은혜를 받은 신하로서 그 아름다운 뜻에 따라 북방에 응당 가져야 할 물건을 돌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 말에 제사장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신물 과시는 신앙적 은혜를 넘어 북방을 품고자 하는 황제의 정치적 의도까지 섞였다. 바란디가 부족이 항복해야 할 이유를 아낌없이 주고 있으니 기꺼울 수밖에.
“허나 신물을 인도하는 건, 제사장께서 정식적으로 작위를 받은 후가 될 것입니다.”
물론 작위 수여 역시 항복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이왕 분위기 좋은 김에 몰아붙여야지.
심지어 작위 수여는 원수도 웃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선물이다. 분위기가 좋은 상황에서 주면 지지 관계를 넘어 일심동체 관계까지 나아갈 수 있는 회심의 수.실제로 미소를 짓던 제사장은 작위라는 말에 경악한 듯 그대로 굳고 말았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폐하께서는 북방의 문화를 존중하십니다. 이는 북방의 유일한 제사장인 바란디가 족장님을 중히 대하겠다는 의미지요.”
그래, 중히 대하실 거다. 제사장은 제국의 드넓은 관용을 상징할 것이며, 북방 여기저기에 흩어진 유목민들이 최소한으로 공유하는 신앙의 상징이다. 제국이 북방을 원활히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제사장은 제국의 거물이 되어야 한다.
슬쩍 품 속에 잠들어있던 인장을 꺼냈다. 갑자기 품 속에 손을 집어넣자 제사장 뒤에 있던 호위가 긴장하는 것이 보였으나, 날붙이가 아닌 인장이 나오자 자세를 풀었다.
“바란디가 후작께 내리는 폐하의 신뢰입니다.”
“…후작?”
멍한 대답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프로 앞잡이인 카이타나 백작에게는 유감이지만 후작은 바란디가가 제격이다. 후작으로 삼을상징성도 있고, 역사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규모는 작아서 다른 부족들을 힘으로 압도하기는 불가능하다.
‘딱이지.’
만약 제일 강한 놈이 후작이 되면 무력으로 다른 백작들을 쥐어 패서 북방의 실권자가 될 수 있다. 제3의 카간이 나올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니 용납할 수 없는 일.
그러니 바란디가다. 실권을 가진 후작이 아닌 명예를 지닌 후작을 만들어야 한다.
“제국의 열세 번째 후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저보다 높은 분이 되셨군요.”
제사장─ 아니, 바란디가 후작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인장을 바라봤다.
***
폭풍 같았던 협상이 끝났다.
“전선에 계신다면 언제 전투에 휘말리실지 모릅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시고, 전쟁이 끝나면 제도로 가시지요. 폐하께서 공식적으로 작위를 수여하실 겁니다.”
협상이 끝나기 전, 사절이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개 같은 인생이었는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난 전쟁에서 유목민이 패한 이후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지랄맞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생에 광명이 찾아왔다.
‘천명이라.’
사절이 말하기를, 제국의 황제가 자비와 관용으로 유목민을 품고자 하는 건 천명을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명, 하늘의 명.
‘…하늘.’
그 단어를 떠올리자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다.영원한 푸른 하늘을 섬기는 제사장이 하늘의 명으로 살아남았다. 거기다 치욕적인 굴복이 아닌 부와 명예가 따르는 삶이 보장되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신은 유일하게 남은 제사장을 보고 있었던 건가.
“족장님.”
계속 낄낄거리자 호위로서 협상장에 있었던 샤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거, 정말 신물이 맞나요?”
짧은 질문이지만 샤티가 느꼈을 혼란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 초원에도 남지 않은 신물을 제국인이 가져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지.
그런 샤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해줬다.
“몰라.”
“…네?”
“나도 모른다고.”
당당한 대답에 샤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어쩌겠나. 진짜 모르겠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신물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신의 힘을 느껴본 적도 없다.
애초에 신의 응답도 받지 못한 제사장이 신물을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냐. 제사장은 만능이 아니다.
“아, 아버지! 신물인 것도 모르면서 투항을─”
삐걱삐걱 입만 달싹이다 빼액 소리치는 샤티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바로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눈에는 여전히 의혹과 불만이 가득했다.
“샤티야.”
“…왜요.”
“중요한 건 그게 신물이냐 아니냐가 아니란다.”
다시 샤티가 소리치려는 기미가 보이기에 재빨리 덧붙였다.
“그걸 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검이 신물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의 사절은 그 검을 신물이라 말했고, 황제를 거론하며 이교도 품겠다고 하였다. 황제가 그 검이 신물임을 보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진짜 신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제국의 황제가, 유일한 제사장이 그것을 신물이라 말할 테니까.
‘진실이 무슨 상관이야.’
대륙 최강국과 신앙의 당사자가 맞다고 하는데, 그깟 진실이 중요해?
설령 중요하더라도 그게 초원의 평화와 부족의 안위보다 중요할까?
‘술맛 좋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마유주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오늘은 마시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