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7)
로판 속 공무원 367화(368/451)
도르곤의 출현으로 인해 사레이 전선이 뒤로 물러난 이후, 모든 전선에 비상이 터졌다.
“파소 전선과 타르케 전선이 공격당했습니다.”
참담한 보고였지만 전승공은 묵묵히 지도 위에 놓인 말을 움직였다. 애석하게도 수뇌부는 이 참담한 보고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사레이 전선이 강 너머로 물러난 것을 확인한 도르곤은 북방 전역을 제 앞마당처럼 여기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제국이 전선을 뒤로 물린 것 자체가 반격보다는 수비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도르곤이 일방적으로 전장을 정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적에게 전장을 강요할 수 있는 상황을 포기할 리가 없지.
그리고 도르곤은 사레이 전선처럼 자연 방어물이 있는 곳이 아닌, 방어에 불리한 전선을 전장으로 강요했다.
‘사레이는 운이 좋았다.’
슬픈 일이지만 모든 전선이 사레이 전선처럼 자연 방어물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방어선으로 쓸 수 있는 강이나 산이 있는 곳까지 전선을 빼면 그로 인한 혼란이 더 크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으며 버티고 있는 거고.
아니, 정확히는 눈물이 아닌 피를 흘리며 버틴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다.
‘빌어먹을.’
도르곤은 사레이 때처럼 전군을 동원하여 공세를 펼치거나, 군을 나누어 동시다발적인 습격을 감행했다. 이 정신없는 히트 앤 런 속에서도 제국이 전선을 유지하는 건 병사들이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덕분이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동시다발적인 습격은 있을 수 없다. 총병력이 1만 정도인 놈이 병력을 나눠봤자 각개격파밖에 더 되겠나.
하지만이미 사레이 전선에서 재미를 본 도르곤은 점령지 탈환이 아닌 짧은 분탕질을 목적으로 삼았다. 각개격파고 뭐고 도저히 반응할 속도도 주지 않은 채 튀어버리니 답이 없다.
‘수천 단위니 보이자마자 전멸시킬 수도 없고.’
만약 전선을 공격하는 것이 수백이나 천을 겨우 넘는 수준이면 빠르게 처리할 수 있기는 한데, 도르곤이 머저리도 아니고 그딴 기적의 병력 운용을 할 리가 있나.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다.
“또한 파소 전선에는 노탄 부족과 이킬란 부족, 타르케 전선에는 비로앙 부족이 주둔 중입니다.”
“고르밍 부족을 타르케 전선에 보내도록.”
“예, 각하.”
그래도 이 지옥 같은 소모전에서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제국의 기병 전력이 유의미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다른 부족들에 비하면 뒤늦게 제국에 합류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부족들. 그 부족들은 얼마 전 전승공과의 연회에서 군사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당연히 맹세를 사양하지 않은 전승공은부족들을 각 전선에 배치하였고, 이로 인해 제국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걔네보다 도르곤이 끌어모은 부족이 더 강해서 그 이상은 무리더라. 물론 피해를 줄이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만.
“각하.”
“무슨 일이지?”
아무튼 지시를 받은 참모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전승공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다른 참모가 입을 열었다.
“바란디가 후작이 회동을 요청했습니다.”
그 말에 전승공의 눈가가 잠시 움찔했다.
바란디가 후작, 북방에 유일하게 남은 제사장이자 후작위를 약속 받은 인물. 동시에 제국이 북방 정복을 완수하기 위해 절대 놓칠 수 없는 카드.
그 막강한 중요도로 인해 수뇌부도 바란디가 부족장을 후작으로 취급하며 굉장히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는 작위를 약속받은 다른 부족장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백작 내정자보다 후작 내정자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건 당연한 일.
이 배려를 아는지 바란디가 후작도 평소에는 어그로를 끌지 않고 잠잠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다른 부족장들과 함께 각하를 뵙고 싶다고 합니다. 폐하를 대신하여 악적을 징벌하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분께 제대로 된 인사도 드리지 못하여 송구하다고─”
그런데 그랬던 바란디가 후작이 먼저 만남을 청했다. 심지어 일대일도 아닌 단체 만남을.
‘뭐지?’
의외인 상황이다. 바란디가 후작이 후작위를 약속 받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바란디가의 상징성으로 인한 조치였다. 딱히 ‘후작위를 줄 테니 그만한 공을 세워라.’ 같은 거래를 한 게 아니니 전승공에게 접촉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바란디가 후작이 후작위를 내세워 권리를 주장할 성격도 아니다. 그렇게 야망 넘치는 사람이었으면 나랑 만나기 전에 무슨 행동을 취했겠지.
‘만날 이유가 있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바란디가 후작이 침묵을 깰만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만 떠올랐다. 아직 정식으로 작위도 받지 않은, 완전히 제국의 귀족이 된 것도 아닌 북방의 유력자들이 바란디가 후작을 중심으로 단체 행동을 시작했다.
물론 제국이 북방의 문화를 존중하기로 한 만큼 북방 유력자끼리 행동하는 건 용인할 수 있다. 귀족은 정치의 화신이기에 뜻이 맞는 동포끼리단체 행동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황제 앞에서 충성 맹세를 하기도 전에 정치적 활동이 활발하면 조금 곤란하다. 벌써부터 다른 생각을 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지 않나.
나 말고 황제가.그 양반 의심병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제국의 품에 안긴 자들이니, 자리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잠시 고민하던 전승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동을 수락했다.
전승공이 바란디가 후작의 목적을 눈치챈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어느 쪽이든 거절하기 난감한 상황이기는 하다. 괜히 회동을 거부했다가 작위 내정자들이 토사구팽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니까.
