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2)
로판 속 공무원 362화(363/451)
기껏 전선까지 내려온 바란디가 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을 이탈했다. 일요일 아침에 벨튀하는 꼬맹이도 쟤네보다는 여유로울 거다.
하지만 바란디가 부족의 벨튀는 다른 부족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지금까지는 중립 진영으로 취급되던 바란디가 부족이 제국의 사절과 접촉한 직후 전선을 빠져나왔다. 이는 누가 봐도 바란디가 부족마저 친제국으로 돌아섰다는 의미.
비록 바란디가 부족의 무력은 전황을 주도하기는커녕 전선 하나를 뒤흔들기에도 부족한 수준이나, 유일한 제사장이라는 상징성만큼은 북방을 아우르는 수준이다. 오히려 신앙에 있어서는 칸과 비등하거나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자.
“키르기아 부족이 투항했습니다. 악적의 칼날이 두려워 고개를 숙였으나, 비로소 하늘의 뜻을 알았으니 제국을 섬기고 싶다고 합니다.”
“비르스 부족이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관대한 처우를 바란다며 말 500필을 바쳤습니다.”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던 카이타나 부족과 신앙의 구심점인 바란디가 부족. 네임드 부족이 연이어제국에 투항하자 다른 부족들도 빠르게 대가리를 박았다. 제국이 접촉하기도 전에 항복한 것을 보면 꽤나 다급했던 모양이다.
바란디가 합류 이전까지는 제국에 투항 의지를 보이고, 단순히 적대하지 않는 수준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을 거다. 솔직히 나나 전승공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개 같은 유목민들이 조용히 있어주는 걸로도 이득이기는 하지.
그러나 제국에 고개 숙이는 거물들이 많아질수록 제국은 다른 부족들의 투항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굳이 버스가 만석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필요한 손님만 태운 뒤 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제국의 사절을 기다리던 부족들은 일제히 달려왔다. 괜히 느릿하게 움직였다가 버스 문이 닫히면 그대로 죽는 것이니.
“디게라 부족장이 라비르제 원수와 접촉했습니다. 자신의 목을 넘길 테니 부족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 요청했습니다.”
심지어 전선에서 제국군과 교전 중이던 부족이 투항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신앙이 중요하기는 하네.’
놀라운 일이다. 디게라 부족은 전쟁 초기부터 전선에 지속적으로 얼굴을 보였고, 바란디가 부족이 전선에 나타난 뒤로는 더욱 거센 공세를 펼친 부족이다.제사장의 출현이 기폭제가 된 것을 보면 신앙심이 넘치는 부족일 터.
그런데 그 제사장이 제국에 투항했다. 사기를 끌어올린 신앙 버프가 절망의 디버프로 돌변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결국 디게라 부족장은 홀몸으로 제국에 항복했다. 지금까지 신앙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 신앙이 제국에게 안겼으니 당연한 일.
“디게라 부족의 죄가 작지는 않으나, 그 죄를 깨닫고 천명에 굴복했다. 족장의 자리를 자식에게 넘기고 칩거하는 것으로 디게라 부족장의 처벌을 끝내겠다.”
“예, 각하.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전승공의 판결에 참모가 고개를 숙인 뒤 통신구를 쥐었다.제국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자에게 내리는 처벌치고는 매우 관대하나, 디게라 부족장은 주전파 부족 중 첫 투항자다. 나름 관용을 보이며 광고탑으로 쓰기에 충분하다.
이제 제국의 품에 안길 부족은 투항파와 중립 진영뿐만이 아니다. 주전파 중에서도 신앙심 깊은 부족은 혼란 상태에 빠질 것이고,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디게라 부족을 떠올리며 일말의 희망을 가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숙이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도 긍정적인 전황이라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감사를 표했다. 카이타나 부족 같은 경우가 있으니 영원한 푸른 하늘이 없었어도 제국에 투항하는 부족들은 제법 있었겠지만, 바란디가 부족의 합류로 그 규모와 시간이 크게 앞당겨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신물과 성흔으로 인해 제사장을 포섭했고, 제사장은 북방의 일부를 이끌었다. 비록 신물과 성흔을 얻게 된 계기는 썩 유쾌하지 않으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 …….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감사를 표하면 은근히 으스대며 농담을 건넬 양반이 말이 없다.
뭐지? 요정들한테 머리채라도 붙잡혔나? 그러면 대화할 처지가 아니기는 한데.
– 이상해…
다행히 머리를 붙잡힌 건 아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 제사장한테, 아무런 반응도 없어…
하지만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뻔했다. 제사장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지금의 제사장은 신물을 본 상황이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주장에 따르면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 지금은 북방에 신전도 없고 신물도 없어서 제사장이 제사장답지 못하지만, 신물을 보면 달라질 거야! 아직 내가 이 세상에 있음을 알고 열심히 예배를 지낼걸? 그럼 나한테도 힘이 들어오고, 그 힘을 세계수 부활에 쓸 수 있어!
바란디가 부족과 협상을 하기 직전, 신물을 제사장에게 넘기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영원한 푸른 하늘은 기대감과 흥분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었다.
그 말을 듣고 제사장에게 당당히 신물을 공개하고 양도 선언까지 한 거다. 그렇게 하면 바란디가 부족이 제국에 합류할 거라 생각했고, 진정한 신앙을 되찾아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사장은 제국에 합류하기만 한 것 같다.
