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4)
로판 속 공무원 364화(365/451)
내 요청에 전승공은 고심에 빠진 것 같았다.
만약 지난 전쟁 때라면 나와의 친분이나 걱정을 뒤로하고 요청을 수락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청하기 전에 명령을 내렸겠지. 전승공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업무에 반영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투입되면 칸을 잡을 가능성이 오른다는 건 인지하고 있을 터.
그럼에도 전승공이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로는 내가 전투원이 아닌 감찰관이라는 명분으로 종군 중이며, 둘째로는 나와 얽힌 거물들이 많기 때문.
‘얽힌 공작만 셋이기는 하지.’
황제가 나를 ‘유사시 전투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감찰관으로 임명한 건 눈치가 조금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감찰관은 전투에 참가할 의무가 없는 존재다.
그런 감찰관이 무려 칸이라는 강적과 맞서겠다고 하는데, 그걸 전승공이 수락한다? 황제를 탓할 수 없는 마종공이나 철혈공, 현명공이 전승공에게 유감을 표한다면 전승공의 입장이 실로 난처해진다. 아무리 전승공이라도 공작 셋의 집단 구타는 가혹한 일이다.
“감찰관의 마음은 잘 알겠다. 그러나 감찰관이 직접 전투에 나설 필요는 없다. 제국의 장병들을 믿도록.”
결국 전승공은 원론적인 대답을 돌려줬다.
허나 이 타이밍에 원론적인 대답이 나온다는 건 확고한 거절이 아닌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 자신은 감찰관의 참전을 꺼렸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당사자의 의지가 강하여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는 명분을 위한 대화.
“장병들의 용맹함 잘 알고 있으나, 도르곤은 몸을 빼는 것에도 능한 자입니다. 지금 놓치면 제국의 피해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명분 쌓기에 동참했다. 내가 전선에 서게 된다면 전승공은 크든 작든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부담을 최대한 작게 만드는 것이 도리.
“또한 국가의 일에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건 부끄럽지만, 도르곤은 저에 대한 원한이 깊을 겁니다. 제 부친께서 놈에게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전승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라면 국가의 일에 사적 이유를 들먹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예외다.
전승공에게 유감을 표할 마종공, 철혈공, 현명공 모두 나와 혈연으로 얽힌 입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감찰관이 아버지 구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냐.’ 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그 셋도 할 말이 없다. 자신들이 혈연을 위해 전승공에게 항의하듯, 나 역시 혈연을 위해 움직인 것이니.
“묵광대와 함께 이동한다면 감찰관의 참전을 허락한다.”
명분이 완성되자마자 전승공은 빠르게 수락했다. 묵광대와 함께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애초에 묵광대는 내 호위이자 당장 전선에 투입돼도 활약할 수 있는 전력. 기꺼운 조건이다.
“감사합니다, 각하.”
전승공에게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막사를 나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터지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
허리를 숙였던 게오르크가 한 움큼 정도의 피를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개 같은.”
여러 감정이 담긴 듯한 짤막한 말에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게오르크와 별다를 것 없는 심정이었으니.
하늘을 메우는 것 같은 화살비와 함께 등장한 유목민들은 몇 번이나 더 화살을 날리더니, 귀가 찢어지는 듯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허술하다지만 나름의 방어선에 몸을 숨긴 병력을 상대로 원거리에서 피해를 주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1만이 넘는 유목민이 달려들자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울부짖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나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인데 일반 장병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앞장서 장병들을 격려했다. 다가오는 재앙을 상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역시 튼튼하군.”
허나 눈앞의 재앙은 둘로 상대하기 벅찬 재앙이었다.
“딱히 봐줄 생각도 없었는데 버티다니, 예전보다 강해진 것 같아.”
감탄이 섞인 중얼거림에 게오르크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적에게 평가를 받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니다. 저놈이 우리보다 강한 건 인정하고 있다.
“흠, 아니면 임시로 쓰는 거라 손에 익지 않은 건가?”
그저 누가 봐도 봐주는 듯한 행동을 하면서 지껄이는 것에 분노한 것일 뿐.
턱을 쓰다듬는 도르곤은 어디서 주워온 건지 기다란 봉으로 우리를 상대했다. 차라리 활이나 창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지난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무기로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기를 상대로 밀리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방금도 봉에 배를 정통으로 찍혔던 게오르크는 숨을 헐떡이더니 간신히 고개를 들었지 않나.
‘쉽지 않군.’
각오한 일이지만 막상 겪으니 착잡하기 그지없다. 둘이 붙어서 발목을 붙잡는 게 겨우라니, 심각한 격차가 아닌가.
그래도 도르곤이 우리에게만 관심을 보인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우리가 도르곤을 붙잡는 사이 아군은 기사와 마법사를 내세워 어떻게든 유목민들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만약 저 난전 속에 도르곤이 난입한다면 전선은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아, 이제야 생각나는군.”