주둔지 한 쪽에 회동을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바란디가 후작뿐만 아니라 다른 백작 내정자들, 일반 부족장들도 참가한다고 하니 나름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오, 위리디아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카이타나 백작.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하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러 작위 내정자들과 부족장들을 만나봤다는 이유로 안내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이, 카이타나 백작이 먼저 모습을 보였다. 주둔지에서 제법 거리도 있을 텐데 가장 먼저 오다니. 역시 훌륭한 우리 앞잡이다.
“그건 그렇고 백작님이 직접 맞이해주시다니, 영광이로군요.”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니 격에 맞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거 참, 과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웃음을 터뜨린 카이타나 백작을 시작으로 다른 부족장들도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하나같이 내가 직접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더라. 아무래도 회동 분위기는 그럭저럭 괜찮게 흘러갈 듯싶다.
“백작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자리를 요청한 주인공이 나타났다.
“아, 바란디가 후작 각하.”
“각하라니요.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며 반기자 바란디가 후작이 손을 내저으며 난감함을 표했다.
무슨 심정인지 알겠지만 어쩌겠나. 일개 백작이 후작을 막 대하는 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심지어 황제의 명을 받고 직접 후작 인장을 건넨 당사자가 후작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아찔하기 짝이 없다.
“각하께서는 제국에서도 열셋뿐인 후작이십니다. 백작인 제가 각하를 편히 대하면 폐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요약하면 네가 적응하라는 말. 냉혹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진실이기에 바란디가 후작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제가 백작께 하대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건 개인의 성향 차이니 상관없습니다.”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하자 그제야 바란디가 후작도 안심한 듯 자연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물을 가지고 계신 분에게 하대하는 건 제사장으로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내 허리춤에 매인 검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
– 개새끼.
‘큽.’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에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후작 면전에서 웃는 놈이 될 뻔했다.
– 신물인 것도 모르면서 난감하기는 무슨… 제사장 같지도 않은 놈… 개새끼…
그러나 물기 어린 영원한 푸른 하늘의 중얼거림은 실시간으로 내 웃음벨을 자극했다.
미치겠다. 웃을 일이 아닌데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온다.
“저는 잠시 맡아두고 있는 것이지, 때가 되면 올바른 곳으로 돌아갈 물건입니다.”
겨우겨우 웃음을 참으며 적당한 대꾸를 한 나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 돌아가다니! 이거 네 거잖아! 그냥 네가 가지고 있어!
‘알았으니까 제 머릿속에서 소리치지 마십쇼…’
아무래도 신물 양도 문제는 도르곤부터 죽이고 다시 논의하든가 해야겠다.
모든 인원이 회동 장소에 모이자 전승공이 나타나 상석에 앉았다.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이제서야 서로 얼굴을 보게 되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하대였으나 참석자 모두 기꺼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국의 공작이 하대를 한다는 건, 이들을 단순한 협력자가 아닌 제국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니.
“저희가 먼저 각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온데, 각하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두려워 찾아뵙지 못한 저희의 잘못입니다.”
“본작을 위한 배려를 어찌 잘못이라 하겠는가.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
바란디가 후작이 대표하여 입을 열자 전승공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렇게 겉으로는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갔지만 전승공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도 바란디가 후작이 회동을 요청한 이유를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은 기쁜 날이다. 비록 하늘의 명을 거부하고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적이 있으나, 그에 맞선 용맹스러운 자들이 모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 말과 함께 전승공이 앞에 놓인 잔을 들자 다른 참석자들도 일제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을 잠시 미뤄두고, 다 같이 마시도록 하지.”
제대로 손님 대접을 할 테니 먹고 나면 너희도 용건을 말하라는 압박. 그 압박에도 불구하고 작위 내정자들은 물론 일반 부족장들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이상한 용건은 아닌 것 같다.
***
양고기를 우물거리며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우선 공작은 적대적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으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확실히 그동안 잠잠했던 자들이 일제히 만남을 청하면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터. 당연한 반응이다.
‘더 시간을 끌면 의심만 커지겠어.’
게다가 군 최고 책임자의 시간을 낭비하는 건 곤란한 일이다. 마침 분위기도 연회 덕분에 무르익었으니, 이제 움직이면 되겠지.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있는 카이타나 백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행동을 신호삼아 다른 족장들도 연회를 즐기던 걸 멈췄다.
“바란디가 후작. 무슨 일인가?”
나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공작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허나 그 목소리에 묘한 싸늘함이 섞여있다는 건 어린애라도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재빠르게 땅에 엎드리며 외쳤다.
“각하! 지금은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받은 후작이 아닌, 이 초원의 제사장으로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짧은 대답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하늘의 뜻을 부정하는 악적이 초원의 평화와 질서를 뒤흔드나, 힘이 없는 저희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하늘의 명을 받들어 대륙 위에 군림하는 황제 폐하께서 황량한 초원도 보듬고자 하시니 어찌 그 드넓은 자비와 관용에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족장들이 엎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바란디가 구르트 바탈, 하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엎드려 청하나이다!”
그 말을 끝으로 침을 삼키고 말았다. 뒤이어 할 말은 제국과 유목민의 관계가 영원한 상하관계가 될 말이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 망설일 수는 없다. 이미 각오한 일이다.
“폐하께 청하노니 부디 미천한 변방 양치기들의 칸이 되어주소서!”
“””미천한 변방 양치기들이 폐하께 청하나이다! 칸이 되어주소서!”””
이것이 살고자 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북방의 의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