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71)
로판 속 공무원 371화(372/451)
대인전에서 멸세를 쓰는 건 그분조차 하지 않은 금기다. 멸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틈이 생기기에, 그 사이에 적의 일격을 맞고 쓰러질 수 있다. 즉 개인을 대상으로 한 멸세는 상대가 자신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광기─ 그 자체다.
아주 조금의 상식만 가지고 있다면 절대 입에도 담을 수 없는 행위. 하지만 어째서일까.
‘꺼려지지 않는군.’
탈라라는 선례를 들먹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런 무의미한 전투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렴풋이 직감했다. 저 말을 들었다면 설령 선례가 없었어도 수락했을 거고, 평범하게 끝을 낼 수 있었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거라고. 이성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소리치지만 본능은 그렇게 속삭였다.
‘최후를 장식하기에는 딱이지.’
이 지겨운 악연을 끝내기에는, 홀로 죽지 못하고 떠도는 패배자가 끝을 맺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방법이기에. 그 어떠한 최후보다도 저놈이 제안하는 것이 화려할 것이기에.
그분이 쓰러진 곳에서 그분의 기술로 모든 것을 마무리한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마침내 모든 후회나 미련을 털어낼 수 있다는 말이지 않나.
“좋다. 그렇게 하지.”
그렇기에 놈에게 답했다. 만약 3년 전과 같이 이번에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면 부끄러워서 혀를 깨물었을 거다. 적어도 그런 참사는 피할 수 있게 됐다.
내 대답에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하다. 마치 내가 당연히 수락할 거라 믿었다는 반응이다. 이런 미친 짓을 수락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런 믿음을 보이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 미친 사람 중 하나가 됐지만─ 상관없다. 그분을 따라 제국에 반기를 든 순간부터 나는 상식과 이성을 버리고 살아왔으니.
“탈라가 네놈을 본다면 좋아하겠어.”
“그 새끼는 누굴 봐도 좋아할 새끼다. 그래도 동료를 보면 더 좋아하겠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입꼬리만 올리고 말았다. 그래, 탈라라면 내가 저승으로 가든 저놈이 저승으로 가든 반겨줄 녀석이지.
게다가 사인이 자신과 같은 멸세라는 걸 알면 땅바닥을 구르며 폭소를 할 거다. 뻔한 일이다.
‘하여간 제정신이 아니야.’
그리고 자세를 가다듬는 사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놈도 나처럼 멸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이 순간에 놈이 공격해온다면 난 그대로 쓰러진다. 강화고 뭐고 무방비인 상태에서 심장에 칼이 박히면 죽는 건 순식간이다. 그건 그분이어도 피할 수 없는 최후다.
그러나 놀랍게─ 아니,당연하게도 놈은 기습을 포기하고 본인이 내뱉은 최강의 일격을 준비했다. 어차피 우리 둘밖에 없는 곳이니 말을 어겨도 명예가 더럽혀질 일은 없을 터인데. 목격자가 있더라도 적의 수괴를 처리하는 일이니 누구도 욕하지 않을 텐데.
‘조금만 북쪽에 태어나지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날 곳을 잘못 고른 놈이다. 유목민으로 태어났다면 그분 바로 다음 가는 전사가 되었겠지. 우리와 함께 초원을 달리며 유목민의 나라를 만들었겠지.
갑자기 몰려오는 상념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는 건 멍청한 짓이다. 기껏 후회와 미련을 털어낼 기회를 가졌는데 새로운 미련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찌르기인가.’
어느새 놈은 양손으로 쥔 칼자루를 오른쪽 어깨춤으로 당겼다. 일격으로 끝낼 생각이라 그런지 베기가 아닌 찌르기를 택했다.
옳다. 한 명을 상대로 사용할 기술이라면 타격 범위를 좁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 나도 그에 맞게 행동한다. 이왕 일격을 교환하기로 했으니, 같은 공격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전부 쏟아붓는다.’
자세를 잡자마자 몸 안의 마나를 전부 폭주시켰다. 지금까지는 이런 짓을 하면 몸이 망가져 감히 시도도 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마지막 공격이다. 팔이 부러지든 장기가 터지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눈앞의 미치광이 또한 전력을 다하는 것이 보여서 조절할 수도 없다.
‘끝낼 수 있겠군.’
놈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느끼며 확신했다. 저 기운에 내가 운용 중인 기운까지 충돌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죽는다. 차라리 둘 다 죽으면 죽었지, 둘 다 살 일은 없다. 민망하게 ‘멸세로도 호각이었다.’ 같은 결말은 나오지 않는다.
