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74)
로판 속 공무원 374화(375/451)
원정군에서 지위가 조금이라도 높은 사람들은 전후 처리로 바빴지만, 나는 그 분주함 속에서 한 발자국 벗어날 수 있었다. 중상자(였던 것)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감찰관이 전후 처리에 간섭하는 건 많이 월권이기도 하니까. 애초에 황제가 정말 감찰을 위해 감찰관을 파견한 것도 아니다.
그나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최종 작위 분배였다. 이미 어지간한 유력자들에게는 작위 약속을 했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공을 세운 족장들에게도 작위를 줄 필요가 있었다. ‘가장 큰 전투이자 전쟁을 끝낸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니 그만한 대가를 준다.’ 이런 선례가 남아야 앞날이 편하다.
그렇게 작위 내정자 최종안을 작성했는데─
‘좀 많나?’
후작 내정자 1명과 백작 내정자 12명. 무려 13명의 대영주가 탄생했다.
북방의 면적만 보면 13명이 아니라 30명의 대영주가 탄생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권세는 땅의 넓이가 아닌 인구에서 나오는 법이지 않나. 황량한 북방을 생각하면 대영주 13명은 확실히 많은 감이 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지.’
잠깐의 고민 끝에 결국 수정 없이 직인을 찍었다. 순수히 부족의 영향력과 공로를 생각하면 이게 맞다. 이 중에서 하나를 명단에서 내리면 전부 내려야 하고, 하나를 올리면 전부 올려야 형평성에 맞을 정도로 백작 내정자들의 공로는 박빙이니.
아, 카이타나 백작 같은 압도적 앞잡이 빼고. 그 양반은 후작 공석이 2개였으면 후작이 됐을 양반이다.
‘…대영주 13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
최종안을 챙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은 투항 귀족, 신진 귀족, 유목 귀족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13명은 사실상 하나의 파벌처럼 움직일 거다. 눈치가 없는 사람들도 아니니 당연히 그러겠지.
그리고 아무리 신진 세력에 영지의 힘도 별로라지만, 대영주만 13명인 파벌이 정계에 등장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후작.
‘한동안 시끄럽겠네.’
거기다 본토 귀족─ 구체적으로는 북부에 대영지를 가진 귀족이 북방 세력과 연합하면 정계와 사교계가 뒤집어질 거다. 본토 귀족은 북방의 대변인이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북방은 자신들이 모르는 본토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테니 끈끈한 파벌이 생길 터.
물론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지만.곧 양위 받을 황태자가 고민할 일이지.
‘양위라.’
황관을 쓴 황태자를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황제가 양위를 선언하면 며칠 정도는 제발 물려달라고 대가리를 박아야 하지만, 그 결과가 황태자의 고통이라면 감수할만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원정군 사령부의 유일한 백수로서 먹고 자고 노니 하루하루가 금방 가더라.
그 백수 생활 동안 페넬리아랑 바람을 쐬기도 하고, 오랜만에 묵광대의 수련을 봐주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여유가 생기면 식사도 같이 했다.마음 같아서는 아카데미에 있을 연인들에게도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공식적인 종전 선언이 없었으니 자제했다. 전쟁 중인 군인이 사적인 이유로 가족과 연락하는 건 좀 그렇지.
그렇게 이산가족인 듯 이산가족 아닌 눈물겨운 생활을 보내던 중, 전승공의 소집이 있었다.
“사흘 후에 회군한다.”
수뇌부와 작위 내정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승공은 본론부터 꺼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매우 아름다운 본론을.
“전군은 하블렘 공작령을 거쳐 제도로 향한다. 폐하께옵서 성대한 개선식을 준비 중이시니 알아두도록.”
이어지는 말에 막사에 모인 수뇌부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빠른 귀가를 원한다면 하블렘 공작령을 찍고 각자의 영지나 주둔지로 흩어지는 것이 옳으나, 황제가 친히 성대한 개선식을 준비 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황송한 일이로군요. 폐하의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거 참, 자비로우신 폐하 덕에 개선식에 참가하는 영광을 다 누리게 됐습니다.”
웃음 섞인 대화가 막사 안에서 오고 갔다. 그만큼 개선식은 귀족들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이벤트나 다름없다.결코 가볍지 않은 명예와 보상이 안겨질 테니 너무나 기꺼운 이벤트.
하필 그 이벤트를 저번 대토벌 전쟁 때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혹시 이번에도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한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그런데 그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웃음이 나올만하다.
‘넘기기에는 너무 크지.’
비록 전쟁의 규모와 피해는 저번 전쟁이 더 컸지만 상징성은 이번 전쟁이 압도적이다.’당연히’ 토벌해야 하는 유목민에게서 승리를 거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목민들이 황제를 칸으로 추대하여 북방을 바친 사건이니까. 황제와 제국의 위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다.
