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68)
로판 속 공무원 368화(369/451)
갑작스러운 퍼포먼스 끝에 찾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황제에게 칸의 자리를 바친다는 선언은 사전에 조율이 된 것이 아닌 족장들의 돌발 행동. 이런 대형 사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어지간한 정치 괴물도 힘든 일일 거다.
게다가 옆에서 구경하는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면에서 직관한 전승공은 오죽하겠나. 그나마 족장들이 황제에게 청한다는 걸 꼬박꼬박 언급해서 망정이지, 주어를 명확히 하지 않았으면 전승공에게 칸이 되는 걸 종용하는 것으로 보였을 거다. 당장 제도로 회군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됐겠지.
‘칸이라.’
아무튼 이 돌발 상황 속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유목민들이 황제에게 칸이 되어달라고 청한 것은 황제의 겸임 작위가 늘어나는 것. 당장 황제가 가지고 있는 왕작만 해도 여러 개인데, 거기에 칸 하나 추가된다고 티가 날까?
‘…난다.’
애석하게도 존나 난다. 제국은 카간은커녕 칸이라는 작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칸이라는 딱지를 황제가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대륙의 질서가 달라진다.
칸을 인정하지 않아도 제국의 북방 점령에는 지장이 없다. 북방에서 양을 치며 노는 유력자들은 이미 작위를 받은 상태이니 그들은 황제의 신하이자 제국의 일원이다. 누가 봐도 북방이 제국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이라는 작위를 인정하고 황제가 겸임을 한다면, 북방은 단순히 제국이 정복한 미개척지가 아닌 북방이라는 나라가 제국에 합류한 꼴이 된다. 말장난 같지만 이 미묘한 차이가 스노우볼이 되는 것이 정치다.
‘북방이 주인 없는 땅에서 주인 있는 영지가 된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만약 모종의 일로 황제가 가진 칸 작위가 외부로 튕겨져 나가거나─ 혹은 유목민들이 ‘우리손으로맨든 우리칸’을 외치며 칸 국산화를 시도하면 기껏 장악한 북방이 탈주하게 된다. 그것도 부족 단위로 흩어진 북방이 아닌 칸 아래 하나 된 북방으로.
물론 단점이 있다면 장점이 있듯, 칸이라는 작위를 받아들이면 북방 통제력은 굳건해진다. 단순히 유력자들을 귀족으로 삼는 수준이 아니라 북방의 추대를 받아 정당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니까.
‘어렵네.’
그래도 간단하게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제국이 굳건하면 무엇보다 튼튼한 북방 제어기이나, 훗날 제국이 흔들리면 칸이라는 작위가 치명적 비수로 날아올 수도 있으니.
“정당한 주인 없이 헤매던 자들이 폐하께 의지하는 것은 실로 지당한 일이다.”
마침 전승공도 계산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충정과 결의는 본작이 폐하께 아뢰겠다.”
황제에게 보고하겠다는 당연한 답변에 족장들도 별다른 이의를 보이지 않았다. 황제에게 바치는 영광을 신하가 임의로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황제의 답변이 돌아왔다.
오늘부터 크펠로펜 제국의 황제는티라프 왕, 그로텐, 라티아, 프루니안, 갈란의 왕이자 북방의 칸이다.
‘이제 칸 더비인가.’
외래산 칸과 국내산 칸의 대결.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
크펠로펜 제국의 에이만카 16세가 북방의 코르부스 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북방 전역에 퍼졌다. 그 과정에 제국이 개입한 것은 딱히 없었다.
그야 제국보다 절실한 것이 추대 선언을 한 족장들이니까. 황제의 답을 듣기 전까지 자리를 뜰 수 없다며 주둔지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던 족장들은, 황제가 수락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살아있는 확성기로 진화했다.
이 추대를 황제가 거절했다면 ‘아무리 부족의 안전을 위한다지만 너무 오버했던 거 아니냐?’ 라는 말이 부족 내에서 돌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부담을 이겨내고 칸 추대 공신이 되었으니 기쁘겠지. 앞잡이와 공신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늦어도 가을이 지나기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
그렇게 성립된 칸 더비에 전승공은 스스로 커트라인을 지정했다. 아직 가을이 지나려면 몇 개월 정도가 남았으나, 지난 전쟁이 2년이나 걸린 것을 생각하면 패기 넘치는 발언.
허나 누구도 전승공의 발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칸 추대는 제국이 달고 있던 족쇄들을 대다수 풀어버렸다.
“모든 부족들이 전투에 나설 것을 맹세했다. 가짜 칸을 끌어내리고 평화를 이룩하겠다고 하더군.”
황제에게 칸의 이름을 바친 것을 기점으로 투항 부족들은 리미트가 풀린 것처럼 행동했다. 본인들의 안위를 신경 쓰던 때와 달리 적극적으로 도르곤 토벌에 협력하겠다고 선언했을 정도.
