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6)
로판 속 공무원 366화(367/451)
바람처럼 나타난 도르곤은 갈 때도 예술로 갔다. 그 예술이 지옥에서나 통할 것 같은 심연의 예술이라는 것이 문제지만,1만이 넘는 유목민의 습격은 사레이 전선을 지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유목민이 전선에서 활동한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농축된 깽판을 치고 가서 그런지 결과는 지랄맞기 짝이 없었다. 장병들을 짓밟는 말도, 그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쏜 유목민도 만전인 상태에서 전투에 임했으니 얼마나 끔찍했겠나.
“전선을 뒤로 물린다.”
오죽하면 가주가 그런 결단을 내릴 정도였다.허나 이는 단순히 아군의 피해가 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다른 전선에서 보충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닌, 이 빌어먹을 지형이다.
솔직히 북방 대부분이 방어와 거리가 먼 지형이기는 하지만, 사레이 부족의 영역은 특히 심했다. 사레이 부족은 다른 부족의 공격을 걱정해야 하는 부족이 아닌 역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부족이었으니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아닌 확장하기 편한 지형을 영역으로 삼았지.
“앞으로 이전과 같은 소규모 전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도르곤이 선두에 선 공세가 지속될 터.”
그 말에 다른 참모들도 수긍했다. 수백, 수천 규모의 유목민을 상대로는 제국이 조금씩 조금씩 전선을 넓힐 수 있었으나, 칸이 1만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출현했으니 수세로 전환해야 한다. 괜히 이전처럼 땅따먹기를 하다가 군단 단위로 전멸하면 황제를 볼 낯이 없다.
원정을 온 입장에서 수비를 하는 건 조금 오묘하나 어차피 우리는 요새와 성이 아닌 움직이는 군세와 싸우는 것이다. 점령지가 적어도, 전선을 뒤로 물려도 도르곤과 그 휘하 군세를 토벌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승리.
“마침 남쪽에 강이 있으니 그곳을 전선으로 삼는다.”
기껏 도하한 강을 다시 벽으로 삼는 건 씁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차라리 강을 두 번 넘고 말지, 평지에서 도르곤에게 두 번이나 처맞는 건 씁쓸로 끝날 일이 아니니.
“감찰관.”
“예, 원수 각하.”
갑작스러운 가주의 부름에 황급히 대답했다.
“감찰관 덕분에 본작과 수많은 장병들이 역도의 칼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선의 지휘관으로서 다시 감사를 표한다.”
다른 참모들도 보는 상황이라 철저히 공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가주. 하지만 딱딱한 말과 달리 목소리는 미묘하게 부드러웠다.
“과찬이십니다.”
그렇기에 나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전투는 이룬 것 없는 전투지만 그래도 가주의 목숨은 지킬 수 있었으니, 마음 편히 사령부로 복귀할 수 있겠다.
사레이 전선에서 발생한 전투로 인해 제국은 전선을 뒤로 물린 데다 전쟁 목표인 칸의 목마저 놓쳤다. 결과만 보면 제국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전투.
그러나 그 이후의 흐름을 보면 제국에게 이득이 된 전투였다.
“마지막까지 중립을 유지하던 부족들이 일제히 투항했습니다.”
참모의 보고에 전승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곤이 직접 나선 공세. 이는 반제국 진영이 뭉쳐서 제국군의 명치를 찌른 사태였으나, 반대로 보면 도르곤이 ‘내 세력은 얘네가 전부다.’ 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칸이 직접 대규모 공세를 펼치는 상황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부족? 더는 중립이라는 말도 쓸 수 없다. 명백히 칸인 도르곤과 뜻을 달리하는 부족이며─ 전쟁 중인 상황에서 칸과 뜻을 달리한다는 건 제국과 함께한다는 의미다.
‘죽기 싫으면 우리한테 붙어야지.’
그날 이후로 중립이라는 이름을 달고 갈등하던 부족들은 일제히 중립 딱지를 던지고 대대적인 탈주를 개시했다. 제국에게는 간을 본 것 말고는 밉보인 게 없지만, 칸에게는 감히 칸의 친정에 함께 하지 않았다는 노여움을 샀을 테니 당연한 행동이다.
당연한 행동이기는 한데…
‘징한 것들.’
당연함과 별개로 복잡미묘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이 중립 부족들의 대탈주 이전에도 카이타나 부족의 앞잡이질이나 바란디가 부족의 합류 등, 유목민이 제국에 투항할 명분은 많았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갈등하다 이제서야 투항했다. 유목민으로서 제국에 고개 숙일 수 없었던 건지 단순한 선택 장애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일이네.’
물론 안타까운 건 제국이 아닌 마지막에 투항한 부족들이다. 늦게 투항한 자가 겪는 딜레마는 흔히 말하는 ‘덜 아쉬운 상황’에 합류했다는 것 아닌가.
