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5)
로판 속 공무원 365화(366/451)
묵광대를 대동한 채 급히 사레이 전선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묵광대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라지만 부대는 부대. 나와 함께 활동하면 전선에 유의미한 변동을 줄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몸을 빼려는 도르곤을 추격해 사살할 수도 있고.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떨어지는 가주가 눈에 들어와 계획을 수정했다. 이미 가주가 전투 불가 상태면 추격이 아닌 성공적인 격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늦지는 않았다.’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지는 가주를 보고 가슴이 철렁하기는 했지만, 아직 의식이 있는지 머리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까.
최고의 타이밍에 도착한 것은 아니나 최악은 피했다. 아무리 중상이라도 살아만 있다면 회복할 수 있다.
“가주님과 히덴 원수를 모시고 물러나.”
“예.”
묵광대에게 지시하자 4과장이 짧은 대답과 함께 가주와 전 호르펠트 백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내가 부친인 가주의 안위에 신경 쓰는 것처럼 4과장 입장에서 가주는 시아버지. 최선을 다해 지킬 것이라 믿는다.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가주 근처에 얼쩡거리는 도르곤이지만─
“오.”
나를 발견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방향을 틀었다.
“왔느냐, 크라시우스 칼!”
이상한 나무 작대기를 들며 달려드는 도르곤을 향해 검을 빼들었다. 멀쩡한 검을 두고 왜 자연을 무기로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제약을 걸고 싸우겠다면 사양할 필요는 없다.
그 와중에나를 도발하겠답시고 가주에게 확인 사살을 날리지 않은 건 조금 고맙다. 도르곤이 작정했다면 눈앞에서 가주가 변을 당했을 테니.
“오랜만이다, 애비 잃은 새끼야!”
물론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싸움은 싸움이다. 도르곤과 멱살 잡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조금이라도 정신을 뒤흔들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도르곤 입장에서 살아있는 어그로, 그 자체다. 살짝만 입을 털어도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이 많다.
“혼자 살기 쓸쓸하면 뒤져서 가족이나 보러 갈 것이지, 고아를 늘리려고 하면 어쩌자는 거냐!”
그 말에 도르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패드립을 당하고도 웃는 새끼는 처음 본다.
“네 어미가 들으면 슬퍼하겠구나! 넌 아비가 죽어도 어미가 남으니 고아는 아니지 않느냐!”
‘아니 시발.’
순간 머리가 굳어버렸다. 반격기 미쳤네.
하지만 굳은 머리와 달리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도르곤이 나무 막대를 휘둘렀고, 그를 막기 위해 나 역시 검을 휘둘렀다.
“쯧.”
그리고 반으로 베인 나무 막대를 빠르게 내던진 도르곤은 몇 걸음 물러났다.
당연한 결과다. 나나 도르곤이나 서로 전력을 다해 부딪혀도 상대를 압도할 자신이 없는 수준인데, 검도 아닌 막대 따위로 싸우는 건 양심도 없고 지능도 없는 행동이지.
“제법 마음에 든 물건이었는데 아쉽게 됐어.”
애석하게도 아직 도르곤은 양심도 지능도 가지고 있는 모양인지, 별다른 미련 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이 새끼. 애초에 안 될 걸 알면서 왜 막대를 들고 설친 거야.
“제대로 가지고 있었군. 막대 들고 설치길래 노숙하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한 줄 알았지.”
“허, 그러는 네놈 검은 왜 그 모양이지? 제국은 녹으로 검을 장식하는 게 유행인가?”
아무튼 자세를 잡는 도르곤에게 추가 도발을 날리자 도르곤은 픽 웃음을 흘리며 맞받아쳤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딱 내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네 애비 피를 먹어서 그런가 빨개졌다.”
아까보다 더욱 화려한 패드립에 도르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래, 아까는 고아인 너를 욕 한 거지만 이번에는 나한테 죽은 카간을 대상으로 삼은 욕이다. 당연히 눈이 돌아가겠지. 만약 이번에도 웃어 넘겼다면 이 새끼는 역사에 남을 패륜아다.
“축하한다. 애비는 죽었지만 애비의 피는 이 검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검이 애비나 다름없겠지. 오랜만에 가족이 상봉했어.”
그렇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털었다. 나이 먹고 이런 원색적인 도발을 하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내 체면을 대가로 도르곤의 멘탈이 흔들리면 남는 장사다.
“아, 생각해 보니 네 애비를 다루는 나는 네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구정물에 담근 것 같은 주둥아리는 여전하군.”
반응이 없던 도르곤도 2대를 동시에 엿 먹이는 건 참을 수 없었는지 다소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금방 표정을 정리하는 걸 보면 저 새끼도 확실히 정상인은 아니다. 어지간한 사람들이면 2대까지 갈 것도 없고 가족 상봉에서 눈이 뒤집혔을 테니까.
“이거 참, 너무 불리한 싸움이야. 누구는 부모가 죽었는데 누구는 친구만 몇 명 죽고 끝났으니.”
다시 미소를 머금은 도르곤의 반격기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혀를 화려하게 놀린다고 상대의 언변에 면역인 것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말로 시간을 끄는 동안 묵광대가 가주와 전 호르펠트 백작을 확보했다는 것. 도르곤의 뒤편에서 손을 휘저으며 신호를 보내는 4과장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아직 전투 중이기는 하지만 도르곤을 제외하면 묵광대를 뚫을 수 있는 놈은 없을 테니 안전하다.
그리고 가주가 안전해졌으니 망설일 것은 없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곧 부모를 볼 수 있을 테니 서운해하지는 말고.”
이대로 이놈과 붙는다. 예정과 달리 가주도, 전 호르펠트 백작도, 묵광대도 없는 일대일 대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놈과의 악연을 끝낼 수 있으니 기꺼운 수준이다.