덕분에 제국이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투항 부족이 전장에 나섰기에 그들을 보호 및 감시할 병력을 다른 곳에 돌릴 수 있었고, 더욱 많은 기병 전력이 생겨서 도르곤의 군세가 국경에서 얼쩡거리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억지로 건재를 과시할 필요도 없다. 제국군이 도르곤에게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투항 부족들이 다시 탈주할까 봐 전선 조정도 최소한으로 했었지. 상식적으로 1만을 겨우 넘는 병력의 공세로 인해 제국군이 위험에 빠질 리는 없지만, 이미 제국과 유목민은 상식 외의 괴물을 2년이나 지켜봤으니까.
‘이제 숨 좀 쉬겠네.’
그동안 정말 눈물겨운 나날을 보냈다. 지난 전쟁 때야 ‘어떻게든 카간만 죽이면 된다!’ 라는 마인드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했으나, 이번 전쟁은 이전과 달리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제국의 건재를 과시하여 투항 부족에게 믿음을 줘야 했고, 그들의 안전 보장 겸 감시를 위해 병력도 빼고, 겨우 복구한 제국 북부를 위해 국경을 미친 듯이 살피고, 원정군을 동원한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규모 충돌을 최대한 피하고…
그 모든 조건을 고려하며 싸워야 하는 기적의 상황에 수뇌부는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원래 게임에서도 스테이지 클리어보다 모든 추가 조건 달성이 힘든 법이니까.
그러나 이제 그 억압과 족쇄를 벗어던질 수 있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도르곤을 압살할 시간만 남았다.
‘지금보다 좋은 판은 만들 수 없다.’
6만에서 7만을 예상했던 도르곤의 군세는 1만 4천 정도로 떨어졌다. 그에 비해 제국은 20만이 넘는 원정군에 투항 부족까지 참여했다.
심지어 칸 추대 사건으로 인해 아군의 사기도 극에 달했다. 최상의 환경에서 싸우는 것이 지휘자의 덕목이나, 지금보다 좋은 환경은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적기다.
‘끝이 나겠어.’
뒷짐을 진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레이 전투 이후로 도르곤과 만나지 못했지만,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거다.곧 끝을 낼 수 있을 거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오늘은 날이 아니었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붙어보자고.”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도망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도망칠 새끼였으면 애초에 봉기하지 않았을 테니.
***
남들 죽을 때 같이 죽지 못해서 그런가, 별 희한한 이야기를 다 듣게 된다.
‘칸이라.’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칸을 자칭하거나 추대를 받은 자들은 많지만, 설마 유목민이 아닌 제국인이 칸으로 추대를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오늘날 명분과 실리는 제국인 칸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늘이 그것을 허락했다.
“가진 놈이 더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군.”
농담 섞인 말에 다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어찌 제국인이 칸이라고 할 수 있겠냐 분통을 터뜨리지도, 본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됐다고 자책을 하지도 않았다.아무래도 상식이 무너지는 충격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다.안타까운 일이다.
“황제 겸 칸이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카간이라고 해야 하나?”
“칸이시여!”
그러나 충격에 빠져있던 다샨도 카간이라는 말에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는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농담이다. 애초에 황제부터가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할 거야.”
그래, 카간은 제국과 황제에게 있어서 악몽과 같은 단어일 터. 굳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을 거다.
어지간한 변태가 아닌 이상 말이야.
“놈들은?”
“전선을 대대적으로 조정 중입니다. 조만간 평야에서 맞붙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발목 잡힐 것이 없는 제국이 얌전히 수비 태세를 유지한다고 했으면 오히려 의심했을 일이다.
이제 여러 전선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것도 끝이다. 제법 귀찮은 일이었는데 잘 됐다고 해야 할지,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에 결의를 다져야 할지 모르겠다.
“제국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대기한다. 화려한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는데 힘을 뺄 필요는 없지.”
“예, 칸.”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다샨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지난 전쟁 때는 같은 케식으로서, 그 이후로는 노숙 동료로서 정이 많이 들었다. 지금은 충직한 부관으로 고생 중이고.
그리고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 중임을 맡기게 되었으니, 미안하고도 고마울 뿐이다.
“생각이 변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아무 대답도 없이 허리까지 숙이는 다샨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의 생각이 변할 일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묻고 싶었다.
제국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기에 슬슬 준비를 시작했다.
‘많군.’
그동안의 전투로 인해 숫자가 줄기는 했지만 아직 1만이 넘는 병력이 집결했다. 나 같은 미치광이가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는 것에 놀라울 지경이다.
“인간 다섯이 모이면 하나는 쓰레기인 법이지.”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문득 과거, 크라시우스 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둥이가 여러 의미로 파멸적인 놈이니 수시로 해괴한 말을 했었는데, 기이할 정도로 그 말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아마 나도 속으로는 공감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그 말이 맞다는 걸 확인 중이지 않나.
‘얼추 다섯 중 하나기는 하군.’
하여간 빌어먹을 새끼. 개 같지만틀린 말은 하지 않아서 더 짜증 난다.
슬쩍 품 속에 있는 주술서를 매만졌다. 딱 한 장만 만든─ 이 한 장이 실패한다면 하늘이 원치 않는다는 심정으로 준비한 주술서.
‘성공하겠지.’
근거는 없지만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훌륭한 장치인데, 이 정도는 성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