순간 탈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 개척자가 아니었으면 서로 멸세를 주고 받는다는 발상이 불가능했을 테니 내 최후는 멀고도 멀었겠지.
“크라시우스 칼!”
내 외침에 놈이, 크라시우스 칼이 무언으로 답했다.
“그동안 즐거웠다!”
그 말과 함께 검을 뻗었다.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뒤이어 크라시우스 칼ㄷ─
─어둠이 삼켰다.
빛이 보였다.
***
황급히 눈을 뜨자 주마등이 업로드되다가 튕겨져나갔다. 아무래도 기절한 것 같은데,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했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하늘을 보자 처참하게 찢긴 하늘이 보였다. 아무리 사람을 향해 썼다지만 그 충격은 고작 사람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충격에 하늘은 이번에도 피해를 보고 말았다.
하늘도 저 모양이니 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겨우 목만 들자 문자 그대로 녹아내리는 대지가 보였다.
그런데 저거 지금도 녹고 있는 것 같은데.
‘탈라 때보다 심하군.’
하긴, 하늘 베기의 숙련도는 탈라보다 나와 도르곤이 더 앞서기는 하겠지. 탈라가 죽은 뒤로도 우리 둘은 몇 년이나 살아남았으니까.
그렇게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땅을 짚고 몸을 일으─
‘아.’
익숙한 공허감에 다리와 허리 힘으로 일어났다. 역시 풀파워로 때려 박아서 그런가 팔도 난리가 났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이지.’
어깨 아래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오른팔과 손가락 몇 개가 잘린 채 움직이지 않는 왼팔. 놀랍게도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은 풀파워 하늘 베기의 대가치고는 양호하다. 게다가이 상처에는 영구 치유 불가 디버프 같은 것도 없고. 고칠 수 있으면 됐지.
아무튼 일어나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아주, 아주 희미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마나가 느껴졌으니까.
물론 겨우 느껴질 정도로 희미하고 위태로운 기운이다. 어떤 상태인지는 뻔하지.
“허, 걸을 수 있나?”
한참을 튕겨나갔는지 이상한 곳에 널브러져 있던 도르곤은 내가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너는 그 꼴로 말도 하냐.”
내 입장에서는 이 새끼가 말을 하는─ 아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양팔은 잘렸는지 터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허리 아래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꼴을 보니 사지 하나 잘리고 끝난 내가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주술을 과하게 걸었어. 이 상태로도 숨이 붙어있다니, 주술사가 너무 유능해도 탈이군.”
그 기괴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도르곤이 웃음을 흘렸다. 과도한 도핑이 즉사조차 회피했다는 투정과 함께.
“아, 걱정은 마라.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 아니야.”
“보면 알아.”
딱 봐도 즉사만 피한 꼴인데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그건 그렇고 허무하군. 그렇게 질질 끌던 전투가 한 방에 끝나다니. 진작 이럴 걸 그랬어.”
슬며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는 도르곤. 그러나 허무하다는 말과 달리 목소리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내 끝을 네놈이 맺었으니 만족스럽군. 그래, 역시 내 끝은 크라시우스 칼, 네놈만이─”
“야.”
자기 혼자 유언 타임으로 넘어가려던 도르곤의 말을 끊고 땅에 주저앉았다. 마침 이놈이 살아있다면 물어볼 것이 많다.
“너, 무슨 생각으로 봉기한 거냐.”
입을 다문 도르곤이 말없이 내 눈을 쳐다봤다.
“제국이 네놈들을 위험하다 여기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북방을 완전히 규합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와 싸우기보다 투항을 선택한 부족이 더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전력을 가지고 제국에 대항했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새끼는 저돌적이거나 생각이 없는 놈이 아니다. 오히려 교활하고 눈치가 빠른 놈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난 전쟁에서 홀로 살아남고 두 번째 전쟁을 열어젖힌 게 아닌가.
그런 놈이 콩가루나 다름없는 부족들을 이끌고, 내부 단속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제국을 괴롭힐 수단이 많았음에도 사용하지 않았고, 지휘를 포기한 채 나와 일대일 전투를 고집했다.
이해할 수 없다. 당장에야 도르곤의 의도보다 그로 인해 제국이 챙길 수 있는 이득에 집중해서 넘어갔지만, 당사자에게 속셈을 들을 수 있다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민망한 질문이로군.”