“글쎄, 나는 조부님도 보게 돼서 당장 뵙고 싶지는 않군. 네놈이야말로 친구가 그립지 않나? 그것들을 제외하면 친구도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도르곤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살며시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면서 몸을 조금 낮추는 것이 그대로 돌진하며 정면에서 부딪힐 모양.
아까는 막대 따위로 달려들었으니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전력의 도르곤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시작부터 팔이 부러질 수 있다. 대신 부상을 각오하고 반격하면 마찬가지로 도르곤의 팔을─
– 뿌우우우우우우─!!
갑자기 전장의 소음을 억누르는 뿔나팔 소리에 상념이 끊겼다.
“이런.”
그 소리에 도르곤이 혀를 차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군. 쓸데없이 입만 놀리다 끝났어.”
“뭐?”
누가 들어도 물러나겠다는 듯한 발언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새끼가 런르곤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몸을 빼는 것에 도가 튼 새끼기는 하지만, 나와 만나놓고 검 한 번 섞지 않은 채 튈 줄은 몰랐다.
“네놈이 애매할 때 왔어. 차라리 늦게 왔다면 얼굴을 보지 못했을 테니 미련 없이 돌아갔을 테고, 일찍 왔다면 조금이라도 붙었을 텐데.”
아쉬움 가득한 도르곤의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닌 진심 같았다.
이 개 같은 새끼가. 누가 늑대 섬기는 새끼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개과 짐승처럼 행동하네.
“내가 그냥 보내줄 것 같나?”
“당연히 내가 아는 크라시우스 칼이라면 끈질기게 따라 붙겠지.”
뭘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도르곤을 보니 이가 갈리는 것 같았다. 저 새끼 얼굴에 주먹 한 번만 제대로 꽂고 싶다.
“하지만 무인 크라시우스 칼이 아닌, 아들 크라시우스 칼이라면 포기할 것 같군.”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가주는 지금 묵광대의 보호를 받고 있다. 가주 본인도 강한 무인이니 부상을 입은 상태로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도르곤을 붙잡으면 슬슬 퇴각하려는 유목민들도 전투를 지속할 테고, 가주의 치료도 그만큼 늦어진다. 물론이 사레이 전선에 있는 마법사나 사제가 한둘이 아니기는 하나 난전 속에서 공격을 포기하고 치료에 몰두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도르곤과의 전투.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치료를 받지 못할─ 그렇다고 전선에서 물러나기에는 병사들의 사기에 지장이 갈 가주.
…
“꺼져.”
“훌륭한 판단이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도르곤은 자신에게 다가온 말에 올라탔다.
망할, 그냥 말을 죽여서 낙마 대미지라도 줄까? 아니야, 부상도 아닌 만전인 상태에서 낙마해 봤자 아무렇지도 않게 두 발로 서겠지. 괜히 자극하면 미친 척 가주와 묵광대에게 달려들 수 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오늘은 날이 아니었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붙어보자고.”
물러나는 도르곤을 노려보다가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뿔나팔 소리 이후 퇴각하기 시작하는 유목민들.
‘이 새끼들은 적이군.’
단순히 칸의 이름 아래 뭉친 것이 아닌, 칸과 함께 싸우는 확고한 주전파 부족. 이 자리에 있는 부족들은 제국과 싸우다 죽는 것을 각오한 반제국 진영이라 보는 것이 옳다.
반대로 칸이 직접 지휘하는 전투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제국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은 진영일 터. 더 이상 중립이라고도 할 수 없다.
‘피아식별은 끝났다.’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을 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 같은 결말이지만 피아식별이 끝났다는 점에서는 나름 성과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 성과도 없는 전투라고 하면 속이 터질 것 같으니.
유목민이 물러나자 마법사와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마 가주와 전 호르펠트 백작이 칸을 상대한 걸 본 모양이다. 충성심이 높기도 하지.
“부상자가 많을 터인데 고작 둘을 치료하자고 이 많은 인원이 모인 건가? 당장 돌아가라.”
정작 당사자들은 뭐 이리 많이 왔냐며 둘만 남기고 돌려보냈지만.
“가주님.”
“칼.”
마침 상의를 벗어 마법사에게 상처를 보인 가주에게 다가가자 가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인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전쟁 중인 상태에서 ‘죽지 않아 다행.’ 이라고 말하기는 찝찝하다. 심지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에게 하기에는 더더욱.
“네 덕분이다. 아마 네가 오지 않았다면 놈은 나를 죽였을 거다.”
그 말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도 그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해졌으니까. 내가 사레이 전선에 오는 걸 포기했거나,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터졌을 거다.
잠깐 뒷목을 주물거리다가 전 호르펠트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민망하기도 했고, 부상을 입은 건 가주만이 아니기도 하고.
“히덴 원수께서도 무사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혹시 죽었으면 제노비아가 내 무덤도 만들지 않았을 거야.”
농담 섞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이 사람 나름의 감사 표현이겠지.
“그건 그렇고, 꽤나 입담이 화려하더구나.”
“아.”
순간 몸이 굳고 말았다.
“그래, 적의 정신을 흔드는 것도 전술의 일종이지! 아주 훌륭해!”
웃음을 터뜨리다가 기껏 붙인 상처도 같이 터진 전 호르펠트 백작은 무시하고 조심스레 가주에게 시선을 돌렸다.아무리 정신 공격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부친 앞에서 패드립을 날린 아들이 된 상황 아닌가.
“너에게도 고맙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
“과,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애써 내 시선을 피하며 4과장에게 감사를 표하는 가주를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가주도 여러 의미로 혼란스러운 것 같다.
‘망할.’
이게 다 도르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