결정적으로 피해가 적었다는 게 황제의 마음에 든 것 같다. 저번에는 진짜 원수고 사령관이고 군단장이고 평등하게 죽어나가고, 군단 몇 개가 개박살이 났었지. 이번에는 큰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기는 해.
아무튼 소란이 점차 가라앉자 전승공이 덧붙여 말했다.
“또한 개선식에서 작위 내정자들이 폐하께 칸의 작위를 바치면, 폐하께서 이를 받아들이심과 동시에 내정자들을 정식 작위 귀족으로 임명하실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장소에서 작위를 수여받는다는 말에 이번에는 작위 내정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만인이 인정하는 귀족이 되시겠군요.”
“하하, 백작이 돼도 아는 척은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경과 쌓은 우정이 있는데 외면할 리 있겠습니까.”
그동안 전쟁에서 함께 구르며 쌓은 정, 그리고 곧 대영주가 될 자들과 친분을 유지해도 나쁠 건 없다는 계산 덕분에 내정자만이 아닌 수뇌들도 훈훈한 덕담을 날렸다.
작위를 받을 자들이 유목민이다?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다. 유목민 백작도 백작이고, 유목민 후작도 후작이다. 유목민 귀족의 작위를 한 단계 다운그레이드 하여 취급하는 게 아닌 이상 민족 차이는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니 가장 열린 마인드를 가진 존재가 귀족들이네.
***
전승공의 보고를 서면화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앉아만 있으면 몸에 무리가 오니 틈틈이 일어나는 것이 업무 효율에 좋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는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이상이 없었는데, 어느덧 앉아있는 것도 힘든 육체가 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더 망가지기 전에 끝났으니 다행이군.’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버틸 수 있을 때에, 내 의지로 제국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때에 모든 일이 끝났다.
후계는 굳건하고 내부의 혼란을 수습했다. 이제 외부의 우환을 도려내어 영토까지 넓혔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남은 사명이 있다면 곧 태어날 황손을 황태손으로 임명하는 것뿐이다. 이는 내가 준비할 것 없이 시간만 흐르면 될 일이니, 사실상 모든 것이 끝났다.
‘…황태손.’
실로 아름다운 단어다. 방계 출신인 나와 달리, 서자인 태자와 달리 그 아이는 하늘이 내려준 정통성을 갖게 되었다. 태자와 태자비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이자 황태손이라면 살아있는 권위나 다름없다.
300년 역사도 채우지 못한 채 망국을 눈앞에 두었던 제국. 그런 제국을 부족한 정통성과 싸우며 부흥시켜야 했던 수십 년의 세월.
그 세월 끝에 태자에게 정통성은 주지 못했으나 위대한 제국은 물려줄 수 있다. 그리고 황태손에게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대제의 보우하심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 한 장을 손에 들었다. 감찰부장이 전승공을 거쳐 보고한 작위 내정자에 대한 자료.
‘실로 보우하심이지.’
후작 1명과 백작 12명으로 이루어진 내정자 명단. 그 명단을 보자마자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감찰부장은 내 기대대로 사익이 아닌 국익을 위하여 작위를 수여했다. 철저히 효율을 생각하며 내정자를 선정했다. 그동안 받은 보고와 몇 번이나 교차 검증을 한 것이니 확신할 수 있다.
후작의 인장을 전적으로 맡겼으니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부족에게 넘길 수도 있었는데, 특정 부족과 사적 거래를 하는 정황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시킨 일만 처리하고 손을 턴 인상이 강하다.
‘조금만 빨리 태어나지 그랬나.’
감찰부장 같은 신하가 즉위 초에도 있었다면 활동이 더 편했을 터인데. 궁내성 장관도 충분히 유능하지만, 당시의 혼란은 수족 한 명으로 이겨내기 벅찬 마경이었다.
…아니, 배부른 소리 하지 말자. 궁내성 장관 같은 수족도 없어서 무너진 군주는 역사에 넘치고 넘친다. 당장 선황만 하더라도─
“으음.”
선황에 대해 떠올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두통이 찾아왔다. 선황보다 이전의 황제는 차마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살짝 고개를 저어 악몽을 털어냈다. 지금은 끔찍한 과거가 아닌 영광되고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예를 들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충신에게 내릴 포상 같은 것.
일단 전승공을 위시한 다른 귀족들에게 내릴 포상은 명백하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내릴 포상은 관례가 충분한 상황이니.
‘감찰부장이 원할 포상이라.’
허나 감찰부장은 명분상 장수가 아닌 감찰관으로 참여한 것이다. 적의 수괴를 죽이며 장수로서의 공도 세웠으나, 장수에게 내리는 포상을 그대로 주면 내 손으로 명분을 어기는 셈이다. 부족하게 주지는 않겠지만 동일하게 줘서는 안 된다.
‘딱 좋은 것이 있군.’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운 서류를 작성했다. 북방 유목민들이 제국의 품에 안겼으니 시기적으로도 옳다.
그리고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 감찰부장은 이 포상을 좋아할 것이다.