카이타나처럼 전쟁 초기부터 대가리를 박은 것도 아니고, 바란디가처럼 상징성이 높은 것도 아니니 딱히 중히 여길 필요도 없다. 애초에 저것들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항복했다는 건 제국도 잘 아는 사실이니까. 너네들이 우리한테 항복 안 하면 어디로 갈 건데.
너무 늦은 합류로 인한 입지 부족. 후발 주자에게 있어 실로 끔찍한 현실이다.
“악적과 싸우는 것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자신들은 초원에서의 활동이 익숙하니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후발 주자들은 적극적 구애 활동에 나섰다.
지금까지 투항 부족들은 직접적인 전투에 합류하지 않았다. 안전 보장을 위해 부족들을 향해 ‘느그들도 싸워라.’ 라고 하면 술렁일 것이 눈에 뻔하기도 하고, 우리도 이전까지는 적이었던 것들에게 등을 맡기기에는 불안하기도 하고. 그냥 적의 규모가 줄어든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허나 어떻게든 가치를 증명해야 할 후발 주자들에게는 그런 거 없다.
“실로 용맹한 결의로군. 내 직접 그들과 만날 터이니 자리를 마련하도록.”
“예, 각하.”
전승공도 그걸 알기에 마지막으로 항복한 부족장들을 소집했다.
도르곤이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는 판국이니 그에 대항할 수 있는 기병 전력 확보는 중요하고, 이 요청을 거절하면 후발 주자들이 다른 의미로 불안해할 것이다.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승진 누락이 된 상황에서 대기 발령을 받는 기분이 아닐까.
‘잘 싸우는 놈한테 작위 주면 되겠다.’
아무리 늦게 대가리를 박아도 공을 세우면 대접해 준다는 선례가 생기면 제국에게도 좋겠지.
***
이곳에 얼마 만에 오는 건지 모르겠다. 종전 이후로 처음이니 거의 3년 만인가?
3년 사이에 올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근처에도 접근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곳이 특별한 곳이라는 건 제국도 알 터. 괜히 어슬렁거렸다가 들키면 피곤한 일이지 않나.
“그래서 이제서야 인사를 드립니다.”
무심코 듣는 이 없는 인사를 중얼거렸다.다샨이 근처에 있기는 했지만 내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눈과 귀가 먼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빼야겠지.
하여간 충성심이 과한 녀석이다.
‘나도 저랬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분께서 보는 나도 다샨과 다를 것이 없었을까─ 하고. 그분이 어디를 간다고 하면 혼자는 위험하니 반드시 동행하겠다고 했었지. 이 북방은 물론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그분을 위험하게 할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제에 정말 그분이 위험할 때는 도와드리지 못했다. 그분의 곁에 누군가 있어야 할 때 함께하지 못했다.
‘한심한 일이지.’
덕분에 하루에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신하가, 망국의 후계자가 홀로 살아서 무엇하겠나.
그럼에도 구차한 삶을 이어가는 건 이런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어서다.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이제 와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3년이나 흘렀지만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보이는 곳, 북방의 총의가 꺾인 곳.
그리고 그분이 숨을 거두신 곳.
“놈을 만났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땅을 어루만졌다. 의미 없는 행동인 건 안다. 허나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서계셨던 곳이 이곳이라 생각하니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탈라도, 자이루그도, 일라이도 죽이지 못한 놈이 다시 북방에 찾아왔습니다.”
막상 말하고 보니 웃음이 나왔다. 선봉장이었던 탈라, 그분께서 그 능력을 알아본 자이루그, 북방 제일의 대주술사인 일라이까지 그놈이 직접 죽이거나 죽음에 일조했다. 괴물이 따로 없는 새끼다.
정작 나도 그런 괴물을 몇 번이나 상대했으면서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놈이 보기에는 나도 괴물이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그놈이 북방에 왔다는 걸 알았을 때, 분노나 막막함보다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아마 놈이 오지 않았다면 분노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긴 악연이었습니다. 2년을 싸우고,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그동안 이어졌던 악연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습니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질긴 새끼, 대체 나와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어지간한 원한이 아닌 이상 5년이나 내 인생에 뿌리를 박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래도 원망은 하지 않는다. 나도 그놈의 인생에서 화려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을 테니. 그분과 다른 녀석들이 죽은 이상, 내가 그놈의 유일한 대적자이니.
슬쩍 품 속에 있는 주술서를 꺼냈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주술사 중 가장 뛰어난 자가 전력을 다해 만든 물건.
‘마지막은 마지막답게 장식해야지.’
그러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내 고집이고 투정일 수 있지만, 너도 좋아할 거라 믿는다.
“네 애비 피를 먹어서 그런가 빨개졌다.”
“축하한다. 애비는 죽었지만 애비의 피는 이 검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검이 애비나 다름없겠지. 오랜만에 가족이 상봉했어.”
“아, 생각해 보니 네 애비를 다루는 나는 네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흠.’
놈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다시 전의가 솟구쳤다.
2년 동안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로 3년이나 듣지 않았더니 그새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 애석한 일이다.
‘망할.’
다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과연 익숙해지는 게 먼저일지, 죽는 게 먼저일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