한참이나 말이 없던 도르곤은 픽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하늘 쪽으로 돌렸다.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반응으로 보여서 다시 쪼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고 싶었는데, 살아있으니 어쩔 수 없지. 승자의 질문에 답하는 건 패자의 의무 아니겠나.”
순순히 자백하겠다는 말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홀로 죽지 못한 자로서 마지막 책임을 지고자 했다.”
그 말에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카간은 10만의 유목민을 이끌고 제국에 대항했다. 일정 주기마다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소탕 당하던 유목민들은 그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했고, 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그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10만의 유목민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들을 이끌던 영웅과 대전사들은 죽었다.
그 와중에 홀로 살아남은 것이 도르곤. 유목민의 꿈이, 희망이 죽은 가운데서 홀로 남은 것이 도르곤이었다.
“자신이 있었다. 그분이라면, 하나가 된 우리라면 제국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초원에서 제국을 꺾고 적당히 강화를 맺어 우리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지. 제국 본토에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실제로 제국은 유목민의 나라를 인정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도르곤의 자신처럼 유목민의 꿈이 이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졌다. 그러니 희망이 보이지 않더군. 역사에 다시 나올까 말까 한 이점을 갖추고도 졌는데, 그 이후는 어떻겠나.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이 됐지.”
높이 오른만큼 떨어지는 시간도 길다고 하던가. 다시없을 기회가 사라지자 유목민들은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졌다고 한다. 이런 전력을 갖추고도 졌는데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살다 제국에게 벌레처럼 죽임을 당하는 것이 팔자다─ 라고.
“그건 막고 싶었다. 우리의 나라를 만드는 것에 실패했지만 적어도 내 동포가, 내 민족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놈은 다시금 유목민을 규합했다. 가만히 있어서 제국에게 소탕당해 죽거나 처절한 피지배층이 될 바에는, 제국을 협상장에 끌어오기로 결심했다.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도르곤의 속내를 알고 나니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무리하게 봉기를 하여 제국을 위협한 이유, 그런 주제에 제국군의 신경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은 이유, 칸을 자청한 주제에 내부 부족들을 다스리지 않은 이유, 탈주자들을 관망한 이유.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였나.’
만일 도르곤이 봉기하지 않았다면 북방의 유목민들은 카간 등장 이전처럼 부족 단위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제2의 카간을 방지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제국의 탄압을 온몸으로 맞고, 소리 없이 죽어나갔을 터. 그 과정에서 유목민은 철저히 피지배층, 혹은 노예가 됐을 것이다.
허나 도르곤이 유목민을 규합해 제국을 위협했다. 덕분에 제국은 일방적 소탕이 아닌 포섭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이제 납득이 간다. 납득이 가는데…
“그게 죽음을 자처할 정도였나?”
너무 과도하고 미치광이 같은 이유다. 대토벌 전쟁과 계승 분쟁을 겪은 제국은 추가적인 국력 소모를 꺼리고 있다. 그걸 파악하고 제국이 포섭 카드를 꺼내게 유도한 놈이 왜 다른 건 모른단 말인가.
부족 단위로 흩어진 유목민을 토벌하기 위해 제국은 철저할지언정 무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르곤이 염려하는 소탕도 몇십, 몇백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미래의 일 때문에 도르곤은 다시 제국 앞에 섰다. 닥치고 숨어 살면 천수를 누렸을지도 모르는 놈이 스스로 죽음을 자처했다.
명백한 자살이다. 이놈에게는 카간 같은 무력이 없다. 이 자리에서 나를 죽였어도 언젠가 제국군에게 토벌당했을 놈이다.
“말했지 않나. 홀로 죽지 못한 자의 책임이라고.”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대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동포들에게 우리만의 국가, 제국의 위협을 벗어난 세상을 약속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북방의 총의를 짊어졌지만 부응하지 못했지.”
슬슬 도핑 효과가 사라져가는지 도르곤은 몇 번이나 핏물 섞인 기침을 하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그분은 북방을 위해 총의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그분보다 못한 나는 북방을 위해 총의에 짓눌려 죽어야 했다.”
이제 동포들의 총의는 역천자를 따라 제국에 대항한 역심이 아닌, 제국의 이름 아래 악적을 토벌한 충심이어야 하니까.
그렇게 덧붙인 도르곤은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황이 기꺼운지 웃기만 했다.
‘미친 새끼.’
그 웃음소리를 듣자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죽지 못하여 홀로 책임을 짊어지고, 함께 이루지 못한 이상에 허우적거리던 놈은 결국 미치고 말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발상을 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