그 와중에 턱을 매만지던 도르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빌헬름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게오르크 히덴 오브 호르펠트.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다른 건 다 기억이 나는데 이름만 가물가물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 말에 게오르크가 더욱 환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혼신을 다해 상대했던 적이 정작 자신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기에 충분하다.
“오해하지는 마라. 이름만 기억이 나지 않았던 거지, 네놈들이 강적인 건 알고 있으니까.”
“그런 놈이 그딴 막대기나 휘적거려?”
“서운하군. 이것도 나름 창이다. 날이 없을 뿐이지.”
이죽거리는 말투에 입을 다물고 있던 나조차 욕을 내뱉을 뻔했다. 사소한 말이지만 기묘하게 속을 긁어내다니, 부친이 죽어서 그런가 인성이 개판이다.
도르곤을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며 검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애석하게도 인성과 무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아무리 인성이 바닥을 기어도 강한 놈이 있고, 오히려 그런 자가 전투에서 살아남는 법.
‘오래는 못 버틴다.’
고삐를 쥔 왼쪽 손, 정확히는 어깨를 흘깃 쳐다봤다. 더욱 애석하게도 심상치 않은 통증이 아까부터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다. 화살이 박힌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봉이 꽂혔다. 회복을 했더라도 연달아 같은 곳이 수난을 당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나마 검이 아닌 고삐를 쥐고 있어서 버틸 수 있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터.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물러난다.’
다행히 전장에 울려 퍼지던 비명소리는 초반에만 끔찍했을 뿐, 지금은 다소 사그라든 상태다.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 중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유목민들이 장기적 공세는 자제하고 있다는 뜻.
그렇다면 이번 전투는 탐색전의 의미가 강하니 적당히 싸우다 물러날 것이다. 그리고 유목민들이 수장만 두고 퇴각하는 기행을 벌이지 않는 이상, 눈앞의 재앙도 곧 물러날 것이다.
이기는 건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조금만, 놈들이 물러날 때까지만 버티─
“슬슬 정리해야겠어.”
그 말이 들리자마자 시야가 기울어졌다.
“빌헬름!”
경악에 찬 게오르크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지만, 아무렴 나보다 놀랐을까 싶다.
‘…괴물 같은 놈.’
입안에 핏물이 고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계속 말에만 타있던 놈이 어느새 몸만 뛰쳐나와서 봉을 내질렀다. 말의 목을 관통한 봉은 내 가슴까지 도달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마 발걸이를 디딤돌 삼아 그대로 도약한 건가? 아니면 평범하게 하마했다가 돌진한 것인가?어느 쪽이든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행동인데 눈에 담지 못했다. 그 긴 과정을 단 한순간도 보지 못했다.
격차가 이렇게 크면 실소가 나올 정도다. 3년 사이에 이 괴물은 더욱 강해졌구나.
‘빌어먹을.’
점점 지면이 가까워진다. 목이 꿰뚫린 말이 쓰러지며 나도 휘청거렸고, 중심을 잡기에는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슴이 관통된 건 아니지만 방금 공격으로 내부가 진탕이 된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머리를 보호했다. 이 상태로 낙마하면 중상을 입겠지만 즉사는 피할 수 있다. 숨만 붙어 있다면 문제가 없다.
물론 부질없는 행동이다. 즉사를 피해봤자 바닥에 꿈틀거리는 적을 살려둘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그 증거로 말을 관통한 봉을 빼낸 도르곤이 다시금 봉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눈에 보이는군.’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죽을 때가 돼서 안력이 상승한 건지, 아니면 죽어가는 놈이라 느긋하게 움직이는 건지.
이왕이면 전자였으면 좋겠다. 무인으로서 죽음은 언제나 각오한 일이나, 그 마지막이 적의 자비와 방심으로 얼룩져있다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이런 놈과 몇 번이고 싸운 건가.’
문득 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비라는 놈은 이 괴물을 상대로 순식간에 쓰러졌거늘, 칼은 몇 번이나 대등한 전투를 펼쳤다. 무능한 아비와 달리 실로 뛰어난 아들이다.
…그 아들이 종군하지 않았다면 더욱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이 지경까지 이르고 나서야 더 강하게 말릴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허나 이 역시 부질없는 후회겠지. 그때의 칼에게는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았을 테니까.
‘힘든 아이에게 짐을 더 얹는구나.’
그렇기에 서글픈 일이다. 북방에 미련이 있어 종군한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마음의 짐이 될 상황이다.
아니, 이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 아비였다고 내 죽음이 짐이 되고 말고 하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
“오.”
갑자기 입꼬리를 올린 도르곤은 짧은 감탄을 내뱉더니 나를 지나쳐갔다.
“왔느냐, 크라시우스 칼!”
…?
‘누구?’
난데없는 이름에 상념이 끊기고 말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주마등이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혹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오랜만이다, 애비 잃은 새끼야!”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칼의 목소리였다.
“혼자 살기 쓸쓸하면 뒤져서 가족이나 보러 갈 것이지, 고아를 늘리려고 하면 어쩌자는 거냐!”
내용이 뭔가 이상했지만 칼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