–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제사장이라면, 아무리 이름뿐인 제사장이라도… 신물을 보고 반응이 없을 수는…
처량하게 중얼거리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머릿속에 울렸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바란디가 부족이 항복한 걸로도 충분하지만, 공황 상태인 영원한 푸른 하늘을 보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편하게 바란디가의 항복을 받은 것도 영원한 푸른 하늘 덕분이지 않나. 먹고 튀는 건 도리가 아니지.
‘저기. 혹시─’
– 왜? 왜?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조심스레 말을 걸자 영원한 푸른 하늘은 절박한 듯 반응했다.
그런 반응을 보니 차마 내가 생각하는 걸 이어 말할 수 없었으나, 용기를 내고 말했다. 적어도 원인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해결법을 생각하든 말든 할 테니.
‘혹시 신물인 걸 모르는 거 아닙니까?’
– 응?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한 목소리에 머쓱해졌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제 역할을 못하는 제사장이 신물을 알아볼 수는 있습니까? 그거 검집에서 빼기 전까지는 신도 모르고 있던 물건이지 않습니까.’
만약 신실한 사람이라면 신물이라는 걸 간파할 수도, 하다못해 세심하게 관찰하기라도 했을 거다.
그러나 제사장은 탁자에 내려놓은 신물을 그냥 눈으로 보기만 했다. 생각해 보니 만지지도 않았었지.그때는 나름 제사장이라 육안으로도 파악이 가능하구나─ 싶었는데 그냥대충 넘어간 거였다.어차피 봐도 모르니까 눈으로만 본 거였어.
아무튼 그 충격적인 가능성에 영원한 푸른 하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 …네가 제사장 할래? 성흔도 있고 신물도 있잖아. 네가 걔보다 신앙심 많을 것 같아.
겨우 내뱉은 말도 어딘가 상당히 고장 난 듯한 말이었고.
‘사양하겠습니다.’
그날, 신도 운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
이제 움직일 부족은 거의 움직인 것 같다. 이 이상 시간을 주는 건 과한 조치일 터.
“바란디가도 항복했다라.”
목을 뒤로 젖힌 채 중얼거렸다. 사도이자 대제사장인 그분과 무수히 많은 제사장들이 죽으며 유일하게 생존한 제사장.
유일한 제사장인 바란디가 족장은 자신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내세울 뿐, 대외적 활동을 극히 자제했기에 성향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과연 제사장으로서 제국과 맞설지, 아니면 안전을 추구할지 의문이었지.
이제 그 의문도 해소됐다. 하늘 신의 제사장은 제국의 천명에 머리 숙였다. 아직 가슴 속에 신앙을 품은 자들도 제사장을 따라 갈 확률이 높다.
‘구분은 끝났다.’
뒤죽박죽 얽혀있던 실타래를 겨우 풀었다. 각기 다른 실을 마침내 분리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서로 다른 실을 엮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나, 제작에 실패한 재료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걸 건져야 하는 쓰레기.
“칸이시여.”
“아, 나가도록 하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리가 끝났으니 행동에 돌입해야 할 때.
막사 밖으로 나가자 나를 불렀던 케식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뒤로 말에 올라탄 전사들이 주둔지를 덮고 있었다.
“전부 모였나?”
그 말에 선두에 있던 전사들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차우지드 부족의 솔르고 우레마가 일천 삼백의 전사와 함께 칸의 부름을 받드나이다!”
“키울라야 부족의 가단 타부다이가 팔백의 전사와 함께 칸의 부름을 받드나이다!”
“소굴 부족의 헤트자 뭉케가 칠백의 전사와 함께 칸의 부름을 받드나이다!”
“토오리르 부족의 만다바 테바카가 일천의 전사와 함께 칸의 부름을 받드나이다!”
그 뒤로도 열에 가까운 족장들이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제국과의 전투를 위해, 이날만을 위해 3년의 시간을 버틴 자들이 하늘 아래 소리쳤다.
“하칼란 다샨이 오천의 케식과 함께 칸의 명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마지막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1만이 넘는 군세. 과거 그분 휘하에서 초원을 달리던 시절은커녕 내가 억지로 모은 숫자와 비교해도 초라한 수치지만, 이 군세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뭉친 자들이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허리춤에 맨 검을 빼들었다. 나를 믿고 모인 전사들을 향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을 하늘을 향해.
“나, 가아르 우데스르 도르곤이 그대들의 앞에 설 것이다. 우리의 숨이 멈추고, 신께서 생명을 거두시기 전까지 그대들의 앞에서 달릴 것이다.”
그래, 긴 말은 필요 없다.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떠들기에는 멋이 없다.이미 모든 걸 각오하고 모인 자들 앞에서 길게 떠드는 것은 그 각오를 모욕하는 일이다.
“가자. 남쪽 농노 놈들에게 북방의 포효를 보여주기 위해.”
전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주술사들은 지팡이를 대신하여 올렸다.
“””도르곤! 도르곤! 도르곤!”””
우렁찬 외침이 주둔지에 울려퍼졌다.
하여간 이 새끼들, 마지막까지 칸이라는 이름이 입에 안 붙은 모양이다.
‘머저리들.’
사실 나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